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3화>
귓가가 빨갛게 달아오르면서 입안에 물기가 서렸다. 카리나는 입술만 달싹였다. 대체 어떤 말로 클로드의 마음에 답할 수 있을까.
하지만 클로드는 카리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굳은살 박인 손이 카리나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겼고, 머리가 조금씩 기울어졌다.
그리고…….
‘……!’
카리나는 눈을 감았다. 몰캉한 감촉과 함께 부드러운 숨결이 밀려들어 왔다. 카리나는 클로드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달뜬 숨이 섞인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카리나.”
한참 후에야 입을 뗀 클로드가 속삭여 왔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해?”
“당신이요.”
카리나가 할 말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당신, 클로드, 내 사랑…….”
귓불에 따끔한 느낌이 나더니, 클로드가 카리나의 목에 그 자신을 파묻었다. 자연스러운 손길이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카리나는 클로드의 손을 부드럽게 쥐어 제지했다.
“여기선 안 돼요.”
“……그럼 어디서 됩니까, 공작 부인?”
클로드의 목소리는 위험하게 느껴질 정도로 낮아져 있었다.
“침대에서요, 공작 각하.”
“다행이군요.”
클로드가 눈가를 휘며 웃었다.
“마침 오늘 침대를 튼튼한 것으로 바꾸었으니.”
* * *
눈부신 햇살이 유리 창문을 타고 쏟아졌다. 카리나는 기지개를 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클로드는 이미 정복을 차려입은 뒤였다.
“오늘 일정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요.”
“없었지.”
클로드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좀 더 같이 있어요.”
카리나가 투정 부리듯 말하자 클로드가 빙긋 웃었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어.”
“왜죠?”
“아이들과 함께 수도로 가려면 일들을 다 미리 처리해야 하니까.”
“……!”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클로드가 수도까지 갈 거라곤 당연히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외곽까지 함께할 줄 알았는데.
클로드가 차분히 그 이유를 설명했다.
“당신과 결혼한 지 벌써 3년째야. 그런데 한 번도 수도 사교계에 정식으로 소개한 적이 없지.”
“그야, 클로드 당신 역시…….”
“그래, 나도 수도에 가지 않았으니까.”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어. 지금 우리 토르스를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고, 옛 친구들도…… 수도에서 나를 부르고 있지.”
“정말인가요?”
카리나는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토르스를 떠났던 가신들이 클로드에게 연락하기 시작했다니, 좋은 소식이었다.
“그들을 데려온다면 큰 힘이 될 거야.”
“한 번 떠난 사람들인데, 토르스로 오려고 할까요?”
카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긴 몰라도 아스트리드의 묘사처럼 화려한 수도 생활을 포기하고 토르스로 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
클로드가 내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수도에 있다 한들 내 힘이 되어 줄 수 없는 건 아니지.”
“그렇겠네요.”
생각해 보니 클로드의 말이 맞았다. 수도에 토르스의 아군이 많이 생긴다면 분명 든든할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수도로 가기도 해야 하고…… 그대도 이제 정식으로 인정받을 때도 되었지.”
클로드가 말하는 ‘정식 인정’은 다름 아닌 황가의 인정이었다. 당연히 카리나와 그의 결혼식에는 황실에서 온 전령도 참석했지만, 전령이 황가의 인정까지 보장해 주지는 못했다.
수도 사교계에 정식으로 데뷔하여 황가는 물론이고 다른 여타 귀족들에게 카리나를 인정받는 것.
그게 클로드가 바라는 일이었다.
“아스트리드는요? 아스트리드의 데뷔탕트도 같이 치러도 되지 않을까요.”
“아스트리드는…….”
클로드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 아이가 벌써부터 구혼을 받게 하고 싶지 않아.”
“아…….”
카리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세계 귀족들에게 데뷔탕트란 다름 아닌 구혼자 물색을 뜻한다는 걸.
아직 열다섯에 불과한 아스트리드가 짊어지기엔 힘든 짐이었다.
“만약 아스트리드에게 구혼할 간 큰 녀석이 있다면 그 아이가 여공작이 된 이후에 구혼하라고 해.”
“……클로드, 몇 살쯤에 죽을 생각이에요?”
클로드의 눈가가 휘어졌다.
“아스트리드가 일찍 결혼하길 바라니 한 십 년 후? 또 과부로 만들게 되어 미안하군, 블로에 부인.”
“클로드!”
카리나는 클로드의 등을 짝 소리가 나게 쳤다. 클로드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스트리드가 어디서 누굴 좋아하든 그건 아스트리드가 알아서 할 일이야. 다만, 데뷔탕트란 이름으로 자연히 일어날 일을 앞당기고 싶진 않은 거지.”
“이해해요.”
카리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아스트리드는…… 너무 일찍 어른이 되었으니까요.”
“글쎄.”
클로드의 목소리에 다시금 장난기가 서렸다.
“그대 앞에선 그 누구보다도 어려지던데?”
“그만큼 제가 편한가 보죠.”
“나는 아직 안 편하고?”
“분발하세요, 데비아탄 씨.”
카리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향했다. 화창한 여름 햇살에 눈이 부셨지만, 그걸 감수할 만큼 창밖에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짙푸른 녹음과 새파란 하늘, 반짝이는 분수대, 그리고…….
“멜리사!”
카리나는 냅다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분수대를 가지고 놀지 말랬지!”
그렇다.
‘분수에서 놀지 말랬지’가 아니고 ‘분수대를 가지고 놀지 말랬지’다.
멜리사는 카리나가 몇 번이나 하지 말라고 말했는데도 분수대를 통째로 들어 올려서 이리저리 조형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물이 분출되는 상황에서.
다행히도 멜리사는 카리나의 말이 들린 즉시 분수대를 원래 위치로 돌려놓았다.
“들어와, 멜리사.”
카리나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귓가에 클로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얘기할까?”
“아뇨.”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같은 마법사로서…….”
“마법사가 아니잖아요? 저나 당신이나.”
“…….”
뼈가 있는 말을 눈치챘는지 클로드는 한 걸음 물러섰다. 대신, 그는 카리나의 볼에 가볍게 입맞춤하며 인사했다.
“그럼 이만 가 볼게. 당분간은 바쁠 거야.”
카리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클로드는 한 번 계획을 세우면 반드시 실행하고야 마는 남자였다. 그녀는 까치발을 하며 클로드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울 거예요.”
“같은 집에 있는데도?”
“당연하죠.”
카리나는 웃었다.
“항상 같이 있고 싶은데, 못 있잖아요.”
“나 역시 마찬가지야.”
클로드는 아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발을 뗐다.
카리나는 그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카리나에게는 여러 역할이 있었다. 클로드의 아내, 공작 부인, 남부의 가신, ‘재능’을 가진 자, 마지막으론 아이들의 엄마.
지금은 그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역할을 할 때였다.
“멜리사.”
“……잘못했어요.”
멜리사는 그녀와 마주치자마자 사과했다. 카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가 정말로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면 같은 일을 몇 번이나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멜리사, 분수대를 가지고 노는 건 위험하다고 말했잖니.”
“……안 위험해요.”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하다는 뜻이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안 위험해요.”
카리나는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서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꿇어앉으니 멜리사의 요동치는 시선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런 거였구나.’
문득 카리나는 깨달았다. 멜리사는 지금 외롭다는 사실을.
항상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던 오빠 롤랜드는 아카데미에 합격하여 정신없이 준비 중이었고, 아스트리드는 이제 어린아이들과 어울려 줄 나이를 지났다.
그리고 자신과 클로드는…….
‘……너무 바쁘긴 했네.’
어쩌면 멜리사의 이런 행동들은 자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멜리사가 손가락을 꼼지락대면서 시선을 회피하자 카리나의 심증은 더더욱 깊어졌다.
그녀는 멜리사와 눈을 똑바로 맞춘 채 입을 열었다.
“멜리사, 분수대를 가지고 노는 게 그렇게 재밌니?”
“네? 아니, 아니에요.”
“그럼 왜 분수대만 가지고 놀려고 하는 거야? 다른 재미있는 놀이가 많은데.”
“……잖아요.”
아이의 작은 입술이 달싹거리더니, 들릴 듯 말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뭐라고?”
“안 놀아 주잖아요!”
카리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역시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 멜리사는 외로워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가 바빠서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사이에.
‘아니, 아니야.’
카리나는 클로드의 말을 떠올렸다. 모든 문제가 그녀 자신에게 있진 않을 거라는 그의 말을.
‘설령 내가 문제라고 해도, 고쳐 나가면 돼.’
그녀는 아이를 조용히 끌어안았다.
“미안해.”
사과는 너무나도 쉽게 흘러나왔다. 그녀 스스로도 정말로 멜리사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앞으론 언제든 멜리사가 놀고 싶으면, 엄마가 같이 놀아 줄게.”
“진짜요?”
멜리사의 눈이 크게 커졌다.
“진짜로요? 아빠랑 같이 있을 때도요? 아스 님이랑 같이 있을 때도…… 아니면, 치체스터 경이랑 같이 있을 때도요?”
“전부 다.”
카리나는 멜리사에게 약속했다.
“이제 롤랜드는 아카데미를 가잖니. 그전까진 당연히 롤랜드를 많이 챙겨 줘야 하지만, 그 후엔 멜리사가 내 일 순위야.”
“……!”
멜리사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작은 손이 카리나의 몸 전체를 둘러 잡고는 꽉 껴안아 왔다.
카리나는 생각했다.
자신은 완벽하지 않다.
그건 아이들과 클로드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럼에도 행복할 수 있으며,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왜냐하면…….
그들은 가족이니까.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