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새빨간 거짓말,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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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새빨간 거짓말2020.05.21.
“여전히 내가 조금도 남자로 안 보여요?”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뒤, 하경이 담담하게 말문을 열었다.
“어, 안 보여.”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는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남자로 보인다고 대답해 버리면 유현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섭섭하네. 난 누나가 여자로 보이는데.”
“…….”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그가 훅 치고 들어오자, 하경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결혼하자는 말을 들었던 날보다 더 당혹스러웠다. 그가 ‘주원 호텔 후계자 주하경’이 아닌 ‘여자 주하경’을 두고 한 말이기 때문이었다. 유현은 동요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만 갈게요. 냉찜질 꼭 해요.”
“응? 응…….”
“혹시라도 더 아파지면 전화해요. 병원 가게.”
“…….”
허리를 살짝 굽힌 그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는 하경의 손에 얼음 팩을 쥐여 주었다.
유현은 오늘에서야 비로소 제 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하경이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녀를 더 혼란스럽게 하지 않기 위해 물러나 주는 것이었다. 제 고백을 곱씹어 볼 기회를 주고 싶기도 했고.
“쉬어요.”
하경은 유현의 바람대로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를 들은 이후로도 한참을 그의 말을 되새겼다. 그리고 평상심을 되찾고 나서야 유현으로부터 대답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자로 보인다는 그의 고백과는 별개로, 그가 자신과 결혼하려고 하는 진짜 이유가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 이튿날 오전 11시. 유현은 20층 복도에서 우연히 한결과 마주쳤다. 기획팀과 마케팅팀을 포함한 전 부서가 20층에 모여 있어서 오며 가며 얼굴을 보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사실 또한 같은 층이었다.
“어때? 일은 할 만하냐? 뭐 어려운 건 없고?”
유현은 선배랍시고 거들먹거리는 한결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한결은 그가 상대해주지 않아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15년 가까이 이렇게 지내왔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오피스텔 입주, 오늘이라고 했지?”
“어.”
훤칠하고 준수한 두 남자 덕분에 복도가 환해졌다. 유현은 물론이거니와 한결도 촐싹거리는 성격만 빼면 허우대는 멀쩡했다.
“나 저녁에 약속 있어. 못 도와줘.”
“필요 없어.”
풀옵션 오피스텔이라 옷만 가지고 들어가면 끝이었다. 유현은 만약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생긴다고 해도 산만하고 뺀질대는 한결에게 도움을 받을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뭐든 혼자 하는 게 더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점심은 같이 먹어줄 수 있는데.”
“그것도 필요 없고.”
“같이 먹어주라.”
한결은 더 뻗대지 않고 빠르게 꼬리를 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 누나다!”
한결이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하경을 발견한 것과 동시에 유현의 시야에도 그녀가 들어왔다. 혼자가 아니라 비서실장 겸 기획팀 팀장과 함께였다. 아직 입사한 지 3일 차라 몇 번 본 적이 없긴 해도, 볼 때마다 하경은 승조와 같이 있었다. 모든 업무를 그와 함께한다는 걸 알면서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유현은 승조를 돌아보며 웃는 하경이 못마땅했다. 자신에게는 헛웃음과 코웃음을 빼면 거의 웃어준 적 없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저리도 환하게 웃다니. 제 감정을 확인하고 나니 폭풍 같은 질투가 밀려들었다. 그가 낯선 감정에 빠져 있는 사이, 한결은 해맑게 웃으면서 하경을 향해 부리나케 달려갔다.
“누나!”
그제야 한결의 존재를 알아차린 그녀가 콧등을 찡그렸다.
“회사에서는 호칭 똑바로 하라고 했을 텐데?”
“뭐 어때. 우리밖에 없는데.”
하경이 한마디 하려는 순간, 천천히 걸어온 유현이 한결의 뒤에 멈춰 섰다. 하경과 유현의 시선이 맞닿았다. 유현이 먼저 묵례했고, 하경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두 사람이 어젯밤 일을 떠올리고 있을 때, 한결이 끼어들었다.
“누나, 오늘 같이 점심 먹자.”
“…….”
하경은 한결의 말을 귀로 들으면서 눈으로는 제 얼굴에 닿아 있던 유현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시선이 제 발목에서 멈출 거라는 건 쉽게 예상 가능했다.
“내 말 들었어? 같이 점심 먹자고.”
하경의 눈이 그제야 한결에게 향했다.
“갑자기 왜.”
“왜는 무슨. 같이 밥 먹은 지 오래됐잖아.”
“…….”
하경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왠지 유현이 동석할 거라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한결 앞에서 유현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기해야 하는 게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네 사람, 일식당 예약해 놓을게.”
한결은 시선을 돌려 승조를 바라보았다.
“누나랑 같이 오세요.”
“…….”
승조 또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경이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이 먼저 알겠다고 할 수는 없어서였다. 주씨 남매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쯤은 함께 식사를 했다. 승조와 셋이 먹은 적도 몇 번 있었기에 한결의 초대가 그리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한결이 식사 자리를 마련한 건 사실 유현을 위해서였다. 회사 돌아가는 사정에 빠삭한 승조와 친해지면 유현에게 득이 되면 됐지, 실이 될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오지랖이었다. 뻣뻣한 두 남자가 친해질 수 있도록 물꼬를 터주리라, 쓸데없는 사명감에 젖어 있었다.
“좀 이따 봐, 누나.”
“어.”
하경이 한결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승조가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사코 거절하면 점심 약속이 없다는 걸 뻔히 아는 그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였다. 한결이 씩 웃으면서 하경의 곁을 지나쳐간 뒤, 유현이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섰다.
“병원 안 가봐도 괜찮겠어요?”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얼음찜질 덕분이었을까. 비록 얼음이 다 녹아서 새 얼음으로 바꿔야 하긴 했지만, 그의 당부대로 얼음찜질을 하고서 잠자리에 들었다. 유현이 알든 모르든, 걱정해 준 그에게 최소한의 성의를 보인 것이었다. 하경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유현은 승조를 향해 목 인사를 하고서 한결의 뒤를 따랐다.
“병원이라니, 어디 아프십니까?”
“별일 아니에요.”
승조는 딱 잘라 말하고 멈췄던 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굳은 표정으로 뒤따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손유현은 알지만, 나는 모르는 일.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었던 건 분명한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하경과 유현 사이에 오가는 묘한 분위기의 실체가 뭔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감히 다른 의심을 하지 못하는 건, 두 사람이 예비 형수와 예비 시동생 사이이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확실히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하경이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 그로부터 1시간 뒤. 유현은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 먼저 올라가 있으라는 한결의 메시지를 받고 혼자서 24층으로 향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방 안에는 하경이 혼자 앉아 있었다.
“왜 혼자 있어요? 임 팀장님은?”
“잠깐 화장실 갔어. 한결이는?”
유현은 하경이 혼자 있을 줄 몰랐고, 하경은 유현이 혼자 올 줄 몰랐기에 서로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릴리즈 될 예정이었던 디지털 영상 광고에 문제가 좀 생겼다나 봐요. 그거 금방 처리하고 온다고 했어요.”
하경은 제 맞은편 자리를 눈으로 가리켰다.
“앉아.”
유현이 의자를 빼고 앉기 무섭게 그녀가 조금 전 하지 못했던 말을 꺼내놓았다.
“너 어제 내 질문에는 대답 안 하고 갔더라?”
“내가 그랬나?”
“…….”
하경의 눈초리가 매서워지자, 그도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나중에 말해줄게요.”
“그게 언젠데?”
“곧.”
진짜 이유를 말해도 우리 사이가 끝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 때. 뒷말을 속으로 삼킨 유현이 빙긋 웃은 것과 동시에 승조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승조는 마주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서 하경의 옆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왜 혼잡니까?”
질문은 유현이 받았지만, 대답은 하경이 했다.
“한결이는 급한 일이 생겨서 그거 처리하고 온대요.”
“아, 네.”
“우리 먼저 밥 먹어요. 배고파.”
“식사 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유현은 나란히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주하경의 옆자리는 늘 임승조의 것 같아서 심기가 불편했다. 승조가 벨을 누르자, 직원이 금세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직원으로부터 한결이 코스요리를 이미 주문해 놨다는 말을 듣고 식사를 빨리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 가장 먼저 나온 건 전복 내장죽이었다. 직원이 각자의 자리에 죽 그릇을 놓아주고 나가기 무섭게 하경이 제 것을 승조에게 쓱 밀어주었다. 그리고 승조는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받았다. 유현은 두 사람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번에 눈치챘다.
“전복 못 먹어요?”
“못 먹는 건 아니고 안 먹어. 안 좋아해.”
식사 자리에서 전복이 들어간 음식이 나오는 경우, 하경은 아예 손대지 않고 옆으로 밀어 두거나 승조와 함께 있을 때는 그에게 주곤 했다. 둘 사이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유현에게는 아주 못마땅한 일이었지만.
“다른 거 준비해 달라고 할게요.”
“아니야. 됐어.”
하경은 전복이 들어가지 않은 애피타이저를 준비해 달라고 하기 위해 벨로 손을 뻗는 유현을 만류했다.
“배고프다면서요.”
“못 참을 정도 아니야.”
유현이 더 우기지 못하고 입을 다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죄송합니다. 아주 살짝 늦었습니다.”
헤실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선 한결에게 세 사람의 시선이 모였다. 하경은 유현의 옆에 앉는 그를 떨떠름하게 바라보면서 말문을 뗐다.
“먼저 밥 먹자고 한 사람이 제일 늦게 오는 건 무슨 경우야.”
“몇 분이나 늦었다고.”
“몇 분이든.”
“놀다 온 거 아니야. 일하다 왔어.”
“평소에나 열심히 해.”
한결은 양심에 찔려 차마 반박은 하지 못하고 딴청을 피웠다.
“아, 배고프다…….”
음식이 하나둘씩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었다. 사람은 넷인데, 대화의 8할은 한결의 몫이었다.
“누나 내일 제주도 출장 간다며?”
“어.”
“임 팀장님이랑?”
“어.”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하경의 말투는 심드렁했다. 승조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한결조차도 입 아프게 괜한 걸 물었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넷 중, 오직 유현에게만 당연하지 않았다.
“언제 오는데?”
“가봐야 알아. 내일 저녁에 올 수도 있고, 하루 이틀 있다가 올 수도 있고.”
“이번 주 토요일이 상견례지?”
한결의 입에서 나온 세 글자로 분위기가 급격히 경직되었다. 그는 세 사람의 표정이 왜 동시에 굳었는지 짐작도 하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몇 시까지, 어디로 가면 돼?”
“몰라. 아버지한테 물어봐.”
“누나 상견례거든? 누가 들으면 딴 사람이 결혼하는 줄 알겠네.”
“…….”
하경이 아무런 대꾸 없이 달걀찜으로 숟가락을 가져가자, 한결은 제 왼쪽에 앉은 유현으로 타깃을 바꿨다.
“우리 그날은 진짜 사돈으로 보는 거네.”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인마. 우리 누나랑 너희 형이 결혼하면 우리 사돈이잖아.”
유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한결을 돌아보았다.
“설레발치지 마.”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어조에 순간적으로 움찔한 것도 잠시, 한결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설레발이라니! 결혼식 얼마 안 남았거든!”
“…….”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던 유현은 묵묵히 고개를 돌리다가 하경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선을 내리고 애꿎은 장국을 휘젓던 그의 귀로 한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팀장님 올해 서른넷 맞죠? 우리 누나보다 세 살 많은 걸로 기억하는데.”
한결이 승조에게 관심을 보이는 신호였다.
“맞습니다.”
“결혼 생각은 없으세요?”
지금 이 순간, 한결의 관심사는 ‘결혼’이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누가 들어도 내 결혼에 관심 두지 말아 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한결은 해맑게 다시 물었다.
“사귀는 분은요?”
“없습니다.”
“있는 게 이상하지. 어디 연애할 시간이나 있겠어요. 주하경 이사님께서 워낙 꼼꼼하게 부려 먹으시니.”
한결이 빈정거리거나 말거나 하경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워낙 티격태격하면서 지내는 게 익숙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정작 기분이 상한 건 승조였다. 그는 장난으로라도 그녀가 악덕 상사가 되는 게 싫었다.
“이사님께서는 저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십니다. 또한 충분한 보상을 해 주고 계십니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건데…….”
승조는 머쓱해하는 한결을 보면서 조금 전 했던 대답에 한마디 덧붙였다.
“사귀는 사람은 없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