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끝까지,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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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끝까지2020.05.07.
민건이 굳은 표정으로 어딘가를 뚫어지게 바라보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하경도 그의 시선을 좇아 눈길을 돌렸다. 유현의 얼굴을 보고 당황한 그녀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러나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다.
‘타이밍 한번 참…….’
지난번 호텔 라운지에서 셋이 함께 있었을 때는 유현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듣기 전이었기에 껄끄러워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결혼하기로 한 남자와 결혼하자고 하는 남자를 한자리에서 보는 건 꽤나 난감하고 불편한 일이었다. 그 두 남자가 친형제이기에 더더욱. 차 안에 흐르는 정적을 깨뜨린 건 민건이었다. 말없이 유현을 보고 있던 그는 운전석 문을 벌컥 열고 차에서 내렸다. 유현이 왜 여기 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손유현.”
무뚝뚝한 목소리가 지하 주차장에 울려 퍼진 것과 동시에 유현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민건은 등을 보이고 있는 유현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유현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자신이 여기에 있는 이유를 솔직하게 말해야 할지, 아니면 다른 이유를 대야 할지 고민하면서. 형에게 선전 포고까지 한 마당에 거리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건 제 사정이고, 하경의 입장도 생각해야만 했다. 다른 곳에서 마주쳤다면 몰라도 여긴 그녀가 사는 아파트였다. 이유를 불문하고, 결혼을 약속한 남자에게 다른 남자가 집에 드나드는 모습을 보이고 싶은 여자는 아무도 없을 거였다. 유현은 자신으로 인해 그녀가 곤란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왜 여기 있냐고 묻잖아.”
민건이 다그치듯 목소리를 높이자, 유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형수가 될 여자에게 청혼한 자신을 세상 모두가 비난한다고 해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임신한 애인의 존재를 숨기고 결혼을 추진 중인 형만큼은 예외였다.
“목소리 낮춰. 귀 안 먹었어.”
“뭐? 이…….”
민건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끈 솟아오른 순간, 청아한 목소리가 두 남자 사이를 갈랐다.
“우리 집에 온 거예요.”
민건과 유현이 동시에 하경의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또각또각, 정갈한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온 그녀가 두 사람 곁에서 걸음을 멈췄다. 잔뜩 얼굴을 구긴 민건이 입을 열었다.
“너희 집에는 무슨 일로?”
그는 유현이 이곳에 있는 이유가 하경과 무관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막상 확인을 받고 나니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두고 간 게 있어서 가져가라고 했어요.”
하경의 말에 내포된 두 가지 의미를 대번에 알아차린 민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두고 갔다는 건 이미 집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는 뜻일 테고, 가져가라고 했다는 건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가도 좋다는 허락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터. 유현이 단순히 하경을 만나러 온 것보다 더 찜찜한 상황이었다. 두 사람이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는지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하경이한테 어디까지 얘기한 거지?’
유현이 이미 하경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꺼낸 건지, 아직 분위기를 살피며 그녀 주위를 맴돌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느낌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민건은 자신과 해림의 사이를 말하지 않겠다고 했던 유현을 믿었다. 할 수만 있다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 파묻어 버리고 싶을 만큼 눈엣가시이긴 해도, 유현이 제 입으로 한 말은 지키는 놈임을 아는 까닭이었다. 아이러니한 건, 그 말은 철석같이 믿으면서도 정작 다른 말은 믿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제 결혼을 깨려고 들지는 않을 거라고 희망 회로를 돌리면서 최악의 상황은 외면하고 회피했다. 그러나 이제 더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오빠. 그만 가세요.”
민건을 떠난 하경의 시선이 유현에게 향했다.
“넌 따라오고.”
두 남자의 처지가 극명하게 엇갈린 순간이었다. 하경이 먼저 걸음을 뗐고, 유현이 그 뒤를 따랐다. 등 뒤에서 민건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손가락을 뻗어 버튼을 누르는 그녀의 귀로 유현의 나직한 음성이 스며들었다.
“미안해요, 곤란하게 해서.”
하경은 엘리베이터 문을 마주 보고 똑바로 서서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그를 돌아보지 않고 입술을 열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내가 와서 가져가라고 한 거니까.”
이제 그가 자신을 따라다닌다거나 기다린다고 착각하지 않았다. 어딘가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가 한발 먼저 튀어나오지 않고서야 불가능했던 상황이었으니까. 유현에 대해 완벽히 안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그가 그렇게까지 음흉하고 음침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모르지 않았다. 이제 그와 개인적인 일로는 따로 만나지 않으려던 다짐이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아서 깨져버렸지만,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일부러 시간 맞춰서 온 거라고 누나가 오해할까 봐요.”
공인중개사 사무소에 들렀다가 오느라 시간이 지체되었을 뿐, 이런 식의 만남을 노린 건 아니었다.
“몇 시에 올지 나도 몰랐는데 네가 어떻게 알고 시간을 맞춰. 민건 오빠랑 같이 오게 될 줄도 몰랐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하경과 유현은 차례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하경은 닫힘 버튼과 10층 버튼을 연달아 누른 다음, 제 옆에 선 유현을 흘긋 돌아보았다.
“네가 나한테 결혼하자고 한 거 민건 오빠도 알아?”
“내가 누나랑 결혼하겠다는 말은 했어요. 이미 프러포즈를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곧 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하경은 그제야 조금 전 민건의 히스테릭한 반응이 이해가 갔다. 뭔지는 몰라도, 형제 사이에 갈등이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생각해 왔던 그녀로서는 다시 한번 제 짐작을 확인받은 셈이었다. 돌연 그녀의 입술 사이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런 말을 들었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뚝 뗀 거야?’
민건의 천연덕스러운 연기가 가증스럽게 느껴진 것도 잠시, 하경은 그와 자신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건이 시치미를 뗐듯, 유현에게 청혼을 받은 자신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모른 체했으니 도긴개긴이나 다름없었다. 제 뻔뻔스러움을 반성한 그녀가 유현에게 다시 물었다.
“설마 부모님한테까지 말씀드린 건 아니지?”
“형한테밖에 말 안 했어요, 아직은.”
“아직은?”
하경은 찌푸린 미간으로 경고를 대신하고 10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뒤이어 내린 유현이 그녀를 따라 걸으며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요?”
“그게 왜 궁금해?”
“생각보다 너무 빨리 와서요.”
호텔에서 레스토랑까지 그리고 레스토랑에서 아파트까지 이동한 시간을 빼면 레스토랑에 앉아 있었던 시간은 30분 남짓에 불과했다. 다 합쳐도 1시간이 조금 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경은 유현의 말을 수긍할 생각이 없었다.
“빨리 오든 늦게 오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퉁명스럽게 받아치고 현관 앞에서 걸음을 멈춘 순간, 등 뒤에서 유현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관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프러포즈한 여자가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갔는데 늦게 오면 걱정되는 게 당연하잖아요.”
하경은 유현이 정신을 차렸는 줄 알았다. 전화 목소리가 너무나 무심해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프러포즈한 여자’라는 말을 들으니, 그가 아직 자신과의 결혼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기분이 묘해졌다.
“문 안 열어요?”
키패드에 손을 뻗은 채로 멀뚱히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린 그녀가 얼른 비밀번호를 눌렀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도어록이 해제되었다. 하경이 손잡이를 당겨 문을 열자, 유현이 뒤에서 문을 잡아 주었다. 집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나흘째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캐리어를 현관 쪽으로 슬쩍 밀었다.
“가져가.”
“맡아줘서 고마워요. 늦게 찾아가서 미안하고.”
그는 한 발짝도 집 안에 발을 디디지 않았다.
“갈게요. 문단속 잘하고 자요.”
“어디로 가?”
오늘은 어디에서 자냐는 뜻이었다. 하경은 그가 오늘도 아는 동생이 입원한 병원에서 자는지 궁금했다.
“호텔로 가요. 여기 오기 직전에 오피스텔 계약했는데 입주는 모레 가능하대요. 그래서 오늘하고 내일은 호텔에 있을 거예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할 새도 없이, 유현이 말을 이었다.
“혼자 살 집을 구하긴 했지만 누나랑 결혼하겠다는 마음, 접은 거 아니에요.”
“…….”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해요. 바로 달려올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하경은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돌아섰다. 유현과의 통화 이후 간신히 다잡은 마음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 하경의 아파트 지하 주차장. 민건은 가지 않고 차 안에 앉아서 유현을 기다렸다. 그가 나오는 걸 확인하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었다.
“설마 자고 가는 건 아니겠지…….”
유현과 하경이 벌써 그렇게까지 깊은 사이로 발전한 거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조건 맞춰서 하는 결혼이라고 해도, 아무리 주원 호텔이 탐나도, 동생의 여자를 아내로 맞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물론 피하고 싶다는 것이지,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만약 두 사람이 그런 사이라고 해도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이미 주위 사람들에게 하경과의 결혼을 떠벌려 놓은 이상, 이제 와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하경이 유현과 결혼하는 꼴은 더더욱 볼 수 없었다.
“손유현, 내 이 자식을…….”
민건이 주먹 쥔 손으로 핸들을 세게 내리쳤다. 그의 표정에는 분노와 불안 그리고 초조가 뒤섞여 있었다. 격한 감정을 추스르고 숨을 몰아쉰 그가 운전석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댄 순간, 기다리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유현이 예상보다 빨리 나왔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전에, 캐리어가 보였다. 민건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차에서 내렸다.
“손유현.”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선 유현이 민건을 무미건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 그동안 하경이 집에서 지냈냐?”
“아니.”
“그럼 그 캐리어는 뭔데?”
“사정이 있어서 캐리어만 잠깐 맡겨둔 거야.”
“사정이 뭔데?”
“알고 싶어?”
유현이 픽 웃음을 터트리자, 민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말하라고, 이 새끼야!”
유현은 형이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지, 변해버린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적어도 그가 아는 손민건은 차분하고 신사적인 사람이었다.
“토요일에 해림이 전화를 받았어. 하혈을 해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좀 와주면 안 되겠냐고 울더라고. 호텔은 이미 체크아웃을 했고, 캐리어를 가지고 가기가 번거로워서 하경 누나한테 좀 맡아달라고 한 것뿐이야. 이제 됐어?”
“…….”
민건의 꾹 닫힌 입은 열릴 줄을 몰랐다. 지난 금요일 밤, 그는 또다시 해림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그녀는 아이를 지우지 않겠다고 버텼다. 욱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따귀를 한 대 올려붙인 뒤, 펑펑 우는 해림을 뒤로하고 그녀의 집을 나왔다. 그 이후로 연락을 한 적이 없어서 해림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알게 된 것이었다.
“형한테 맞은 충격이 컸던 모양이야. 유산기가 있었는데…….”
말끝을 늘이던 유현이 갑자기 빙긋 웃었다.
“다행히 괜찮아졌대. 안심해.”
“…….”
민건은 걱정은커녕 잠시나마 기대에 부풀었었다. 이렇게 될 거라는 예상을 하고 벌인 짓은 아니었지만, 이번 기회에 아이가 떨어져 주기만 한다면 숨통이 트일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괜찮아졌다는 말을 들으니 맥이 쭉 빠졌다.
“설마 실망한 건 아니지?”
유현은 방금 전 형의 눈에 비친 기대감을 똑똑히 보았다. 형이 점점 더 혐오스러워졌다. 대체 어디까지 바닥을 봐야 하는 건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런데 민건은 한술 더 떠서 부인하는 성의조차 보이지 않고 화제를 바꿔 버렸다.
“하나만 물어보자.”
“…….”
유현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표정은 담담했으나, 민건은 유현의 살벌한 기세에 기가 눌렸다. 네 살이나 어린 동생에게 주눅이 드는 것만큼 자존심 상하는 일은 없었다. 열등감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그는 천천히 주먹을 말아쥐고 입을 열었다.
“너, 하경이한테 결혼하자고 했냐?”
“했으면 어쩔 거고, 안 했으면 어쩔 건데.”
유현은 조금 전 엘리베이터 안에서 하경이 실소를 터트린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면 형도 비슷한 반응을 보일 거라 확신하기에, 그녀를 위해 모호하게 대답하는 쪽을 선택한 것이었다.
“손유현, 너 대체 어디까지 갈 셈이야.”
“끝까지.”
“…….”
“아마 그 끝은 결혼이 되겠지. 손유현과 주하경의.”
친절하게 설명까지 덧붙인 그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민건의 옆을 유유히 지나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