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랑 해요-5화 (5/79)

“알았어. 어떻게든 아이 지우게 하고 해림이랑 헤어질게. 그러면 되지?”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유현을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민건이 원하는 결혼 상대는 외모, 집안, 학벌, 모든 게 완벽해야 했다. 어디 내놔도 어깨가 으쓱해지는 완벽한 파트너, 그게 바로 주하경이었다. 더 나은 상대를 만나기 힘들다는 걸 알기에 하경과의 결혼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해림이한테 아이는 지우고 결혼한 뒤에도 계속 만나자고 했다면서? 왜? 아이는 부담스러운데 해림이랑 헤어지는 건 아쉬웠어?”

“달래려고 한 말이었을 뿐이야.”

민건은 해림이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들러붙을 줄도 몰랐고, 유현이 이런 식으로 끼어들 줄도 몰랐다. 그래서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형이 해림이랑 잘 상의해서 서로에게 최선의 길을 찾았다면 내가 나설 일은 없었을 거야. 그런데 형은 이미 선을 넘었어. 그리고 나도.”

하경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한 이상 이제 제 마음대로 끝낼 수 있는 단계는 지났다. 그렇게 되면 정말 장난을 친 것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유현은 제 입으로 한 말을 끝까지 책임질 생각이었다.

“형이 모든 걸 조용히 해결하고 덮는다고 해도 이제 난 그만둘 수 없어. 날 멈추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하경 누나뿐이야.”

“…….”

민건은 이를 악물고 유현을 노려보았다. 말아쥔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해림 때문에 골치가 아파 죽을 지경인데 더 다루기 힘든 놈이 나타난 셈이었다.

“더 할 말 없으면 그만 일어날게.”

유현은 느긋하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동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민건은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난 뒤 눈앞에 놓인 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양주를 단숨에 비우고 빈 잔을 테이블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퍽. 산산조각으로 깨진 유리 파편이 살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제 앞길을 가로막으려 하는 유현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출근 준비를 마친 하경은 24층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올라갔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시각이라 조식 뷔페를 이용하기 위해 온 손님은 몇 없었다. 따끈하게 구워진 식빵 한 조각과 뜨거운 커피 한 잔을 가지고 창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슴이 탁 트일 만큼 맑은 하늘과 은은하게 퍼지는 클래식 선율이 눈과 귀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그녀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하경은 창밖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맞은편 의자 뒤에 누군가 서 있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던 그녀가 갑자기 멈칫했다. 유현의 청량한 미소가 시야를 가득 채운 순간이었다.

“출근이 빠르네요.”

그는 여전히 하경이 1410호에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앉아도 돼요?”

그녀의 눈이 반사적으로 그의 손에 들린 머그잔으로 향한 사이, 유현은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았다.

“앉으라고 안 했는데? 자리도 많은데 다른 자리로 가줄래?”

그는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올리고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어제 내가 한 말 신경 쓰여서 그래요?”

“아니, 전혀.”

하경이 도도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결혼하자고 안 했다면 다른 자리로 가라고 하지 않았을 거잖아요.”

“…….”

허를 찔린 그녀는 받아칠 말을 찾지 못했다. 유현의 말대로 어제 난데없이 청혼을 받지 않았다면 마주 앉아 커피 한 잔 마시는 것쯤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제 이후로 그와 마주 앉아 있는 게 대수로운 일이 되어 버렸다. 하경을 빤히 보고 있던 유현이 갑자기 뜬금없는 말로 화제를 바꿨다.

“누나, 명함 한 장만 줘요.”

“내 명함은 뭐 하게?”

“프러포즈까지 해 놓고 번호도 모르는 거 좀 이상하잖아요.”

“프러포즈한 게 더 이상해. 아니, 네가 제일 이상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이상한 것들을 다 갖다 붙여도 그를 이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이상해요?”

“어,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 네가 최고야.”

“아침부터 칭찬받으니까 좋네.”

“…….”

하경의 말문을 막히게 한 유현이 싱긋 웃었다.

“명함, 안 줄 거예요?”

“안 줄 거야.”

“그럼 휴대폰 번호만 알려줘요.”

하경도 지지 않고 그를 향해 예쁘게 웃어 주었다.

“그걸 알려줄 거였으면 그냥 명함을 줬겠지?”

알려줄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 헛수고하지 말라는 뜻을 듬뿍 담아서.

“다른 경로로 알아내면 스토커 같다고 할까 봐 직접 물어보는 거예요.”

“어, 그렇게 생각할 거야.”

“알았어요. 누나가 알려줄 때까지 기다릴게요.”

“…….”

유현이 순순히 받아들이자, 도리어 찜찜해진 건 하경이었다. 별것도 아닌 걸로 유세를 떤 기분이 들었다.

“그만 일어날게요. 방해해서 미안해요.”

유현은 그녀를 향해 엷게 웃어 보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경은 곧장 레스토랑 입구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콧등을 찌푸린 그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여러모로 신경 쓰이게 하네…….”

유현이 앉았던 자리에는 입도 대지 못한 커피가 하얀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 하경을 뒤로하고 레스토랑을 나온 유현은 곧장 집으로 향했다. 아침 일찍부터 움직이는 이유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긴히 할 말이 있어서였다. 그는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부드럽고 순한 인상의 중년 여자가 그 소리를 듣고 부엌에서 달려 나왔다.

“유현아.”

민건과 유현의 어머니 심영란 여사는 물이 떨어지는 손을 행주로 받친 채 오랜만에 본 아들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버지 아직 안 나가셨죠?”

“식사 중이셔.”

고개를 끄덕인 유현은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서 아버지의 맞은편에 앉았다. 손 의원이 젓가락을 탁 내려놓으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네 엄마한테 한국에 돌아왔다고 전화 한 통 하고 집에는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이제 들어올 마음이 생긴 거냐.”

“아니요. 부탁드릴 게 있어서 잠깐 들렀어요.”

유현이 지금 주원 호텔에 있는 건 하경 때문이기도 했지만, 같은 집에 사는 형과 마주치기 싫어서이기도 했다.

“부탁?”

그는 지난 몇 달 동안 아무런 의욕 없이 살았다.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던 줄이 한순간에 끊겨버린 것처럼 허탈하고 허무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오랜만에 목표가 생겼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도움이 조금 필요했다. ***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하경은 회장 비서실로부터 연락을 받자마자 이사실을 나와 비상구로 향했다. 회장실을 갈 때는 늘 계단을 이용했다. 고작 한 층을 타고 올라가자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건 성질 급한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새로 오픈할 면세점과 호텔에 관한 보고 사항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면서 회장실에 도착한 하경은 비서가 열어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회장실 안에는 주 회장 외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그녀의 두 다리가 멈칫했다.

‘왜 여기…….’

오늘 아침에도 보았던 얼굴. 그러나 아침과 달리 슈트를 갖춰 입고 있는 남자. 그는 바로, 유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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