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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해요-1화 (1/79)

1화. 12년 만의 재회, 나랑 해요 : 네이버웹소설

주원 호텔 회장실.

“약혼식은 이번 달 마지막 주 금요일, 결혼식은 다음 달 셋째 주 토요일로 정해졌다.”

하경은 아버지인 주서호 회장으로부터 약혼식과 결혼식 날짜를 통보받았다. 신랑이 될 남자와 합의한 적도 없고, 그녀의 의사가 반영되지도 않은 날짜였다. 유명한 무속인에게 받아온 길일일 뿐. 요즘 같은 시대에 무당이 정해준 날짜에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한다는 게 어처구니없기는 하지만, 굳이 따지고 들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굳이 약혼식까지 할 필요가 있어요?”

“손 의원이 하고 싶어 한다. 그냥 맞춰주자.”

하경이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뭐.”

사실 그녀는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었다. 원하는 건 어떻게 해서라도 가져야 직성이 풀리고, 하기 싫은 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결혼 문제에서 이토록 순순한 건 별다른 관심이 없어서였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두 집안이 결속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추진하는 결혼에 열의를 가지기는 쉽지 않았다. 하경이 하려는 건 바로, 정략결혼이었다.

“다음 주 토요일 저녁 시간 비워둬라. 상견례 겸 양가 가족들 다 같이 밥 한번 먹기로 했다.”

“네.”

“결혼 날짜도 정해졌는데 민건이랑 데이트도 좀 하고.”

“제가 알아서 할게요.”

민건은 하경에게 사랑하는 남자도, 사귀는 남자도 아닌, 결혼 상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녀는 정략결혼의 희생자는 아니었다. 누구의 강요도 없이, 정치인 집안과 손을 잡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해득실을 신중히 따져보고 한 결정이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죠?”

“없다.”

“나가보겠습니다.”

하경은 자리에서 사뿐 일어나 회장실을 나왔다. 복도를 걷는 그녀에게 주위의 시선이 모였다. 170cm의 큰 키와 시원하게 쭉 뻗은 각선미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경은 어딜 가든 주목받는 스타일이었다. 재벌 3세라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명석한 두뇌로 명문대를 졸업하고 주원 호텔에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7년 만에 이사 자리에 오를 만큼 능력도 출중했다. 물론 그녀의 빠른 승진을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생각은 달랐다. 회장의 딸이라서 하경이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힘이 실린 건 사실이었지만, 불과 5년 만에 연 매출을 30% 이상 끌어올린 것이 그녀의 공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사실로 돌아온 하경에게 비서실장인 승조가 따라붙었다. 그녀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책상 앞에 앉자, 그는 ‘주하경’이라는 이름이 각인된 명패 앞에 단정하게 섰다.

“두통약 드릴까요?”

“좀 참아볼게요. 오늘 벌써 두 번이나 먹었네.”

승조는 만성 두통에 시달리는 하경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며 물었다.

“회장님께서 싱가포르 면세점 오픈 건으로 부르셨습니까?”

“아니, 그 얘기는 전혀 안 하시던데요?”

“그럼 무슨 일로…….”

“나 이번 달에 약혼하고, 다음 달에 결혼한대요.”

“…….”

남의 일인 양 담담한 하경과 달리, 승조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여실히 배어났다.

“왜 놀라요? 몰랐던 사람처럼.”

“생각보다 너무 빨라서…….”

“서로 재볼 것도 없겠다, 결혼 준비는 전문가들한테 맡기면 되겠다, 미적거릴 이유가 없잖아요.”

결혼 이야기가 나온 건 불과 2주 전이었다. 친구 결혼식에서 민건을 오랜만에 만났고, 그로부터 사흘 뒤 혼담이 들어왔다. 결혼 제의를 받고 수락하는 과정에서 민건과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통화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번호조차 몰랐다. 그래서 하경은 이 결혼이 민건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지, 아니면 그의 아버지 생각인지 알지 못했다. 사실 딱히 궁금하지는 않았다. 망치로 머리를 두드리는 듯한 고통이 밀려들자,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만 퇴근해요, 선배.”

하경과 승조는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나왔다. 본격적으로 친해진 건 주원 호텔에서 함께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3년 선배인 승조가 먼저 주원 호텔에 입사했지만, 승진은 하경이 더 빨랐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런 불만 없이 그녀를 보좌하고 있었다. 하경은 매사에 신중하고 침착한 승조를 아주 많이 신뢰했다.

“오늘도 집에 안 들어갈 거야?”

하경을 상사가 아닌 후배로 대해도 되는 시간. 그녀가 먼저 선배라고 불러줄 때뿐이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어요.”

하경은 벌써 5일째 호텔 스위트룸에 머물고 있었다. 도둑이 들어서 집을 한바탕 뒤집어 놓고 갔기 때문이었다. 도어록도 교체하고 보조키도 하나 더 달았지만, 난장판이 돼 있던 광경을 목격한 순간이 문득문득 떠올라 아직도 꺼림칙했다.

“차라리 이사를 하는 게 어때?”

“곧 결혼할 텐데 고작 한 달 반 살겠다고 귀찮은 일을 벌일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한 달 반 동안 호텔에서 지낼 수는 없잖아. 호텔에서 자는 거 싫어하면서.”

하경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호텔 집 딸이 호텔 싫어한다고 소문나면 곤란해요.”

“소문 안 낼게.”

그녀는 도도하고 차가운 이미지였다. 외모도 그렇지만, 성격도 살가운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승조 앞에서는 농담도 제법 하고, 잘 웃었다. 그만큼 그가 편하다는 뜻이었다.

“혼자 가기 찜찜하면 내가 바래다줄까?”

“괜찮아요. 필요하면 부탁할 테니까 오늘은 그만 들어가세요.”

승조는 더 우기지 못했다. 하경이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걸 매우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 내일 보자.”

하경은 그가 방을 나가고 난 뒤, 스케줄러에 약혼식과 결혼식 날짜를 채워 넣었다. 설렘과 떨림은 조금도 없었다. 회의나 출장과 별반 다르지도 않았다. 그녀에게는 이 결혼이 비즈니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 베트남 다낭에 오픈할 호텔의 진척 상황 보고서를 검토하는 것으로 하루 일을 마무리한 하경은 3층에 있는 헬스장으로 내려갔다. 참지 못하고 약을 먹은 덕분에 두통은 많이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머리가 묵직했다. 그래서 30분만 가볍게 뛰고 갈 참이었다. 탈의실에 들어선 순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하경아.]

낯선 남자가 친근하게 제 이름을 부르자, 하경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누구세요?”

[오빠야.]

“누…….”

누구냐고 다시 물으려다가 남자의 정체를 알게 된 그녀가 곧바로 말을 돌렸다.

“아, 민건 오빠.”

손민건, 정략결혼의 상대.

[섭섭하게 오빠 목소리도 못 알아듣는 거야?]

하경은 그에게 이성적 감정이 전혀 없었다. 남편감으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외모도 제법 준수하고, 성격도 서글서글한 편인 데다가 서른셋이라는 나이에 국회의원까지 하고 있으니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조건이었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는 5선 국회의원으로서 현재 여당 당 대표였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친인척 다수가 전, 현직 국회의원이거나 장관 등의 고위 공무원이었다. 하경과 민건은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렇다고 친한 건 아니었다. 아버지들끼리 오랜 친구라 어린 시절에는 가끔 보곤 했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모임이나 결혼식 등에서 몇 년에 한 번 마주치는 정도였다. 그러니 당연히 전화 목소리를 못 알아들을 수밖에.

“통화하는 건 처음이잖아요.”

하경은 민건의 가벼운 농담을 딱딱하게 받아쳤다. 그래도 그가 무안할까 봐 제 번호를 누가 알려줬냐는 말은 참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민건이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바꿨다.

[회장님께 우리 약혼 날짜랑 결혼 날짜 들었어?]

“네, 좀 전에 들었어요.”

[만나서 상의할 게 좀 있는데 혹시 내일 저녁에 시간 괜찮아?]

“8시 이후로는 괜찮아요. 장소 정해서 알려주세요.”

바쁘기도 하고 만나기도 귀찮았지만, 하경은 내색하지 않았다. 아무리 이 결혼을 비즈니스로 생각한다고 해도, 결혼 이야기가 나온 뒤 약혼식 날 처음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오케이. 내일 다시 연락할게.]

두 사람의 첫 통화는 1분도 채 걸리지 않고 끝이 났다. 하경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헬스장으로 나갔다. 밤 9시가 넘은 시각이라서인지 운동하는 사람은 서너 명뿐이었다. 트레드밀을 이용하고 있는 건 키 큰 남자 하나. 그녀는 남자와 멀찍이 떨어진 트레드밀에 자리를 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몸이 좀 풀렸다는 생각이 들어 속도를 올리려는데 갑자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깜짝 놀란 하경이 고개를 휙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트레드밀 위에서 달리고 있던 남자가 서 있었다.

하경의 눈에 의문과 경계가 동시에 떠오른 순간, 남자의 입술이 열렸다.

“나 누군지 모르겠어요?”

하경은 정지 버튼을 누르고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짙은 검은색 머리칼에 대비되는 하얀 피부,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검은 눈동자, 립스틱을 바른 것도 아닐 텐데 붉은 기가 감도는 입술. 곱상한 얼굴과 다르게 탄탄한 몸이 주는 반전 매력까지 갖춘, 매혹적인 남자였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대답은 하나였다.

“네.”

단호하게 대답은 했지만, 하경의 머리는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혹시 연예인?’

그녀는 TV를 거의 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볼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얼굴을 아는 연예인이 극히 드물었다.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는 걸 보면 연예인일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었다.

‘왜 자기처럼 유명한 사람을 못 알아보는 거냐고 따진 건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애쓰고 있던 하경의 귀로 남자의 웃음기 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난 누나 한눈에 알아봤는데.”

누나? 그녀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친동생인 한결 빼고는 자신을 누나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세요?”

상대는 다르지만, 오늘 하루에만 벌써 두 번째 묻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자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하경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의 정체를 알아차린 순간이었다.

“손유현?”

그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나 많이 변했어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못 알아보지?”

유현은 그녀와 두 살 차이 나는 남동생의 친구였다.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하지.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젠데.”

누군지 알고 다시 보니 그는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고 날카로운 눈빛도 여전했다.

“내가 고1, 누나가 고3 때였으니까 벌써 12년이나 되긴 했네.”

하경의 머릿속에 유현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날이 떠올랐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의 문턱에 접어들었던 어느 날. 한결을 만나러 온 그와 집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다. 왜 위험한 걸 타고 다니냐고 훈계할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을 뿐이었다. “나 한 번만 태워주면 안 돼?” “뒷자리에 아무도 태워본 적 없어요.” “싫으면 관두고.” “누가 싫다고 했나?” “태워줄 거야?” “사고 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거 알죠?” “혼자 죽지는 않을 테니까 외롭진 않겠네.” “타요.” 하경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토바이를 타 본 날이었다. 어른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살아온 모범생의 첫 일탈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날의 추억을 잘 갈무리하며 화제를 돌렸다.

“근데 왜 여기 있어?”

“어제부터 14층에 있어요. 며칠 쉬다 가려고요.”

하경이 요 며칠 사용하고 있는 객실도 14층이었다. 그녀는 요즘 자신이 집에 가지 않고 호텔에 머물고 있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았다.

“요새 뭐 해?”

유현이 경찰대학에 수석 입학하고 수석 졸업했다는 것까지는 한결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거기까지가 하경이 아는 전부였다. 대부분의 남매가 그렇듯, 하경과 한결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기에 특별히 유현을 화두로 삼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놀아요.”

“그래?”

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질문을 마무리 지었다. 남의 사생활을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스물아홉이나 먹어서 놀면 어쩌냐고 잔소리할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경찰을 그만뒀구나 추측할 뿐이었다. 이번에는 유현이 그녀에게 물었다.

“누나, 우리 형이랑 결혼한다면서요?”

손민건의 친동생, 손유현. 그는 하경에게 동생의 친구일 뿐만 아니라 예비 시동생이기도 했다.

“어, 그렇게 됐어.”

“…….”

하경은 유현의 침묵이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긍정적인 반응이 아니라는 것까지는 짐작이 갔다. 사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별 상관은 없었다. 딱히 축하를 바라지도 않았다.

“다음 주에 상견례 겸 다 같이 밥 한번 먹기로 했어. 그때 또 보겠다.”

그제야 그가 천천히 말문을 뗐다.

“그 전에도 보게 될 것 같은데.”

“……?”

하경은 유현의 얼굴에 걸린 미소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또 봐요, 누나.”

유현이 눈꼬리를 접으며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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