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남자로 보이게 해 줄게요,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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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남자로 보이게 해 줄게요2020.04.09.
하경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살면서 결혼하기로 한 남자의 친동생에게 청혼을 받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어떤 교감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황당하지는 않을 거였다. 유현과 12년 만에 재회한 지 고작 이틀이 지났을 뿐이었다. 이틀 동안 함께 있었던 시간은 다 끌어모아도 10분도 채 되지 않았다.
“미쳤니?”
그녀가 내린 결론이었다.
“내가 미친 걸로 보여요?”
“어, 아주 많이.”
하경의 머릿속에 어젯밤 한결에게 들은 여섯 글자가 번뜩 스쳐 갔다. 검. 찰. 청. 또. 라. 이. 어제는 공감할 수 없었지만, 오늘은 십분 공감이 갔다. 유현은 아무런 반박도 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만약 장난을 치고 싶은 거라면 상대를 잘못 골랐어. 난 이런 장난에 맞장구쳐줄 만큼 한가하거나 관대한 사람이 아니야.”
하경이 정색하자, 그도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누나가 한가하거나 관대한 사람이라고 해도 결혼하자는 장난을 치지는 않아요.”
하경은 유현의 저의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미쳤냐고 물었지만 그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모르지 않았고, 장난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당혹스러웠다.
“손유현, 나 곧 네 형이랑 결혼하는 거 몰라?”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기다란 속눈썹을 천천히 깜빡였다.
“알아요.”
이 무슨 패륜이란 말인가. 결혼을 앞둔 여자에게 밑도 끝도 없이 청혼하는 것만으로도 욕을 먹어도 싼데, 하물며 형수에게 청혼하는 시동생이라니…….
“알면서 형수한테 결혼하자는 거야, 지금?”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하경과 달리, 유현은 여전히 차분했다.
“아직 아니잖아요.”
“…….”
하경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의 말을 부인할 수 없어서였다. 유현의 말대로 자신은 아직 그의 형수가 아니었다. 결혼 날짜만 정해졌을 뿐, 양쪽 집안이 정식으로 만난 적도 없고 결혼 상대와 밥 한 끼 먹은 적이 없으니 형수라는 말은 아직 일렀다. 어느 한쪽에서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해도 크게 얼굴 붉히지 않고 접을 수 있는 단계. 현재로서는 그 정도에 불과했다. 유현이 여유롭게 한마디 덧붙였다.
“앞으로도 아닐 거고.”
“…….”
하경은 말없이 유현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그에게는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는 듯했다. 확신에 찬 그의 말을 들으니 제 의지와 상관없이 정말 그렇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있던 유현이 담담하게 물었다.
“우리 형이랑 사귀어요?”
“아니.”
“우리 형 좋아해요?”
질문에는 ‘남자로서’라는 말이 생략돼 있었다. 하경도 그가 어떤 의미로 물은 건지 모르지 않았다.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해.”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고, 솔직히 말하고 싶지도 않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좋아하냐고 물었어요.”
“그걸 내가 왜 너한테 대답해야 하는데?”
하경은 민건을 남자로서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다. 살면서 좋아질 수도 있겠지만, 일단 지금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결혼할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었다. 그건 민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안 해도 돼요. 안 들어도 알겠으니까.”
하경의 마음을 몰라서 물은 게 아니었다. 단지 제 확신을 확인해보고 싶었을 뿐. 유현은 손민건과 주하경이 결혼하려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지도 모르지 않았다. 서로에게 친밀감이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어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지금 다시 한번 확인했다.
“까놓고 말해서, 주하경이 손민건이랑 결혼하려는 거 손씨 집안 때문 아닌가? 물론 손민건이 주하경이랑 결혼하려는 이유도 똑같고.”
정략결혼의 배경을 신랄하게 꼬집은 그가 단호하게 한마디 더했다.
“권력과 재력의 상호 교환.”
하경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속물이라고 욕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그녀는 제 선택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조건 맞춰서 하는 결혼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비례 대표로 국회 입성한 지 일 년도 채 안 된 형 하나 보고 결혼하는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야.”
손민건이라는 사람 자체만 두고 보면 결혼을 결심할 만큼의 매력은 없었다. 지금은 손종일 의원의 아들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우리 형을 좋아하는 게 아니고, 꼭 형이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라면 손종일 의원 차남하고 하면 되잖아요.”
두 사람 사이에 일말의 애정이라도 있었다면 유현이 이런 제안을 할 일도 없었을 거였다. 하경이 이렇게 그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었을 리도 없었을 테고.
“그 결혼, 나랑 해요.”
하경은 이제 당혹스러운 마음보다 그가 갑자기 형의 결혼을 방해하고 나선 이유가 더 궁금해졌다.
“혹시 형한테 열등감 있니? 그래서 형을 이기고 싶다거나 형이 가진 것을 뺏고 싶다거나, 뭐 이런 거야?”
“열등감?”
유현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감정이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누구에게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하경의 질문에 성의껏 답하기 위해 일단 고민은 해 보기로 했다. 무의식중에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을 테니. 물론 대답은 고민 전이나 고민 후나 똑같았다.
“형을 이기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형이 가진 걸 뺏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어요.”
하경은 뒤늦게 제 질문이 민망해졌다. 외모와 학벌 모두 민건보다 유현이 월등하다는 사실을 알면서 물은 건 형제간에 서열 다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현의 표정을 보니 영 잘못 짚은 듯했다.
“그럼 아버지한테 반항 중이야?”
유현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반항은 또 뭐예요.”
“아버지가 하는 일에 어깃장 놓고 싶어 하는 건가 해서.”
하경은 손 의원이 이 결혼을 얼마나 반기는지 아버지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정치인에게 돈줄이 되어줄 재벌 사돈이 생긴다는 건 아주 든든한 일이니까.
“누나 참 대단한 것 같아요.”
“뭐가?”
“내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생각들을 어쩜 이렇게 잘하지?”
하경의 귀가 살짝 붉어졌다.
“그럼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누나 정도 조건 가진 여자 찾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누나랑 결혼하고 싶다는 건데 다른 이유가 또 필요해요?”
다른 이유 같은 건 더 필요하지 않을 만큼 솔직하고 현실적인 대답이었다.
“좋아. 내가 손민건이 아니라 손유현이랑 결혼해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을 말해 봐.”
“얼굴은 내가 형보다 낫지 않아요? 키도 더 크고.”
하경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까불지 말고.”
진지하다가도 장난스럽고, 장난스럽다가도 진지한 그에게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당최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였다.
“음…….”
미간을 모으고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유현이 돌연 어깨를 으쓱거렸다.
“딱히 없네.”
사리 분별이 완전히 불가능한 상태는 아닌 모양이었다.
“없지? 그럼 이제 다시는 헛소리하지 마. 오늘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할게.”
“들어놓고 어떻게 못 들은 걸로 해요. 누나는 오늘, 내가 결혼하자고 한 말 분명히 들었어요.”
그의 반박에 하경이 살짝 콧등을 찌푸렸다.
“좀 전에 네가 꼭 민건 오빠여야 하는 게 아니라면, 이라고 했지? 맞아. 손민건일 필요는 없어. 하지만 손유현일 필요는 더더욱 없지. 안 그래?”
유현과 반드시 결혼해야 할 이유가 생기지 않는 이상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민건과의 결혼은 예정대로 진행될 거였다.
“그래요.”
하경은 드디어 유현이 수긍한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쉽게 설득되거나 쉽게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럼 누나랑 결혼할 방법은 하나뿐이네.”
“…….”
하경은 유현의 입에서 또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잠자코 있었다. 그런데 내심 그 방법이 뭔지 궁금했다. 궁금해서 애타는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누나가 나랑 결혼하고 싶어지는 거.”
하경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내가 너랑 결혼하고 싶어질 리가 없잖아.”
“단정 짓지 말아요. 누나가 날 좋아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나?”
“내가 널?”
하경은 일부러 더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주하경이 손유현을.”
유현이 질세라 더 세게 못을 박자, 하경도 코웃음으로 맞섰다.
“난 너 남자로 안 보여.”
그냥 둘러대려고 한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가뜩이나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그녀가 특히 연하를 남자로 보지 않는 건 철딱서니 없는 한결 덕분이었다.
“남자로 보이게 해 줄게요.”
“까분다.”
하경은 짐짓 눈에 힘을 주고 유현을 나무랐다.
“내가 까분 건지, 누나가 경솔한 건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고.”
“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솔하다는 말 들어본 적 없어.”
그러니 네가 까분 게 될 거라는 뜻이었다. 물론 유현의 생각은 하경과 전혀 달랐다.
“그럼 이번에 처음으로 들어보겠네요.”
“…….”
어디 가서 말로 져본 적이 없건만 오늘 같은 날은 처음이었다.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지금까지 듣고 있었던 것도 신기한데 심지어 그의 말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었다. 어쩌면 손민건이 아닌 손유현과 결혼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결혼 상대로 둘 중 누가 더 나을까. 하지 않아도 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하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현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는 길이었어요? 데려다줄게요.”
“됐어. 나오지 마.”
유현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여기서 더 나가면 역효과가 나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열고 나가는 그녀를 미동 없이 서서 조용히 지켜보던 그는 문이 닫히고서야 도로 자리에 앉았다. 이 미친놈은 뭔가,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하경을 떠올리니 웃음이 났다. 쌍욕을 먹거나 따귀를 맞을 각오까지 했건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상보다 차분한 반응이 신기할 정도였다. 모든 걸 솔직히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해줄 수 있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형과 결혼하면 후회하게 될 거라고. *** 하경은 1407호에서 나와 좌우를 돌아보았다. 복도는 인적 없이 고요했다.
‘갔나 보네.’
살벌한 눈초리로 쏘아보던 여자를 떠올리니 실소가 절로 났다. 자신이 유현과 결혼할 여자라는 오해를 받는 줄 알았더라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였다. 유현이 따라다니는 여자를 떼어내기 위해서 결혼할 여자가 있는 척 둘러댄 게 아니라 자신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는 걸 알게 되니 더 기가 막혔다. 잰걸음으로 1410호에 다다른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가서 그대로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발에서 하이힐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듣고 온 거야…….”
태어나서 오늘만큼 당혹스러운 날이 또 있었을까. 그런데 희한하게도 불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왜?’라는 의문만 남았을 뿐이었다. 유현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한 이유가 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제 조건 때문이라고 했지만,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뭘까…….”
하경은 골똘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한 남자에게 이렇게까지 몰두해본 게 처음이라는 사실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 하경이 유현을 떠올리고 있는 동안, 유현의 머릿속에는 다른 여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김해림. 아버지의 옛 보좌관 딸이자 친동생 같은 아이. 귀국해서 가장 먼저 만난 그녀가 울면서 털어놓은 이야기가 밑도 끝도 없는 청혼의 발단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그의 귀로 휴대 전화 벨소리가 파고들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어 보니 발신자는 ‘형’이었다. 형에게서 전화가 걸려올 거라 예상했던 유현은 담담하게 전화를 받았다.
“어.”
[좀 보자.]
“용건은?”
[몰라서 묻냐? 닥치고 나와.]
민건은 며칠 전에 만났던 클럽으로 당장 오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유현은 심드렁한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늘은 또 얼마나 뻔뻔하게 나오려나 궁금하기까지 했다. 30분 뒤. 내로라하는 집안 자식들이 드나드는 걸로 유명한 클럽에 도착한 그는 2층 룸으로 안내받았다. 룸 안으로 들어간 유현의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분노에 찬 민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주원 호텔에 있는 거야!”
유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걸어가 민건의 맞은편에 앉았다.
“하경이한테 쓸데없는 말 떠들면 가만 안 둬. 명심해.”
“쓸데없는 말이 뭔데?”
“…….”
민건이 죽일 듯이 노려보는 상황에서도 유현은 위축되기는커녕 손수 보기까지 들어주는 여유를 보였다.
“형한테 여자 있는 거? 그 여자가 임신한 거?”
“손유현!”
민건의 고함이 룸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귀가 아프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린 것도 잠시, 유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쓸데없는 말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해.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경멸 어린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