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입양합니다 (142)화 (142/145)

<에필로그>

바람에 휘말린 새하얀 꽃잎들이 햇빛의 파편처럼 반짝였다.

클로드는 그 꽃잎들과 뒤섞여, 자신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는 카리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름답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 한 가지 단어였다.

길게 끌리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카리나는 긴장했는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았지만, 클로드 역시 그랬다.

앞으로 십수 분만 지나면, 카리나는 자신의 아내가 된다.

이 순간 긴장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각하.”

바로 옆에 서 있던 치체스터 경이 헛기침을 했다.

“이제 입장하셔야 합니다.”

그제야 클로드는 악단이 연주를 멈추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입장할 타이밍도 놓쳐버리고 만 것이다.

* * *

“그때 정말 웃겼어요.”

베리티가 쾌활하게 말했다.

“각하께서 그렇게 당황하신 건 처음 봤다니까요!”

“처음이니까, 긴장할 수밖에.”

클로드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베리티가 소리 내어 웃었다.

“블로에 부인…… 아니, 공작 부인께서도 처음이시잖아요. 하지만 아주 완벽하셨는걸요!”

클로드는 확신했다.

분명 카리나가 과부 행세를 하면서 썼던 가명을 끄집어낸 건, 베리티의 작은 심술이라고.

그는 카리나가 너무 아름다워서 잠시 넋을 놓고 있었다는 말은 조용히 삼키기로 했다.

만약 그 말을 입 밖으로 냈다간, 얼마나 더 많은 놀림을 당할지 생각하기도 싫었다.

“어쨌든 축하드려요. 신혼을 핑계로 일찍 빠지시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공작이 결혼식 바로 다음 날부터 일하는 것 자체를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 같다만.”

“저와 에이드리안은 결혼식을 치르자마자 달려와서 일했잖아요!”

“그거야 에이드리안 경과 결혼하자마자 자동적으로 재산을 상속받기 때문이었잖나. 그 재산을 치료소를 위해 투입하기로 한 건 바로 그대들의 결정이었고.”

베리티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거야 그렇지만…… 저희가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한 건 부정할 수 없으실 텐데요.”

“물론,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클로드가 말꼬리를 흐렸다.

“빨리 보내달라고요? 알았습니다, 공작 각하.”

베리티가 눈을 흘겼다.

“어서 가 버리세요. 저와 에이드리안도 즐거운 신혼을 만끽할 테니까요. 그치, 에이드리안?”

“으응, 베리티.”

에이드리안이 꿀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시선은 회의가 시작했을 때부터 베리티에게 고정되어 있었는데, 마치 희귀한 야생초라도 발견한 듯한 눈길이었다.

“고맙다.”

반쯤 방해꾼이 된 느낌까지 받은 클로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연히 한가한 귀족들이 으레 그렇듯 만사 제쳐놓고 휴양지에서 보내는 달콤한 신혼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날마다 밀려드는 격무에 결혼 다음 날마저 일해야 하는 현실이 달갑다는 건 아니었다.

“아이들도 고마워할 거야.”

“공작 부인께서도 고마워하시겠죠.”

베리티가 윙크했다.

한 시간 후.

클로드는 카리나와 아이들의 거처 앞에 도착했다.

공작과 공작 부인은 같은 침실을 썼지만, 생활 공간은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카리나는 정식으로 공작 부인이 되기 전부터 기술자들을 불러 기존의 거처를 새롭게 단장했다.

본디는 전통적인 귀족 부인의 거처였던 공간은 아이들의 교육과 카리나의 연구에 걸맞은 장소가 되었다.

클로드는 그 변화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제 공작저는 카리나와 아이들의 집이기도 했다.

클로드는 공작저가 그들에게 안식처가 되기를 바랐다.

족쇄가 아니라.

“클로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카리나의 밝은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그리고 연이어서 아이들의 발소리가 들렸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카리나는 분홍빛 머리칼에 잘 어울리는 연노랑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한 갈래로 묶은 머리칼이 움직일 때마다 귀엽게 살랑거렸다.

“……클로드?”

클로드는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카리나가 의아해하는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클로드는 잠시 변명을 할까 생각하려다가,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이제는 카리나에게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가 않았다.

“별 것 없어. 너무 예뻐서 잠시 감탄했을 뿐이야.”

“……!”

카리나의 얼굴이 머리카락 색과 똑같은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그, 어서 가요.”

그녀는 아직 넉 달이나 남은 여름이 갑자기 훌쩍 다가온 것처럼 손으로 부채질을 했는데, 아이들을 포함해서 그녀가 왜 그러는지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클로드는 낮게 웃으며 카리나의 손을 잡아챘다.

“그래, 어서 가야지.”

카리나의 손은 따뜻했다.

언제나처럼.

* * *

카리나와 클로드, 그리고 롤랜드와 멜리사는 마차를 타고 서기관이 일하는 기록소에 도착했다.

“소풍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롤랜드가 의아한 얼굴로 카리나를 향해 물었다.

그들은 따뜻한 레몬차와 샌드위치, 딸기 타르트가 든 피크닉 바구니까지 챙긴 상태였다.

“소풍도 가긴 갈 거야. 여기서 잠시 할 일이 있어서.”

“하지만 여기는…….”

멜리사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저희 생일이 생긴 곳이잖아요.”

“생일만 생긴 곳은 아니야.”

카리나가 부드럽게 알려 주었다.

“내가 서류상으로도 너희 엄마가 된 곳이기도 해.”

“……그러네요.”

아이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카리나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자신들을 파양하기 위해 기록소에 온 것이라고 아이들이 오해하고 있을까 봐.

카리나가 그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해서 입을 열 때였다.

롤랜드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우리 진짜 생일을 찾았어요? 그래서 바꾸러 온 거예요?”

“그럴 리가 없잖아.”

멜리사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엄마 때문에 온 거야. 엄마는 이제 토르스 부인이니까, 엄마 이름을 바꾸러 온 거라구.”

카리나는 안도했다. 아무래도 걱정은 기우였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양손으로 아이들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미안한데, 둘 다 틀렸어.”

“……틀렸다구요?”

멜리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는…….”

“나 때문이지.”

그들의 대화를 듣기만 하고 있던 클로드가 불쑥 끼어들었다.

“공작님 때문이라고요?”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클로드가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결혼식만큼이나 이 순간이 긴장되어 보였다.

“너희들의 아빠가 되려고 온 거야.”

“……!”

롤랜드와 멜리사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눈으로 클로드를 바라보다가, 이내 카리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엄마, 진짜예요?”

“진짜야.”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정식 입양 절차를 밟을 필요도 없이 카리나와 클로드의 결혼으로 인해 아이들은 클로드의 자식이 되었다.

동시에 공작가의 후계자가 되었고.

그 문제로 인해 크고 잦은 언쟁이 일어났으니 클로드가 모를 리가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기록소에 보관되어 있는 입양 서류를 고치러 가자면서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그래야 아이들도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거야.’

그 한 마디에 카리나는 클로드의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아이들은 클로드를 아직도 어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도 꼬박꼬박 공작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심지어 결혼식 날마저, 멜리사가 ‘오늘 엄마는 공주님 같아요. 역시 공작님은 공주님이랑 결혼하는 게 맞았어요’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실은, 아주 예전부터 너희들의 아빠가 되고 싶었어.”

“어, 언제부터요?”

“음…….”

클로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예전에 다 같이 여기에 왔을 때 기억나? 그때부터야.”

이번에는 카리나도 놀라고 말았다.

클로드가 이야기하는 때는 카리나가 아이들을 정식으로 입양한 날로, 반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아직 카리나와 클로드가 아무런 사이도 아닐 때.

“클로드.”

카리나가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하며 클로드의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어요.”

“거짓말 아닌데.”

클로드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때도 말하려고 했어. 시기상조일 것 같아서 그만뒀지만.”

“…….”

“왜, 못 믿겠어?”

“……아뇨.”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날, 아이들에게 집중한 탓에 클로드는 자신의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클로드가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럼, 그때부터, 저를…….”

클로드가 쑥스럽게 웃었다.

“들켰네. 꽤나 긴 짝사랑이었어.”

“…….”

카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초록빛 눈이 기쁨을 담고 반짝였다.

클로드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붙들었다.

“갈까요, 토르스 공작 부인.”

“물론이죠, 토르스 공작.”

잠시 후.

기록소 안에서 잠자고 있던 서류 두 장이 햇빛에 드러났다.

각각 롤랜드와 멜리사를 위한 입양 서류들이었다.

이번에는 카리나가 아닌, 클로드가 펜을 들고 빠르게 공백을 채웠다.

썩 쉬운 일이었다.

공백은 단 한 칸뿐이었으니까.

부.

“저번에 채웠어야 했는데.”

클로드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서기관을 향해 서류를 건네주었다.

그는 자신을 계속해서 동그랗게 뜬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롤랜드와 멜리사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다 끝났어.”

롤랜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멜리사는 최근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롤랜드의 뒤에 숨다시피 하며 클로드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공작님이 저희 아빠인 거예요?”

“너희들이 원한다면.”

롤랜드와 멜리사는 대답 대신 클로드의 목에 매달리듯 껴안았다.

클로드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아이들을 꽉 끌어안았다.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전해져 왔다.

“아빠……?”

작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여왔다.

“멜리사.”

“아빠.”

이번에는 좀 더 밝고 확신에 찬 듯한 목소리였고.

“롤랜드.”

클로드는 미소 지었다.

처음부터 아이들이 자신을 신뢰해주리라는 기대는 품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처럼 아이들이 스스로 다가와 준 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카리나가 웃음과 울음이 뒤섞인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마워요.”

카리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클로드는 자신이 카리나에게 더 고맙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그는 아이들에게 그날의 일정을 상기시켰다.

“이제 진짜 소풍 가야지?”

“네!”

아이들은 웃고 떠들며 기록소 밖으로 뛰쳐나갔다. 클로드와 카리나가 그 뒤를 쫓아갔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글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애정이 담긴 두 장의 서류가 남았다.

토르스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보관될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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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랜드]를 입양합니다.

부 [클로드 데비아탄 토르스]

모 [카리나 브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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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사]를 입양합니다.

부 [클로드 데비아탄 토르스]

모 [카리나 브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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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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