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이대로 끝일 것만 같아서,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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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이대로 끝일 것만 같아서2020.05.17.
4월의 밤. 유현의 허리를 감싸 안은 하경의 손등에 쌀랑한 밤공기가 내려앉았다. 술을 마신 덕분인지 춥기는커녕 시원하게 느껴졌다. 헬멧이 거추장스러운 것만 빼면 완벽한 밤이었다. 하경은 질주하는 오토바이 위에서 유현의 넓은 등에 기댄 채 빠르게 지나가는 네온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으면서 평화가 찾아왔다.
“다치게 안 해요, 절대.”
그의 말이 떠올라서일까. 조금도 무섭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이 남자를 붙잡고 있으면 무슨 일이 닥쳐도 안전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12년 전 그날에는 12년 후 오늘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살면서 유현과 두어 번은 마주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어도, 또다시 그가 모는 오토바이에 타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오토바이는 어느새 복잡한 거리를 벗어나 한적한 길로 접어들었다. 감회에 젖어 들었던 하경은 속도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여기가 어디지?’
그녀가 주위를 휘둘러보는 사이, 인적 드문 갓길에서 오토바이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그리고 유현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며 물었다.
“안 추워요?”
그의 손바닥이 그녀의 손등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손이 차네.”
조금 전에는 오토바이를 탄다는 사실에 들뜬 나머지 유현이 제 손을 잡았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하경은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의 손이 따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을 자연스럽게 넘겼기 때문인지 별로 어색하지도, 거북하지도 않았다. 맞잡고 있던 손을 풀고 허리를 세운 그녀가 헬멧 실드를 열면서 대답했다.
“안 추워. 시원해.”
“불편한 데는 없어요?”
“없어.”
“헬멧 쓰고 있기 답답하죠?”
“응, 답답해!”
하경이 반색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답답해도 참아요.”
“…….”
‘답답하면 벗어요’라는 말을 기대하고 있다가 실망한 하경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집에 데려다줄게요.”
“벌써?”
선심 쓰듯 애피타이저 조금 주고 식사 끝이라고 선언한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아직 경찰한테 안 걸렸지만, 언제 걸릴지 몰라요.”
“걸리면 나보고 과태료 내라며. 낼게.”
“경찰이었고 검사였던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불법 저지르자고 하면 곤란한데.”
“…….”
“다음엔 좀 더 오래 태워줄게요.”
하경은 제 철없는 행동을 반성하느라 유현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다음에 밥 한번 먹어요’처럼 형식적인 말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만 가자.”
유현의 얼굴에 갑자기 미소가 떠올랐다. 꽉 잡으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의 팔이 제 허리를 감아왔기 때문이었다.
“출발할게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오토바이는 10여 분 뒤 하경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천천히, 조심해서 내려요.”
하경은 유현의 어깨를 짚고 오른쪽 발을 땅에 디뎠다. 그리고 그 발에 무게 중심을 실은 순간, 하이힐을 신은 발목이 꺾이고 말았다.
“아!”
유현이 휘청하는 그녀의 팔을 빠르게 낚아챘다. 하경은 발목 통증을 꾹 참고 오토바이에서 내려왔다. 그가 잡아주지 않았다면 바닥에 나동그라지고도 남았을 상황이었다.
“괜찮아요?”
하경이 헬멧을 벗는 사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오토바이에서 내린 유현이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발목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아파요?”
하경이 흠칫 놀란 건 아파서가 아니라 남의 손이 닿아본 적 없는 곳에서 느껴진 생경한 감각 때문이었다.
“……괜찮아.”
유현은 그녀의 발목에서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걸을 수 있겠어요?”
“당연하지.”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당당하게 한 발 내디딘 하경은 찌릿한 통증에 멈칫했다. 왜 오늘따라 유난히 높고 가는 굽을 신었을까 후회스러웠다.
“업힐래요?”
“아니.”
“그럼 나 잡고 걸어요.”
그녀의 시선이 유현이 내민 팔로 향했다. 처음부터 팔을 내밀었다면 반사적으로 됐다는 말부터 나왔을 텐데 그에게 업히는 상상을 하고 나니 팔을 잡는 것쯤이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친 부위는 안 써야 빨리 나아요.”
“…….”
하경은 말없이 제 옆에 다가와 선 유현의 팔에 제 팔을 살짝 감았다. 그 정도로는 불안하다는 듯, 그는 조금 더 가까이 서면서 그녀의 팔을 제 팔에 단단하게 엮었다. 마치 다정한 연인이 팔짱을 낀 듯한 모양새였다.
“오래 걸려도 되니까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걸어요.”
하경은 그의 말대로 조심조심 발걸음을 뗐다. 오른쪽 발에는 최대한 무게를 싣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유현이 든든하게 받쳐준 덕분에 현관 앞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하경이 이제 됐다고, 그만 가도 된다고 말하기 위해 유현을 돌아본 순간, 그가 선수를 쳤다.
“잠깐 들어가도 돼요?”
도움만 받고 입 씻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안 된다고 할 수 없었다. 굳이 못 들어오게 할 이유도 없었고.
“들어와.”
하경은 그가 보는 앞에서 순순히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비밀번호 안 바꿨네.”
“그러게.”
그녀가 남의 말 하듯 받아치자, 유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바꿔요. 내가 알잖아요.”
“너…….”
너 말고는 아무도 모르잖아. 하경은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가려던 말을 황급히 삼키고 말을 돌렸다.
“……바꿀 거야.”
부모님과 한결도 모르는 비밀번호를 유현이 알고 있는데도 왜 아무렇지 않은 걸까. 왜 그에게는 경각심이 일지 않는 건지 스스로도 희한했다. 이러다가는 조만간 무장해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들어가요.”
유현의 부축을 받고 집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하이힐을 벗고 거실 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제야 잔뜩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힘을 뺄 수 있었다. 하경이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한숨 돌리는 사이, 유현은 소파 밑 러그에 앉아서 그녀의 발을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
깜짝 놀란 그녀가 커진 눈으로 허리를 곧추세웠다. 남의 발을, 그것도 온종일 밖에 있다가 들어온 사람의 발을 아무 거리낌 없이 만지다니. 발목만 만지는 것과 발 자체를 손으로 감싸는 건 또 달랐다.
“가만히 좀 있어 봐요.”
버둥거리는 하경을 달래며 발목 상태를 유심히 살핀 유현이 고개를 들었다.
“붓기가 거의 없는 걸 보면 심하게 삔 것 같지는 않아요. 그래도 냉찜질은 하는 게 좋겠는데.”
그는 그녀의 발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집에 얼음 있어요?”
“내가 할 테니까 그만 가.”
“안 할 거면서.”
“…….”
“잠깐 있어 봐요.”
유현은 정곡을 찔려 말문이 막혀 버린 하경을 뒤로하고 부엌으로 향했다. 하경은 옥신각신하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솔직히 그가 걱정해 주고, 신경 써 주는 게 싫지 않았다. 그가 스스럼없이 구니 더 정색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뭐가 어디에 있는지 하나도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유현은 금세 돌아왔다. 그리고 조금 전 앉았던 자리에 도로 앉았다.
“얼음 냉장고였고, 두 번째 서랍 열어 보니까 위생 백이 있었고, 수건은 벽에 걸려 있던 거 가져왔어요.”
하경은 신속하고 정확한 그의 행동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직접 갔어도 유현보다 더 빨랐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얼음이 담긴 비닐을 얇은 수건으로 감싸던 그가 하경의 발을 흘긋 보며 말했다.
“스타킹 좀 벗어볼래요?”
“……뭘 벗으라는 거야.”
유현이 눈꺼풀을 슬쩍 들어 올렸다.
“스타킹 벗어보라고 하는 거 실롄가?”
“어, 실례야.”
“아, 그렇구나…….”
찬기가 맨살에 직접 닿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을 뿐, 불순한 의도는 전혀 없었다.
“미안해요. 양말이나 스타킹이나 별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달라.”
발목 스타킹 정도는 양말과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해도 되겠지만, 그녀가 지금 신고 있는 건 팬티스타킹이었다. 바지를 벗어야만 스타킹도 벗을 수 있었다.
“얼음이 좀 녹아야 차가워지겠네…….”
하경은 머쓱하게 말을 돌리는 그를 보면서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손유현도 당황할 때가 있구나, 신기했다. 아무 말 없이 얼음팩을 만지작거리던 것도 잠시, 유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경을 올려다보았다.
“나,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12년 전 그날, 무슨 일 있었어요?”
하경은 자신이 그의 오토바이에 처음 탔던 날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왜 그런 돌발 행동을 했었는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탓인지 쉽사리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결국 유현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왜? 나 어디 이상했어?”
그는 그날 그녀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뭐랄까…… 어딘지 모르게 허탈하고 허무해 보였어요.”
어깨가 처져 있었다거나, 눈꼬리가 내려가 있었다거나,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오로지 그녀의 텅 빈 눈빛을 보고 알아차린 것이었다.
“내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던 하경의 뇌리에 그날의 기억 하나가 번뜩 스쳤다.
“아!”
“기억났어요?”
“무슨 시험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날 성적이 나왔어. 1등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2등을 했었을 거야, 아마.”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자신도 있었기에 더 실망스러웠던 날이었다. 맥이 쭉 빠진 채로 집에 돌아오다가 집 앞에서 유현을 만났고, 그에게 충동적으로 오토바이를 태워달라고 했던 것이었다.
“2등 한 게 그렇게 허탈하고 허무했어요?”
“그때는 1등 아니면 큰일 나는 줄 알았거든.”
“지금은 어때요?”
“그 정도는 아니야. 그래도 실패는 늘 두려워.”
“…….”
유현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물을 생각도 없었고, 실패해도 괜찮다고 어설픈 위로를 건넬 생각도 없었다. 그건 제 몫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실패해 본 적 없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남들이 다 나를 비웃을 것 같아서.”
하경은 다른 사람에게 제 속내를 잘 털어놓지 않았다. 가장 친한 친구인 세희에게조차도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누가 들어도 재수 없다고 할 게 분명한 경우에는 더더욱. 그런데 유현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저도 모르게 솔직해지곤 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는 푸근하고 온화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깐깐하고 예민해 보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하경은 그가 편했다. 스스로도 마음에 들지 않는 성격까지도 이해해 줄 것만 같은 기분.
“잘난 척하더니 꼴좋다, 그럴까 봐.”
유현은 어깨를 으쓱하는 그녀를 보며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잘난 척하고 다녔어요?”
“내가 잘난 척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
주하경은 굳이 잘난 척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잘난 여자였다. 자기만족을 중시하는 성격이지, 과시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잘난 척한다는 오해를 받는 건 그녀의 사근사근하지 않은 성격 탓이기도 했다.
“난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누나는, 그냥 잘났어요.”
“나도 알아.”
피식 웃은 하경이 말을 돌렸다.
“근데 그날 내가 어땠는지를 어떻게 아직도 기억해?”
“그러게요. 왜 아직도 기억하지?”
유현은 조금 전 그녀가 했던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렸다. 기억하려고 애쓴 게 아니라 저절로 기억에 남아 있던 것이었기에 그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하경에게 집중하느라 손에 들고 있던 얼음팩을 잠시 잊고 있었던 그는 수건에 배어 나온 냉기를 확인하고 그녀의 발로 눈길을 돌렸다. 그 순간, 하경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전에 휘감겼다.
“나도 너한테 궁금한 게 있어.”
유현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향했다. 왠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묻지 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궁금한 게 뭐예요?”
“나랑 결혼하겠다는 진짜 이유.”
“…….”
유현은 하경의 차분한 눈빛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시작은 분명 형 때문이었다. 그동안은 형이 아닌 자신과 결혼하는 게 그녀에게도 나은 선택이라고만 생각했을 뿐, 그녀를 위해 밀어붙였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이유가 추가되었다. 주하경이라는 여자의 삶에 오점이 남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진심으로 그녀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란다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모든 것을 말해 버리면 그녀와 제 관계도 이대로 끝일 것만 같아서.
“나 먼저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잠시 망설이던 하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유현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물었다.
“여전히 내가 조금도 남자로 안 보여요?”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검은 눈동자가 하경을 옭아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