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자고 가,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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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유현이 잘 좀 부탁해, 누나.]
하경이 무슨 말을 할 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쉰 그녀는 휴대 전화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이 개념 없는 놈을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한 심정이었다. 아무리 친구를 믿는다고 해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누나 혼자 사는 집에 내버려 두고 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하룻밤 재워주라는 게 상식적인 일인지 묻고 싶었다. 물론 어떤 대답이 나올지 모르지 않았다. ‘그게 왜? 무슨 문제 있어?’ 이런 식의 반응일 게 뻔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동생의 친구는 사리 분별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이 일에서만큼은.
“그만 갈게요.”
하경은 마지막 잔을 비우고 일어서는 유현을 올려다보았다.
“……가려고?”
제 얼굴에 순간적으로 불안감이 떠올랐다가 사라진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 찰나의 감정을 유현에게 들켰다는 사실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어디로 가게?”
“다시 호텔로 가야죠, 뭐.”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문을 뗐다.
“자고 가.”
“한결이 말, 신경 안 써도 돼요.”
“자고 가라고.”
전적으로 유현을 위한 제안만은 아니었다. 그가 가겠다고 일어서니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잠시 잊고 있던 두려움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쭉 혼자였다면 모를까 누군가와 함께 있다가 혼자가 되면 더 썰렁하고 허전할 것 같았다. 한결의 안이한 부탁이 어이가 없었던 것과는 별개로, 하경도 유현을 믿었다. 그가 있어 준다면 안심하고 잘 수 있을 듯했다.
“누나가 자꾸 그러면 뻔뻔하게 알겠다고 하고 싶어지는데.”
“언제는 안 뻔뻔했던 것처럼?”
유현이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루만 신세 좀 질게요.”
그가 하경의 제안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인 건 어떤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로지 그녀를 위해서였다. 남의 집에서 자는 건 그에게도 그리 편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선뜻 가버릴 수가 없었던 건 택시 안에서 한결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였다. 도둑이 들었던 날, 연락을 받고 달려와 보니 누나가 창백한 얼굴로 덜덜 떨고 있었다면서 그렇게 겁먹은 모습은 난생처음 봤다던 한결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제 존재가 그녀에게 불편을 줄지언정 혼자 있는 것보다는 덜 불안하게 해 줄 거라는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다.
“손님방에서 자.”
“소파면 충분해요.”
“어차피 남는 방 있는데 굳이 왜. 따라와.”
유현이 더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고 몸을 돌린 하경은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현관 맞은편에 있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야.”
가구라고는 침대와 2인용 티 테이블이 전부였다. 자칫하면 휑해 보일 수 있는 공간을 크림색 커튼과 침구로 채운 덕분에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침대 시트랑 베개, 이불, 아무도 쓴 적 없는 거니까 찝찝해하지 않아도 돼.”
유현은 그 말의 의미를 대번에 알아차렸다.
“혹시 내가 이 방에서 자고 가는 첫 손님인가?”
“맞아.”
이 집에 드나드는 사람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중에 자고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남는 방에 손님방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았을 뿐, 엄밀히 따지면 손님을 위해 마련해둔 방은 아니었다. 그저 구색을 갖춰놓은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 방을 누군가에게 내주게 될 줄 몰랐을뿐더러 그 누군가가 유현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차피 아무도 안 쓰는 방, 세놓을 생각 없어요?”
“…….”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예감한 하경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나한테.”
예감 적중.
“욕실 편하게 써.”
하경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태연하게 제 말만 하고 뒤돌아섰다.
“마음 편히 푹 자요. 아무 걱정하지 말고.”
등 뒤에서 아늑한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잠시 멈칫했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 방을 나왔다. 그에게 손님방을 세놓으면 든든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커튼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한 줄기 햇살이 곤히 잠든 하경을 깨웠다. 그녀는 눈도 뜨지 못하고 한참 동안 이불 속에서 꿈틀거리다가 협탁 위에 놓인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오전 10시 12분. 깜짝 놀란 하경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나 금세 원래 크기로 돌아왔다.
“아, 오늘 토요일이지…….”
거의 두 달 가까이 주말에도 출근해야 할 만큼 바빴지만, 오늘과 내일만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어볼 참이었다. 하경은 푹신한 침대에 편하게 누워 오랜만의 여유를 만끽했다.
“아, 좋다…….”
익숙한 촉감, 익숙한 냄새가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호텔 스위트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찜찜했다. 뭔가를 기억해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뭐지?”
천장을 보면서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던 그녀의 입에서 별안간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지난 새벽의 일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하경은 벌떡 일어나 앉아서 기억을 더듬었다. 유현을 손님방까지 안내해주고 침실로 돌아와 곧바로 침대에 누운 것까지 생각났다. 그의 존재가 위안이 됐는지 눕자마자 곧장 잠든 모양이었다. 한 번도 깨지 않고 이렇게 오래 자 본 게 몇 년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침대를 내려온 하경은 바쁜 걸음으로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흠칫 놀랐다. 소파에 앉아 있던 유현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그가 허리를 세우며 빙긋 웃었다.
“일어났어요?”
아침부터 이렇게 잘생길 일인가. 하경은 엉뚱한 생각을 고이 접고 반문했다.
“언제 일어났어?”
“2시간 전쯤?”
“나 일어날 때까지 안 기다렸어도 됐는데.”
그냥 가지 그랬냐는 의미였다. 남의 집에서 할 일도 없이 2시간이나 버티는 게 얼마나 지루했을지 짐작이 가기에 한 말이었다.
“간밤의 사건, 사고 확인하고 있었어요.”
유현은 왼손에 쥐고 있던 휴대 전화를 들어 올려 살짝 흔들어 보이면서 한마디 보탰다.
“출근할 거면 같이 나가요.”
“오늘 출근 안 해. 집에서 쉴 거야.”
“아, 그래요?”
“괜히 기다렸네.”
“괜찮아요. 백수라 할 일도 없는데, 뭐.”
하경은 문득 궁금해졌다. 한창 바쁘게 살았을 때의 그는 어땠을지. 그때도 지금처럼 여유로웠을까. 자신이 모르는 그의 과거까지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커피 마실래?”
“주신다면 기꺼이.”
하경이 먼저 부엌으로 향했고, 유현도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따랐다. 그는 식탁 의자를 빼고 앉아서 커피 머신 앞에 서 있는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잠은 잘 잤어요?”
“잘 잤어.”
네 덕분에. 하경은 뒷말을 속으로 삼키고 묵묵히 커피를 내렸다. 유현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제까지와는 달리, 정적이 흘러도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조금 더 가까워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심신을 편안하게 해 주는 향긋한 커피 향 때문인지. 커피 두 잔을 가지고 식탁으로 걸어간 그녀는 유현에게 커피 한 잔을 건네주었다.
“마셔.”
유현은 제 맞은편 의자로 가서 앉는 하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그잔을 두 손으로 꼭 쥐고서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어 홀짝이는 그녀의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반만 뜬 눈, 멍한 표정을 보고 있으려니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세수도 하지 않은 주하경을 보게 될 줄이야. 그녀의 흐트러진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는 아예 턱을 괴고 하경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커피가 식어간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경은 커피를 마시는 데 집중하느라 유현의 시선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뭘 그렇게 봐?”
“주하경.”
그의 대답은 솔직하고 노골적이었다. 그녀를 당황스럽게 할 만큼. 하경은 유현의 입을 통해 제 이름을 듣는 게 왠지 모르게 민망했다.
“……어디서 누나 이름을 막 불러.”
말로만 꾸짖는 척해본들, 붉어진 얼굴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가 알아서 화제를 전환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나 뭐 시킬 거 없어요? 재워준 보답, 하고 싶은데.”
하경은 슬며시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없어.”
유현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천장을 살폈다.
“갈아야 할 전등 같은 거 있으면 말해요. 갈아주고 갈게.”
“다 멀쩡해. 얼마 전에 욕실 전등이 나갔었는데 승조 선배가 와서 갈아주고 갔어.”
또 나왔다, 거슬리는 이름. 유현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가 펴졌다.
“못 박을 데는 없나?”
“엊그제 이사 온 것도 아닌데 못은 무슨.”
“무거운 거 옮길 건요?”
“전혀 없는데?”
그녀에게 도움이 될 만한 뭔가를 해 주고 싶은데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갑자기 쓸모없는 인간이 돼 버린 기분이었다.
“소주라도 사다주고 가야 하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를 보면서 하경이 실소를 터트렸다.
“보답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커피나 마시고 가.”
유현은 그 말을 듣고서야 커피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가 머그잔으로 손을 뻗으려던 그때, 바지 주머니 속의 휴대 전화가 진동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하경에게 양해를 구하고 휴대 전화를 꺼내어 발신자를 확인한 유현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어, 그래.”
누구 전화길래 안색이 안 좋아졌지? 하경은 커피를 마시는 척하면서 유현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울지 말고 차분하게 말해.”
숨까지 참아가며 귀를 쫑긋 세운 하경의 귀로 흐느끼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에게 울면서 전화를 건 걸 보면 꽤 가까운 사이인 듯했다.
“알았어. 지금 갈게.”
하경은 유현이 전화를 끊을 때까지 고고하게 커피만 마셨다. 커피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만큼 그의 통화에 몰입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누나.”
하경이 천천히 눈을 들어 유현을 바라보았다.
“캐리어 좀 맡아줄 수 있어요? 급하게 갈 데가 있는데 가지고 가기가 번거로워서.”
어딜 가는데? 그녀는 입안을 맴도는 질문을 결국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고 가.”
“이따 와서 가져갈게요.”
“그래.”
유현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렸다. 하경의 시선이 그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커피로 향했다. 처음 그대로 조금도 줄지 않은 커피가 식어가고 있었다. 어차피 커피를 다 마시면 보낼 생각이긴 했지만, 갑자기 휙 가버리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누구 때문이건 간에 그와 커피를 함께 마실 팔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벌써 두 번째, 마주 앉기는 했으되 그는 커피 맛을 보지도 못했으니까. 씁쓸한 얼굴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유현에게 건넸던 머그잔을 집어 들고 개수대로 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배수구에 커피를 쏟아버렸다. 미적지근한 건 뭐든 질색이었다. *** 유현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따’ 오겠다더니 밤 11시가 넘도록 아무 소식도 없었다. 차라리 기약 없이 갔다면 기다리지도 않았을 텐데 오늘 중으로 올 것처럼 말해 놓고 오지 않으니 더 신경이 쓰였다. 소파에 기대앉아서 책을 보던 하경이 벽시계로 흘긋 눈을 돌렸다.
“못 오면 못 온다, 연락은 해줘야 할 거 아냐.”
유현이 늦게라도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붙잡고 있은 지 벌써 2시간째였다.
“아, 내 번호 모르지…….”
치켜 올라갔던 눈초리가 스르르 아래로 처졌다. 그가 번호를 알려달라고 할 때 그냥 알려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번호를 안다고 전화를 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사실 이렇게까지 유현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신경 쓰지 않고 있다가 그가 오면 캐리어만 넘겨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1분도 채 걸리지 않을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만 시계로 눈이 갔다. 한결에게 전화를 걸어 볼까 하다가 관둔 건 유현이 지금 어디에서 누구와 뭘 하고 있는지 아느냐고 물어볼 수는 없어서였다.
“잠이나 자자.”
들고 있던 책을 덮어버린 하경은 소파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심기가 불편한 와중에도 유현에게 고마운 건 오늘은 혼자 있어도 별로 무섭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가 함께 있어 준 덕분이었다. 내일은 오려나? 그녀는 그 후로도 한참을 유현을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 월요일 아침. 유현은 결국 오지 않았고, 하경은 현관에 놓인 캐리어를 노려보고서 집을 나섰다. 그에게 잠시나마 가졌던 호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제 손유현은 동생의 친구, 예비 시동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호텔 주차장에 도착한 그녀는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몇 미터 앞에서 블랙 SUV 한 대가 멈춰 서는 게 보였다. 처음 보는 차였지만, 차에서 내린 사람은 아는 얼굴이었다. 하경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와 제 앞에 선 유현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누나.”
이런 순간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는 슈트가 참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