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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해요-8화 (8/79)

8화. 유현에게 하경을, 하경에게 유현을,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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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유현에게 하경을, 하경에게 유현을2020.04.26.

하경은 난데없이 찾아와 술 한잔 달라고 밀고 들어온 것으로도 모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라져버린 동생 놈을 이해할 길이 없었다. 보통 이런 경우, 본인이 데려온 친구는 데려가는 게 정상 아닌가. 기가 막혀서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누나 잘 부탁한대요.”

“…….”

게다가 쓸데없는 오지랖까지……. 한결의 해맑은 얼굴을 떠올리니 화가 나는 게 아니라 한숨이 났다.

“오래 안 걸린다고 했어요. 한결이 돌아올 때까지 내가 술친구 해 줄게요.”

테이블 위 어딘가를 맴돌던 하경의 시선이 유현에게 향했다.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오늘따라 유독 그의 미소가 근사해 보였다. 몽롱한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눈에 힘을 줘 보았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유현에게 오해를 불러일으켰을 뿐.

“경계의 눈빛인 건가? 술 잔뜩 먹여놓고 어떻게 해 볼까 궁리하는 놈으로 보는 건 아니죠?”

그가 억울하다는 듯 콧등을 살짝 찡그렸다.

“글쎄, 네 속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유현은 어깨를 으쓱거리는 그녀를 보면서 픽 웃음을 터트렸다.

“나 한결이랑 오래 볼 거예요. 한결이 누나한테 그런 마음 품을 정도로 쓰레기는 아닌데 섭섭하네.”

괜히 한번 해 본 말이었을 뿐, 하경은 그런 쪽으로 유현을 의심하거나 경계하지 않았다. 미친놈이라고는 생각해도 나쁜 놈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누나가 덮치는 건 이해해 줄게요.”

역시 미친놈이었다.

“야, 손유현.”

하경이 발끈하자, 유현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는 원래 농담을 좋아하거나 다른 사람을 놀리는 걸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만 보면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도도한 표정과 냉랭한 눈빛이 트레이드마크 같은 여자에게서 의외의 면모를 발견한다는 게 즐거운 건지도 몰랐다. 당황하면 목부터 빨개진다는 사실을 본인은 아는지 궁금했다. 이제 주원 호텔 이사인 주하경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졌다.

“호텔 얘기 듣고 싶어요.”

하경은 갑자기 말을 돌리는 유현을 샐쭉 노려보고서 불퉁하게 물었다.

“어떤 얘기?”

“누나의 꿈, 목표, 계획, 뭐든지 다요.”

“뜬금없이…….”

구시렁거리면서도, 그녀는 그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해주었다. 유현은 생기가 감도는 얼굴로 말하는 하경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일해 왔는지, 호텔에 얼마나 큰 애정과 열의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올해는 해외 진출에 주력할 생각이야. 베트남에 개관할 호텔이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하기 위한 첫걸음이 될 테고.”

하경은 말을 마치고서야 너무 수다스러웠던 건 아닌지 신경이 쓰였다. 그와의 대화가, 그와의 술자리가 편해서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말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현이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날이었다.

“개관식은 언제예요?”

“다음 달 초. 조만간 직접 가서 최종 확인하고 와야 해.”

“나도 같이 가요?”

하경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네가 왜?”

“나 이제 기획팀 직원이잖아요. 출장 갈 때 안 데려가나?”

“어, 안 데려가.”

다른 기획팀 직원들도 데려가지 않는 마당에 갓 들어온 신입을 데려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 혼자 가요?”

“아니, 임승조 팀장이랑.”

돌연, 유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한결이가 임 팀장님을 왜 질투하는지 알겠네. 왜 나도 질투가 나려고 하지?”

하경의 입술 사이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그녀는 당연히 장난이라고 치부해버리고 말았지만, 유현은 장난을 친 게 아니었다. 질투인지 뭔지 정확히 정의 내리기는 힘들었다. 다만, 썩 좋은 기분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임승조라는 존재가 묘하게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경은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내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뭐가 궁금한데요?”

“넌 정말 내가 민건 오빠가 아니라 널 선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정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그냥 입으로만 떠벌리는 건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날 선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날 선택할 거라고 확신하는 건데.”

“…….”

유현의 말이 너무나 단호해서 하경은 받아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의 말문이 막힌 사이, 이번에는 유현이 물었다.

“우리, 결혼하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아니.”

하경은 일부러 딱 잘라 말했다. 결코 뜨뜻미지근하게 대답하면 안 되는 질문이었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잘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없었다.

“난 누나랑 내가 꽤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취향이나 생활 패턴도 비슷하고, 말도 잘 통하고.”

“우리가 말이 잘 통한다고? 설마.”

유현은 과장된 코웃음에 미소로 화답했다. 하경은 갑자기 그의 여유로운 모습에 심기가 불편해졌다. 정작 폭탄을 투하한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애꿎은 피해자인 자신만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괜스레 언짢았다.

“한결이가 알게 되면 뭐라고 할 것 같아?”

한결의 이름을 들먹이면 조금은 주춤할 줄 알았건만, 유현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난리 나겠죠. 어디 감히 우리 누나한테 수작 부리냐고.”

독종이니 뭐니 구시렁거리면서도 한결이 누나를 얼마나 좋아하고 의지하는지 그만큼 잘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알면서 이러는 거야?”

“근데 결국은 받아들일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가 한결이를 잘 아는 만큼 한결이도 나를 잘 아니까요.”

“한결이가 뭘 아는데?”

“내가 내 의지로 누군가를 선택한다면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할 거라는 거.”

“…….”

하경은 유현의 고요한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불안해하거나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언제라도 공론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너무나 태연했다. 매혹적인 검은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가까스로 시선을 돌린 그녀가 황급히 술잔을 비웠다. 그 순간, 나긋한 음성이 귀에 착 휘감겼다.

“천천히 마셔요.”

술이 아니라 그에게 취했는지도 모르겠다, 하경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털어내며 화제를 바꿨다.

“집 알아본다고?”

유현이 아직 독립하지 않았다는 건 오늘 한결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갑자기 독립하려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마음은 없었다. 막연히 그의 형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유현의 청혼 역시도 민건과 무관하지 않을 테고. 열등감은 아니라고 해도 형제간에 뭔가 있는 건 분명했다. 그게 뭘까? 저도 모르게 딴생각에 빠져 있던 하경은 유현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누나가 내 프러포즈 받아주면 집 알아보는 건 일단 보류.”

“왜?”

“혼자 살 집이 아니라 누나랑 같이 살 집이 필요하니까요.”

애써 화제를 바꾼 보람도 없이 도로 아미타불이 되어버렸다.

“보류할 필요 없겠네. 그냥 진행해.”

하경은 다시 한번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검사는 왜 그만뒀어?”

유현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는 제 빈 잔에 소주를 가득 따라 단번에 비운 다음,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상명하복 지긋지긋해서요.”

하경은 조용히 제 술잔과 그의 술잔을 차례로 채웠다. 왠지 그에게 술이 더 필요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내 소신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기소냐 불기소냐, 구속영장을 치느냐 마느냐, 다 위에 계신 분들 마음이었으니까.”

그들만의 카르텔은 아주 견고했다. 정계와는 공천권으로, 재계와는 돈으로, 은밀한 거래가 무수히 오갔다. 정치권에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손 의원의 아들에게는 탄탄대로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유현은 그들과 한배를 타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다. 미련하게도, 바뀌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착각이라는 걸 깨닫고 사직서를 던졌다. 불가능한 일에 제 삶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그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현실에 순응하고 살았다면 초고속 승진 확정이었을 텐데, 후회 안 해?”

그가 몸담았던 조직이 어떤 곳인지, 하경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선택이 이해가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다.

“안 해요. 나한테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했으니까.”

“…….”

유현의 망설임 없는 대답이 그녀로 하여금 제 삶을 돌아보게 했다. 자신은 과연 속도와 방향 중 어느 쪽을 우선시하면서 살아왔는지.

“잘못된 길을 너무 열심히 가면 다시 돌아오는 길이 너무 멀잖아요.”

누군가는 죽을 때까지 그 길이 잘못된 길이라는 걸 모를 수도 있고, 누군가는 잘못된 길인 줄 알게 되더라도 다시 돌아올 엄두를 내지 못할 수도 있을 텐데 그는 다시 돌아올 거라 말하고 있었다. 하경은 손유현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한결이 그를 왜 좋아하는지도. 이번에는 유현이 나서서 말을 돌렸다.

“다른 여자들도 집에 있을 때 누나 같은가?”

“나 같은 게 뭔데?”

하경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화장을 지워도 예뻐요.”

유현은 화장기 하나 없는 민낯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풀 메이크업을 하고 있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고, 속눈썹은 길고 풍성했으며, 입술은 복숭앗빛을 띠고 있었다. 회사에서의 주하경이 세련되고 감각적이라면, 집에 있을 때의 주하경은 청순하고 산뜻했다. 입고 있는 하얀색 오버사이즈 니트 덕분인지 유난히 편안해 보였다.

“……까분다.”

당황한 하경이 그의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붉혔다. 유현의 표정과 말투 어디에서도 불순한 느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평온하고 담백했다. 립서비스 같지도 않았다. 예쁘다는 말을 처음 들어본 것도 아니고, 그런 말에 설렐 성격도 아닌데 왜 이리도 민망한 건지……. 그를 똑바로 보지 못하는 건 복잡하고 이상한 감정을 들킬 것 같은 기분 때문이었다. 어색한 공기가 두 사람을 감싸고 돌던 그때, 휴대 전화 벨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하경은 식탁 위에 놓인 휴대 전화를 얼른 내려다보았다. 화면에 ‘한결’이라는 두 글자가 떠 있었다. 도움 안 되는 놈이라고 욕했던 것을 사과하고 싶을 만큼 반가운 전화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새침하게 전화를 받았다.

“주한결, 왜 안 와. 유현이 기다리잖아.”

하경은 ‘난 기다린 적 없는데?’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는 유현을 못 본 체했다.

[늦어도 1시간 안에는 갈게.]

그녀의 눈이 벽시계로 향했다.

“1시간? 지금 11시거든?”

[되도록 빨리 갈 테니까 유현이랑 놀고 있어.]

“…….”

하경은 대체 뭘 하고 놀아야 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한결은 그 말만 하고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휴대 전화를 도로 식탁 위에 내려놓는 그녀에게 유현이 물었다.

“1시간 후에 온대요?”

“늦어도 1시간 안에 온대.”

하경은 한결이 올 때까지 유현에게 기획팀 업무에 관해서 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사적인 이야기를 덜 하려면 별수 없었다. 유현이 협조해준 덕분에 다행히 딴 길로 새지 않고 1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한결은 자정이 넘도록 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신호만 갈 뿐 받지 않았다.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건 새벽 1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이번에는 하경이 아닌 유현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유현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전화를 받았다.

“뭐 하는데 전화 안 받아. 왜 아직도 안 오는데?”

[미안하다. 나 못 가겠다.]

“무슨 일 있어?”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나 먼저 너희 집 가 있을게. 비번 알려줘.”

[나 지금 집이야. 여친이랑 같이 있어.]

그는 더 물을 필요도 없이 무슨 상황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알았다.”

[누나 좀 바꿔줘 봐.]

유현은 제 휴대 전화를 하경에게 내밀었다.

“바꿔 달래요.”

휴대 전화를 넘겨받아 귀에 가져다 댄 하경이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왜 안 오고 전화야.”

[누나, 유현이 오늘 하루만 거기서 재워주면 안 돼?]

“뭐?”

당황한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 시간에 호텔로 가라고 할 수는 없잖아.]

이 시간까지 안 오고 있는 놈이 할 말은 아니었다.

“너희 집에 가 있겠다잖아.”

[안 돼.]

“왜 안 되는데?”

[여친이 많이 취해서 우리 집으로 데려왔단 말이야.]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챈 하경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우리 유현이 잘 좀 부탁해, 누나.]

한결은 조금 전에는 유현에게 하경을 부탁하더니 이번에는 하경에게 유현을 부탁했다. 하나뿐인 누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묘한 감정을 쌓아가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아주 해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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