17화. 지금 내 눈앞에,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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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지금 내 눈앞에2020.05.28.
조수석 뒷자리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던 하경의 귀로 승조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먼저 올라가십시오. 주차하고 가겠습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침부터 시작된 두통이 약을 2번이나 먹었는데도 전혀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당장 내일이 상견례인데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으니 머리가 안 아프면 이상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럴게요.”
하경은 주원 호텔 본관 입구에서 멈춘 차에서 내려 로비에 들어섰다. 평소와 다름없이 허리를 곧게 펴고 당당하게 걷고는 있었지만, 발을 땅에 디딜 때마다 머리가 쾅쾅 울렸다. 그 와중에 날카로운 여자의 외침이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저 여자야!”
하경은 매너 없이 시끄럽게 군다고만 생각했을 뿐 걸음을 멈추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저 여자’가 자신이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몇 초 후, 친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누나!”
하경의 두 다리가 멈칫했다. 한결의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는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대체 얼마나 더 주의를 줘야 회사에서 누나라고 부르지 않을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컨디션이 안 좋은데 한결까지 한몫 거들고 있었다.
“……?”
하경은 고개를 돌리고서야 한결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금 전 큰 목소리의 주인공이 지금 자신을 손가락질하고 있는 여자라는 것도. 유현이 묵었던 1407호 앞에서 본 여자임을 기억해 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저 여자가 주하경이라고?”
한결에게 묻는 말이었지만, 하경의 귀에도 너무나 잘 들렸다. 처음 만났던 날이나 두 번째 만난 오늘이나 어쩜 이리도 한결같이 무례한지. 이 여자, 저 여자, 참으로 서슴없었다. 하경은 머리 아픈 일이 또 한 가지 늘어났다고 생각하면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 와중에 자신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매우 거슬렸다.
“그 손가락 좀 치워줄래요?”
어리둥절한 눈으로 한결을 보고 있던 율리는 지척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하경이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얼굴을 본 적만 없을 뿐, 율리도 한결의 누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주서호 회장의 딸이며 주원 호텔 이사, 주하경. 율리가 하경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던 그때, 한결이 율리의 손가락을 덥석 움켜쥐고 끌어내렸다. 누나가 율리의 예의 없는 행동에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누나, 지금 공항에서 오는 길이야?”
하경이 그에게 시선을 옮기며 건조하게 대답했다.
“어.”
제주도 출장을 마치고 지금 막 돌아오는 길이었다.
“왜 이래. 놔!”
한결이 분위기를 환기한 보람도 없이, 율리는 그에게 잡힌 손가락을 홱 뿌리치고 하경에게 앙칼지게 물었다.
“주하경 씨 맞아요?”
“그런데요?”
하경은 재벌가 자제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모임, 저 모임, 발을 걸치고 있는 율리와는 달리, 사업상 반드시 친분을 유지해야 하는 이들과의 모임 한두 개만 가끔 참석할 뿐이었다. 그러니 지금껏 두 사람이 마주칠 기회가 없었던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또한 하경은 매스컴에 노출되는 것도 극히 꺼려 왔기에 인터넷상에서도 그녀의 사진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율리가 그동안 하경을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던 건 두 사람이 속한 모임의 수준 차이 때문이기도 했다. 중견 기업 대표의 딸에 불과한 율리는 하경과 노는 물이 조금 달랐다. 남매이긴 해도, 워낙 노는 것을 좋아해서 어지간한 모임은 죄다 참석하는 한결이 특이한 경우였다.
“우리 본 적 있죠?”
하경은 대답 대신 고개만 까딱거리고 한결을 돌아보았다. 한결은 누나의 눈빛이 무엇을 묻고 있는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냥 좀 아는 동생이야.”
아는 동생. 최근 들어 싫어진 단어였다. 유현의 입에서 나올 때도 싫더니 한결의 입에서 나오는 것도 듣기 싫었다.
“채율리라고, 태홍 식품 둘째.”
태홍 식품은 탄탄한 중견 기업이기는 해도, 주원 호텔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태어나면서부터 공주 대접을 받고 살아온 율리는 정말 자신이 어느 나라 공주인 줄 알고 있었다. 하경의 앞에서 잘난 척을 하는 건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인 줄도 모르고.
“저기요.”
마주 보고 있던 하경과 한결이 동시에 율리를 돌아보았다.
“주하경 씨랑 민건 오빠랑 곧 결혼한다고 들었거든요? 근데 왜 유현 오빠가 그쪽을 결혼할 사람이라고 한 건지 설명 좀 해 주실래요?”
저 여자. 저기요. 그쪽. 불과 몇 분 만에, 그것도 면전에서, 이 말을 다 들은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하경은 그날 유현의 말에 침묵으로 동조해 주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유현과 아는 사이라면 한결과도 친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건 명백히 제 실수였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제 입으로 이러쿵저러쿵 해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설명을 왜 나한테 하라는 건지 모르겠네. 그 말, 한 사람한테 물어봐요.”
“그러죠, 뭐.”
유현이 주원 호텔에 입사했다는 사실을 아는 율리는 재깍 휴대 전화를 들어 올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나야. 지금 로비로 좀 내려와 봐.”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율리를 보고 있던 하경이 입을 열었다.
“이사실로 오라고 해요.”
율리가 휴대 전화를 귀에 댄 채로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왜요?”
“본인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모르나 보네. 사람들이 쳐다봐 주면 좋아요?”
이렇게 셋이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이목을 집중시키기 충분한데, 목청 큰 율리가 떠들어 대는 말들이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관종인가?”
다 들리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하경은 헛웃음을 터트리는 율리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한결을 돌아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데리고 따라와.”
괜히 끼어들었다가 봉변을 당할까 싶어서 조용히 숨만 쉬고 있던 한결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하경은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뒤에서 한결과 율리가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모른 척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0층에 도착하는 내내 두 사람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유현은 이미 이사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획팀 사무실이 이사실 바로 옆이라 1층에서 올라온 세 사람보다 빠른 건 당연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하경을 한번 보고서 율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채율리, 지금 뭐 하는 거야.”
“한결 오빠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왔다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난 것뿐이야. 난 여기까지 올라오고 싶은 마음 없었어.”
율리가 난데없이 한결을 만나러 온 이유는 일요일 저녁 식사 약속이 취소됐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꽤 오래전부터 유현을 좋아했다. 손 의원이 자신을 며느릿감 삼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는 더 적극적으로 따라다녔다. 늘 차가운 반응이 돌아왔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더 몸이 달았고, 유현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결혼할 여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여자의 얼굴을 보고서도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무에게도 말 못 하고 일주일 넘게 끙끙대던 와중에, 손 의원이 먼저 전화를 걸어와 다 같이 밥 한번 먹자고 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희망에 부풀었다. 그런데 결국 약속은 취소되었고,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한결에게 달려온 것이었다.
“들어와.”
하경은 나직한 말을 남기고 이사실로 들어갔다. 나머지 세 사람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하경이 먼저 소파 상석에 앉았고, 유현은 그녀의 오른쪽에, 율리와 한결이 유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사실에 흐르는 정적을 깬 사람은 율리였다.
“오빠, 어떻게 된 건지 말 좀 해 줄래? 저 여자랑 결혼한다면서?”
유현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하경이 끼어들었다.
“부모님께서 아주 바쁘게 살아오셨나 봐요.”
“네?”
율리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하경을 돌아보았고, 유현과 한결도 동시에 하경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경은 우아하게 다리를 꼬면서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가정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것 같아서요.”
율리의 얼굴에 핏대가 섰다.
“뭐?”
목소리를 높인다 한들 위축될 하경이 아니었다.
“말이 짧네?”
하경은 아버지뻘 되는 임원들과의 기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다섯 살이나 어린 데다가 대학원을 다니느라 아직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해 본 적도 없는 율리가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당신이 뭔데 가정 교육을 운운해!”
저 여자. 저기요. 그쪽. 거기에 당신까지 추가. 하경이 픽 웃음을 터트린 그때, 유현이 말문을 뗐다.
“채율리.”
그는 세 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넌 뭔데? 네가 뭐라고 회사까지 찾아와서 이러는 건데?”
시리도록 차가운 어조였다.
“오빠가 먼저 거짓말했잖아!”
“내가 거짓말을 했든, 헛소리를 했든, 너한테는 이럴 자격이 없다는 말이야.”
“…….”
율리는 원망 가득한 눈으로 유현을 노려보았다.
“내 뭐라도 된 것처럼 굴지 마. 불쾌하니까.”
그 순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잠자코 있던 한결이 합세했다.
“그래, 채율리. 너 너무 많이 갔어. 어떻게 사람이 눈치라는 게 없냐. 그 자리에 없었던 나도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 네가 이렇게 질기게 구니까 저 자식이 우리 누나를 방패막이로 이용하면서까지 널 떼버리려고 한 거잖아.”
연이은 질책에 서러워진 율리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왜 오빠까지 난리야!”
“너 때문에 내 기분까지 더러워져서 그런다, 왜? 어디서 말도 안 되게 우리 누나랑 유현이를 엮어.”
율리는 유현보다, 한결보다, 하경이 더 미웠다.
“편들어줄 사람 많아서 좋겠네요.”
하경은 말을 더 얹을 생각이 없었다.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와 똑같은 수준이 되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달라졌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을 줄 알아야 한다는 걸 알려주기로 했다. 담담한 표정으로 소파 옆에 놓인 전화기로 손을 뻗은 그녀는 내선을 연결했다.
“잠깐 들어와요.”
하경이 전화기에서 손을 떼기도 전에 이사실 문이 열리고 승조가 안으로 들어섰다. 세 사람이 이사실에 들어오고 난 직후에 도착한 그는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부르셨습니까, 이사님.”
하경이 차분하게 지시를 내렸다.
“태홍 식품의 주요 거래처가 어딘지 확인해서 알려줘요.”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뒤돌아 방을 나가는 승조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율리가 하경을 돌아보았다.
“지금…… 뭐예요?”
“지금 채율리 씨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아마 그게 맞을 거예요.”
“설마 우리 아빠 회사랑 거래하는 업체에 연락해서 거래 끊으라고 하려는 건 아니죠?”
“내가 못 할 것 같아요?”
“…….”
그제야 현실을 직시하게 된 율리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주원 호텔의 인맥과 영향력이라면 주요 거래처 한두 군데 정도는 움직일 수 있을 테고,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앞으로는 입조심하고 살아요. 쓸데없는 일에 공들이고 싶어지게 하지 말고.”
“…….”
조금 전 기세는 다 어디 갔는지, 율리는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유현은 하경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는 것을 확인하고서 한결에게 고개를 돌렸다.
“데리고 나가. 나 잠깐 누나랑 할 얘기 있어.”
“알았어.”
한결이 기다렸다는 듯 율리를 데리고 나갔고, 방 안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미안해요. 다 내 잘못이에요.”
“다 네 잘못이라고 생각 안 해. 호응해준 건 나니까.”
“오해하는 거 아니죠?”
“뭘?”
“나랑 채율리 사이.”
제 눈으로 똑똑히 본 이상, 오해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뭔가가 있었다면 그렇게 대놓고 무안을 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내가 여지를 줬을지도 모른다는 오해도 안 했으면 좋겠고.”
유현은 하경이 묻기도 전에 그녀가 모르고 있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누나랑 우리 형 같은 사이예요.”
“나랑 민건 오빠 같은 사이?”
“아버지들끼리 먼저 결혼에 합의한 사이.”
“…….”
“아버지가 날 그 집에 팔고 싶어 해요.”
유현은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하경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난 아버지 바람을 충족시켜 드릴 생각이 조금도 없어요. 내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지금 내 눈앞에 있으니까.”
“…….”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시선과 시선이 은근하게 얽혔다. 입으로는 거짓을 말할 수 있어도 맞닿은 눈결은 솔직했다. 손유현은 주하경에게, 주하경은 손유현에게 끌리고 있다고 서로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하경은 씻고 나와서 곧장 침대에 누웠다. 일찍 자려고 했건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휴대 전화 화면에 떠 있는 ‘손유현’이라는 이름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한참 만에 전화를 받았다.
“왜.”
[아까 못 한 얘기가 있어서 전화했어요.]
“뭔데.”
[상견례, 취소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