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나랑 취향이 같네요,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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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나랑 취향이 같네요2020.04.23.
당황한 것도 잠시, 하경은 미간을 찌푸리고 인터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제 속도 모르고 마냥 해맑게 웃고 있는 한결을 보고 있노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집에 없는 척할까?’
잠시 떠올랐던 생각은 금세 사라졌다. 자신이 호텔에서 지내는 줄 뻔히 아는 한결이 연락도 없이 여기까지 왔다는 건 이미 제 동선을 파악했다는 뜻일 터. 누구에게 들었는지 짐작이 갔다. 만약 집에 없는 것처럼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전화를 걸어올 테고, 전화도 받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생긴 거라고 호들갑을 떨어댈 게 분명했다. 손유현과 달리 주한결은 쉽게 예측 가능한 타입이었다. 그렇다고 전화를 받아서 다른 곳인 척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용건을 확인하고 빨리 보내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한 하경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락도 없이 어떻게 왔어.”
[어떻게 오긴. 차 타고 왔지.]
“…….”
시답잖은 농담에 침묵으로 맞선 하경은 한결의 뒤에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는 유현에게 시선을 옮겼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읽을 수 없었다. 물론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무표정하게 있을 때도, 웃고 있을 때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건 매한가지였으니.
[뭐 해. 빨리 문 열어줘.]
모든 생각과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한결이 카메라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칭얼거렸다. 하경은 하는 수 없이 1층 공동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남자가 1001호에 도착한 건 2분쯤 지나서였다.
“누나!”
한결은 망설임 없이 성큼 집 안으로 들어섰고, 유현은 현관 밖에서 멈춰 섰다. 하경은 한결의 어깨 너머로 유현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은 순간, 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예쁜 미소였다. 한결에게로 눈을 돌린 하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문을 뗐다.
“갑자기 뭐야. 오면 온다고 연락을 해야 할 거 아냐.”
“내가 우리 누나 보러 오는데 꼭 연락을 해야 해?”
순진무구한 눈망울로 묻는다 한들 그녀의 대답은 같았다.
“응, 해야 해.”
한결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씩 웃었다.
“좀 전에 임 팀장이랑 마주쳤는데 누나 집에 갔다더라고.”
하경도 한결이 승조에게 들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이 집에 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뿐이었으니 다른 가능성을 고려해볼 필요가 없었다.
“혹시 겁먹고 울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돼서 들러봤어.”
“…….”
이놈이 지금 뭐라는 건가……. 겁쟁이로도 모자라 졸지에 울보까지 되어버린 하경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겁먹었다는 것까지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울 정도는 아니었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초등학교 고학년 이후로는 누구 앞에서도 울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자신이 걸핏하면 운다고 오해하기 충분한 발언이었다.
“나만큼 누나 생각해주는 동생이 어딨어. 안 그래?”
하경은 뒤늦게 자신이 ‘바빠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호텔에서 지내왔다는 사실을 유현에게 들켰다는 걸 깨달았다. 한결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에게 주절주절 떠들어댔으리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너스레를 떠는 한결에게 그녀의 매서운 시선이 따라붙었다. 도움 안 되는 놈. 하경은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고 말을 돌렸다.
“근데 왜 둘이 같이 와?”
한결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는 유현의 말은 기억하고 있었다.
“저녁 먹고, 술 한잔하고, 우리 집에 가는 길에 들른 거라서.”
하경의 시선이 한결을 떠나 그의 뒤쪽으로 향했다.
“그 짐은 뭔데?”
그녀가 보고 있는 건 유현이 곁에 두고 있는 캐리어였다. 유현의 것이라는 짐작만 갈 뿐, 왜 여기까지 가지고 왔는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한결이 흘긋 뒤를 돌아보면서 대답했다.
“아, 유현이 체크아웃했어. 원래 부모님이랑 형이랑 같이 살았는데 이번에 독립하기로 했거든. 그래서 집 알아보는 중이야. 집 구할 때까지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려고. 호텔비 아깝잖아.”
한결은 오늘도 어김없이 묻지도 않은 정보까지 술술 풀어놓았다. 하나를 물으면 최소 두, 세 가지를 더 알려주는 건 그의 주특기였다.
“주한결, 너 주원 호텔 주주 맞니?”
“돈은 딴 사람한테 벌면 되잖아. 내 친구 돈은 내가 지킨다.”
하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알았으니까 그만 가. 피곤해.”
한결이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벌써 가라고?”
“누가 들으면 먼 길 온 줄 알겠네.”
호텔에서 하경의 아파트까지는 차로 불과 15분 거리였다.
“트렁크에 짐 싣고 내리는 게 얼마나 번거로운데. 그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누나 보러 온 동생하고 동생 친구를 이렇게 문전박대하기야?”
“차에 두고 오면 되지 누가 여기까지 가지고 오래?”
“우리 택시 타고 왔어.”
하경은 그제야 조금 전 자신이 지하 주차장이 아닌 1층 공동 현관문을 열어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왜 택시 타고 왔는데?”
“우리 술 마셨다니까. 나 대리 안 부르는 거 누나도 알잖아.”
하경도 물론 잘 알고 있었다. 한결이 처음부터 대리운전 기사를 부르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2년 전, 한국에 딱 3대 들어온 최고급 스포츠카를 산 지 보름도 지나지 않아서 대리운전 기사의 운전 미숙으로 사고가 난 이후부터였다. 하경이 ‘그럼 유현이 차는?’이라는 의미로 유현을 바라보자, 한결이 재깍 말을 이었다.
“저 자식, 뭐든 제 거에 누가 손대는 거 싫어해. 절대 남한테 운전대 안 넘겨줘.”
그는 말을 하면서 주섬주섬 신발을 벗었다.
“술 한잔 주라, 누나.”
“왜 여기 와서 술을 찾아. 너희 집 가서 마셔.”
한결은 제 앞을 가로막는 하경의 어깨를 잡고 휙 돌려세운 다음, 뒤에서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유현을 돌아보며 들어오라고 눈짓했다. 동시에, 몸부림치는 하경을 꽉 끌어안고서 걸음을 옮겼다.
“야, 주한결. 안 놔? 어딜 밀고 들어와.”
한결은 부엌에 도착해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의 시선이 식탁 위에 놓인 소주병으로 향했다.
“뭐야. 혼자 소주 마시려던 참이었어?”
하경이 한결을 노려보면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래.”
“우리 누나, 왜 이렇게 처량해. 주하경이 집에서 혼자 소주 마시고 있는 모습을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그녀는 최고급 와인을 즐길 것 같은 이미지였다.
“내가 뭘 마시든.”
코웃음으로 응수한 하경의 귀로 유현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누나, 소주 좋아해요?”
한결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느릿하고 차분했다. 하경이 유현을 돌아보는 사이, 한결이 끼어들어 그녀 대신 대답했다.
“아마 누나가 제일 좋아하는 술이 소주일걸? 대학 가서 배웠다는데 졸업한 이후로는 같이 마셔줄 사람이 없어요. 누나 주위에 소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다들 양주나 와인 마시지 누가 소주를 마셔.”
딱 한 사람 있긴 했다. 임승조. 하경이 유일하게 함께 소주를 마시는 사람이었다.
“나랑 취향이 같네요.”
유현은 하경을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앞으로는 나랑 같이 마셔요.”
“…….”
하경은 한결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두 사람 사이의 묘한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내 주위에 소주 좋아하는 사람 딱 둘 뿐이야. 주하경, 손유현.”
하경이 방심한 틈을 타서 식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한결이 자연스럽게 소주병 뚜껑을 돌려 따며 물었다.
“누나, 소주 더 있어? 있으면 더 가져와 봐. 나도 오늘은 소주나 좀 마셔봐야겠다.”
하경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다용도실로 걸음을 옮겼다. 한결의 고집을 알기에 더 힘을 빼고 싶지 않아서였다. 다용도실 문을 열고 들어가 선반 위에 놓인 상자 안에서 소주 두 병을 꺼내 들고 몸을 돌린 그녀가 흠칫 몸을 떨었다. 언제 따라왔는지 유현이 바로 뒤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등 뒤에 가 있었다.
“웬 소주가 박스로 있어요?”
하경은 유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짐짓 쌀쌀맞게 말했다.
“좀 비켜줄래?”
그는 뒤돌아 나갈 거라는 그녀의 예상을 깨고 옆으로 비켜서기만 했다. 덕분에 하경은 유현과 밀착해서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옷이 닿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향기가 지난번보다 훨씬 더 진하게 코끝을 스쳤다. 물론 그녀의 향기 또한 유현에게 전해졌다. 완전히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긋한 샴푸 냄새가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유현은 다용도실을 나가는 하경을 뒤따르며 물었다.
“누나가 직접 박스째로 들고 왔을 것 같지는 않고, 배달시켰어요?”
그녀가 여느 재벌가 딸답지 않게 소탈하다는 건 한결을 통해 들어서 알고 있지만,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소주 박스를 카트에 싣는 모습까지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니, 승조 선배가 사다 줬어.”
하경에게 소주를 공급해주는 사람은 승조였다. 먼저 말하지 않아도 상자가 비어갈 때쯤 되면 귀신같이 사다가 채워주곤 했다. 그때마다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승조 선배가 누구예요?”
“네가 월요일부터 일하게 될 기획팀, 팀장.”
“아, 누나가 동생보다 더 신뢰한다는 비서실장님.”
“쟤가 그래?”
하경의 시선이 의자에 편하게 기대앉아 있는 한결에게 향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한결이 씩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내가 그랬지’라고 그의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누나가 자기보다 그분을 더 아낀다면서 얼마나 질투를 하는지.”
“가지가지 한다, 주한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하경은 손을 내미는 유현에게 소주 두 병을 넘겨주고 컵 세 개를 챙겨와서 한결의 옆자리에 앉았다.
“안주는 없다.”
“상관없어요.”
유현이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은 것과 동시에 한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화장실.”
한결이 사라지고 유현과 둘만 남게 되자, 하경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결이한테 말한 거 아니지?”
“무슨 말이요?”
“네가 나한테 했던 말.”
“결혼하자는 말?”
‘결혼’이라는 말을 직접 입에 올리기 민망해서 돌려 말한 하경과 달리, 유현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태연했다.
“그래.”
“안 했어요.”
물론 하경도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가 말을 했다면 한결이 평소와 똑같을 리 없을 테니까. 몰라서 물은 게 아니라 입조심하라는 경고였다.
“할까요?”
유현이 식탁 위에 두 팔을 얹고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하경은 그윽한 눈빛과 은근한 말투에 순간적으로 가슴이 뛰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 단호하고 딱딱하게 대답했다.
“하지 마.”
그걸로도 모자라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절대 하지 마.”
유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할게요. 누나가 허락할 때까지는.”
하경은 말없이 소주병을 집어 들어 그를 향해 내밀었다. 그리고 유현이 들어 올린 잔에 소주를 채워주었다.
“내가 따라줄게요.”
그가 내민 손을 못 본 척 제 잔을 직접 채운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촌스럽게 짠, 같은 건 하지 말자.”
“촌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누나가 싫다면 하지 말아요.”
두 사람은 동시에 잔을 비웠다. 밥 한 끼 먹어본 적도, 차 한 잔 마셔본 적도 없는 그들의 대작이 시작되었다. 곧이어 화장실에 다녀온 한결이 합류했다. 세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잔을 비웠다. 이미 술을 제법 마시고 온 한결과 술이 그리 세지 않은 하경은 금세 알딸딸해졌다. 그러나 유현은 한결보다 더 많이 마셨으면서도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멀쩡했다.
“난 누나가 민건이 형이랑 결혼한다는 게 아직도 신기해. 유현이랑 내가 사돈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
나도 신기하다. 네 친구한테 청혼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하경이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던 그때, 그녀의 휴대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휴대 전화와 가장 가까이 있던 한결이 휴대 전화를 집어서 하경에게 건네주었다.
“임 팀장인데?”
하경은 그가 왜 또 전화를 했을까 생각하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승조의 말을 듣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갑자기 수심이 서렸다.
“원인은 파악했어요?”
한결이 옆에서 정신 사납게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경은 의자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제주 주원 호텔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고 적절한 조치를 지시한 뒤 서재를 나온 그녀의 눈에 식탁 앞에 홀로 앉아 있는 유현이 들어왔다. 한결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 있어요?”
“별일 아니야.”
하경은 도로 자리에 앉으면서 화장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결이는 또 화장실 갔어?”
“여친이 불러서 급하게 갔어요.”
당황한 그녀가 유현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갔다고?”
이 집에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