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내 식대로,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novel.naver.com
4화. 내 식대로2020.04.12.
유현은 두 달간의 방황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직후 해림의 전화를 받았다. 꼭 상의해야 할 일이 있다고, 너무 힘들다고 울던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워낙 어려서부터 봐 왔기에 그의 눈에는 스물셋이나 된 해림이 아직도 아이 같았다. 그래서 해림이 형과 벌써 2년 가까이 만나왔고, 임신까지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놀란 것과는 별개로 두 사람 다 성인인 이상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민건 오빠가 아이 지우래. 나랑 결혼할 마음 같은 거 없대. 지금 결혼 얘기 오가는 여자 있다면서 아이로 자기 발목 잡지 말라고 하네…….”
해림과 헤어져서 형을 만났다. 그리고 결혼 상대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 주하경. 가장 친한 친구의 누나. 초등학교 무렵까지는 가족들끼리 다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두어 번쯤 봤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한결의 집에 놀러 갔을 때 몇 번 마주쳤다. 10년이 넘었지만,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모습이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었다. 특별한 추억을 공유했기 때문일까. 제 허리와 등을 내주었던 첫 번째 여자. 아직까지 마지막 여자이기도 했다. 누구도 태워본 적 없던 오토바이에 하경을 태운 건 그날 그녀가 너무 지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냥 위로해주고 싶었다. 한결이 누나에 대해 가장 많이 한 말은 ‘독종’이었다. 지는 걸 못 견디는 성격이라 공부든 뭐든 죽기 살기로 한다면서 왜 그렇게 사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자주 투덜거렸다. 그때마다 유현은 너처럼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오늘만 사는 것보다는 낫지 않냐고 받아치곤 했다. 그는 한결을 비롯해서 집안의 돈이나 백을 믿고 아무런 노력 없이 한심하게 사는 재벌가 자제들을 많이 보았다. 덕분에 하경이 더 신기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해림이가 임신했다는 거 알면서 하경 누나랑 결혼하겠다고?”
“떼라고 했어.”
“그럴 생각 없다던데?”
“그럼 나더러 뭘 어쩌라고.”
“아빠로서 책임을 져야겠지.”
“네 일 아니라고 막말하는 거냐? 난 아빠가 될 생각이 없다고.”
유현은 형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해림의 일을 그녀가 원하는 방식으로 깔끔하게 해결하고 하경과의 결혼을 진행하든지 아니면 결혼을 포기하라고. 그게 순리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해림을 친동생처럼 아낀다고 해도, 아무리 해림이 도와달라고 사정했다고 해도, 제삼자로서 그 이상 나설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다음 날, 형의 결혼 날짜가 정해졌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전화를 걸어온 해림은 형으로부터 아이를 지우고 계속 제 옆에 있으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내연녀로 살라는 뜻이었다. 유현을 참을 수 없게 만든 결정적인 이유였다. 며칠 동안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복기하고 현실로 돌아온 그가 말문을 뗐다.
“난 형 선에서 수습할 기회를 줬어. 근데 내 말을 동네 개가 짖는 정도로 생각한 것 같네. 그래서 이제 나도 내 식대로 하려고.”
민건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설마…… 하경이한테 해림이랑 내 사이, 말하겠다는 건 아니지?”
그는 유현이 대답할 여유를 주지 않고 곧장 쐐기를 박았다.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믿는 건 형 자유야. 물론 내가 그 믿음에 부응해야 할 의무는 없다는 건 잘 알 테고.”
“…….”
유현은 딱딱하게 굳은 민건의 얼굴을 보면서 빙긋 웃었다.
“근데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어.”
안도한 민건이 가슴을 쓸어내리려는 순간, 유현이 한마디 덧붙였다.
“대신 다른 방법으로 이 결혼을 멈추게 할 생각이야.”
“……다른 방법?”
민건은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하경 누나랑 결혼하려고.”
“뭐라고?”
“형 말고 내가, 하경 누나랑 결혼하겠다고.”
“…….”
유현은 말문이 막혀버린 민건을 보면서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하경 누나한테는 형한테 여자가 있다는 것도, 결혼하고서도 그 여자를 세컨으로 둘 계획이었다는 것도, 말하지 않을게.”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민건이 테이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너 지금 제정신이야?”
“아주 멀쩡해.”
“결혼이 장난인 줄 알아? 하경이랑 나, 결혼 날짜까지 잡았다고!”
“결혼한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야.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는 하겠지만, 그게 얼마나 가겠어. 어차피 서로 목적이 있어서 하는 결혼이라는 거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텐데.”
언제 큰 소리를 냈냐는 듯, 민건의 어조가 급격히 낮아졌다.
“아버지가 허락하실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좀 황당해하시겠지만 결국 허락하실걸? 아버지의 궁극적인 목표는 주원 호텔과 사돈을 맺는 거잖아. 형이든, 나든, 수단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유현이 태연하게 응수했다.
“그럼 하경이는? 네가 결혼하겠다고 나서면 하경이가 순순히 그러자고 할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형은 형 일이나 신경 써.”
사실 모든 것을 다 까발리고 결혼을 깨버리는 게 가장 간단했다. 그러나 유현은 형에게 더 강력한 방법으로 경고하고 싶었다.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는 지키고 살라고. 단순히 결혼이 무산되는 것보다 자신에게 주하경이라는 최고의 결혼 상대를 뺏기는 것이 형에게는 더 참기 힘든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손유현!”
흥분한 민건의 얼굴과 귀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하경 누나랑 결혼하는 꼴 못 보겠으면 형 입으로 솔직히 말하든가. 하경 누나가 모든 걸 알고도 상관없다고 한다면 나도 질척거릴 생각 없어.”
민건은 하경이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결혼은 비등한 집안끼리의 결합이었다. 자신과 결혼을 함으로써 주원 호텔에 득이 되는 건 분명하지만,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실이 되는 건 아니었다. 기우는 결혼이라면 몰라도, 하경의 성격에 해림의 존재를 받아들이면서까지 결혼을 강행할 리 만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