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카리나 님, 제 쪽으로 조금만 고개를 돌려주시겠어요? 네, 좋아요. 완벽해요.”
아스트리드의 의상 담당 시녀, 제리아가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에메랄드 귀걸이가 정말 잘 어울리세요.”
카리나는 미소 지었다.
오늘만큼은 마정석 장신구들을 모두 빼놓았다.
버리올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니, 당분간은 편안하게 다닐 생각이었다.
공작 부인이 되는 순간부터 불가능할 평화일 테니.
“아, 머리는 다른 것으로 장식해 주세요.”
카리나는 머리에도 에메랄드 장식을 꽂으려는 제리아를 제지하고, 화장대 위의 작은 보석함을 가리켰다.
“……!”
보석함을 열어 본 제리아의 눈이 커졌다.
영롱한 오팔 머리 장식은 아스트리드가 전대 공작 부인에게 물려받은 것으로, 나이와 어울리지 않아 착용하지는 못했지만 애지중지하던 장신구 중 하나였다.
“공녀님께서는…… 정말로 카리나 님을 좋아하시는 모양이에요.”
“영광이죠.”
카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아스트리드가 자신에게 과분할 정도로 잘 대해 준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상당히 걱정한 것도 사실이었다.
인간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과 오빠의 배우자로 받아들이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니까.
사실 카리나는 자신이 클로드의 약점이 될 게 뻔한 만큼, 아스트리드의 반발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스트리드는 카리나의 예상과 정반대로 반응했다.
‘혹시나 헤어질까 봐 마음 졸였는데, 정말 다행이야. 축하해!’
카리나는 자신과 클로드의 연애를 진작 아스트리드에게 들켰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지만, 아스트리드가 그녀에게 여전히 우호적인 건 좋은 일이었다.
그녀의 생각이라도 읽힌 것일까.
치장을 막 마친 카리나에게 하녀가 아스트리드의 도착을 전했다.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아스트리드 님.”
카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스트리드를 맞이했다.
격식 있는 드레스와 장신구가 불편했지만, 이 모든 게 아스트리드의 호의인 만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스트리드가 우아하게 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 역시 오늘을 위해 완벽하게 단장한 모습이었는데, 카리나의 눈에는 그저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언제까지 아스트리드 님이라고 부를 거야? 그냥 아스트리드라고 불러.”
아스트리드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게 더 편한 걸요.”
“계속 그러면 나도 편하다는 이유로 결혼 후에도 브리튼 양이라고 부를 거야. 아니, 블로에 부인이라고 부를까?”
깜찍한 협박에 카리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아스트리드 님이 불러 준다면요.”
“……!”
아스트리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 그래도 안 돼!”
아스트리드는 마치 사람의 목숨이 걸린 중요한 문제라도 되는 것처럼 카리나가 자신을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 이유를 진지하게 설명했다.
“카리나는 이제 토르스 공작 부인이 되는 거잖아. 그러면 나랑 지위가 같아진다구! 그으, 나는 상관이 없지만…… 카리나가 내게 존칭을 붙이면 모두가 카리나를 깔보게 될 거야.”
“그것도 딱히 상관없긴 한데…….”
멸시를 받아 보았자 공작 부인이다.
하지만 카리나는 아스트리드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신에 대한 멸시는, 곧 클로드에 대한 멸시도 될 테니까.
게다가 아스트리드와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기도 했고.
“알았어, 아스트리드.”
아스트리드의 얼굴이 촛불을 밝힌 것처럼 확 밝아졌다.
“나두, 카리나라고 불러도 돼?”
“당연하지. 그것 말곤 부를 이름도 없잖아?”
아스트리드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공작 부인?”
“에이.”
카리나는 아스트리드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이제 가족인걸.”
“카리나가, 내 가족……!”
아스트리드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카리나가 처음 보는 아스트리드의 천진난만한 모습이라, 꼭 껴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그으, 어서 가자. 공작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셔.”
카리나는 한숨을 삼켰다.
아무래도, 아스트리드가 클로드를 이름으로 부를 날은 요원한 듯했다.
‘차차 나아지겠지.’
카리나는 아스트리드와 클로드의 가족 프로젝트라도 세워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클로드는 그녀를 메인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조금 먼 거리에서 클로드를 먼저 알아본 카리나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클로드는 평소에 입는 활동하기 편하면서도 격식을 차린 옷이 아닌, 공작의 정식 예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토르스 공작가의 예복은 한때 찬란했던 남부의 부를 상징하듯 화려한 보석 장식들이 달려 있었다.
금빛 견장은 또 어떻고.
만약 누군가가 카리나에게 먼저 옷을 따로 보여 주면서, 클로드에게 어울릴 것 같냐고 물었다면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리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것을.
“카리나.”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카리나는 문득 클로드의 목소리가 자신의 귀를 간질이는 것 같아 얼굴을 붉혔다.
아무래도 자신은, 클로드의 얼굴뿐만 아니라 목소리에도 약해져 버린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 생의 자신도 클로드의 얼굴만큼은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던 기억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클로드가 정말로, 잘생겼다는 생각이요.”
클로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게…… 그렇게 오래 생각할 가치가 있는지는 몰랐는데.”
“당연히 있죠.”
카리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클로드가 그녀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느닷없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아무것도 아니야.”
카리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놀려도 상관없어요. 클로드는 그만큼 잘생겼으니까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클로드가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전혀 긴장하지 않은 것 같아서.”
“아…….”
카리나는 신음을 흘렸다.
오늘 자신과 클로드가 이렇게 완벽하게 차려입은 이유는, 치체스터 경의 말에 따르면 ‘꼰대 무리들’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처음 그 표현을 들었을 때, 카리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항상 근엄한 치체스터 경이 쓸 만한 표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들을 꼰대 무리라는 표현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작가의 친척으로 이루어진 그 무리는 한때 상당한 실권을 행사했으나 지금은 밀려난 자들이었다.
“죽다가 살아났는데, 겨우 이런 일로 긴장하겠어요?”
“하기야, 그렇지.”
클로드가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어차피 실권도 없는 자들이니. 그대는 그냥 앉아 있기만 하면 돼. 그렇다고 무례한 말을 곧이 곧이 참고 있을 필요도 없고.”
그때, 날마다 들어도 너무나 반가운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엄마!”
아이들이었다.
카리나는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아이들을 껴안으려다가, 드레스에 잔뜩 붙은 날카로운 장신구들을 생각하고 멈추었다.
“너무 예뻐요……!”
롤랜드가 숨을 들이켰다.
멜리사 역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완전, 공주님 같아.”
“진짜 공주님이지.”
클로드가 수긍했다.
“클로드……!”
카리나는 클로드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클로드는 자제하기는커녕, 더욱 뻔뻔스럽게 말을 이었다.
“소중한 공주님을 내게 맡겨주어서 고맙다. 롤랜드, 멜리사.”
“네에…….”
카리나는 이상한 기류를 눈치챘다.
아이들은 클로드에게 다소 수줍어하면서 반응했다.
‘설마, 클로드와 무슨 일이 있었나?’
나중에 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카리나는 아이들의 손을 잡았다.
“미리 연회장 구경부터 해 볼까? 나중에 엄마는 너희들이랑 따로 떨어져 앉아 있어야 하거든.”
“네!”
아이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 *
안타깝게도 아이들과의 즐거운 시간은 금방 끝나고, 그녀를 공격하려고 찾아온 친척들을 맞이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카리나는 클로드의 곁에 다소곳하게 앉아서 그들을 맞이했다.
클로드의 친척들은 들어올 때마다, 카리나에 대한 흠결을 잡으려는 것처럼 그녀를 세세히 뜯어보았다.
솔직히, 정말로 성가신 시선들이었지만 카리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클로드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이까짓 거쯤이야 참을 수 있었다.
마침내 모두의 입장이 끝나고 연회가 시작되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
클로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들 귀한 시간을 내 주어서 고맙게 생각한다.”
다행스럽게도, 이 무리들은 카리나에 대해서만 적대적인 모양이었다. 곳곳에서 환대에 감사한다는 웅성거림이 일어났으니까.
하지만 호의와 호감이 뒤섞인 부드러운 분위기는, 이어진 클로드의 한마디에 싸늘하게 식고 말았다.
“다들 이렇게 먼 길 오게 만든 이유는…… 내 반려를 소개하기 위해서다. 카리나.”
카리나는 당당하게 미소 지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명백한 적의에 찬 시선들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각하!”
마침내, 적의가 극에 달한 한 사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평민 사생아를 공작 부인으로 삼겠다니…… 지금 저희를 우롱하시는 겁니까?”
카리나는 평정을 유지했다.
저 이름도 모르는 노인이 하는 말은, 렝케 경의 차가운 말들에 비하면 카리나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정부라면 몰라도, 반려라니요.”
클로드의 눈썹이 꿈틀했다.
“미안하지만, 그대처럼 정부에게 전 재산을 내어줄 생각은 없어서. 탄본 경.”
비웃음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아마도 정부에게 전 가산을 탕진한 귀족인 모양이었다.
클로드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그대들에게 억지로 내 결정을 받아들이라고 할 생각은 없다.”
“……!”
사방에 수군거림이 일었다.
이번에는, 제법 희망도 엿보였다.
카리나를 공작 부인으로 인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나 다름없게 들렸기에.
개중 몇몇은 대놓고 카리나의 반응을 확인하려는 듯,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카리나의 마음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녀는 클로드를 믿었다.
클로드가 무얼 말하든, 그녀를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니…… 카리나 브리튼을 공작 부인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자들은 작위와 재산을 반납하고 남부를 떠나도록.”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술렁거렸던 연회장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클로드는 자리에 앉으면서, 카리나에게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냈다.
카리나는 그 모습이 마치, 칭찬해 달라며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롤랜드와 닮은 것 같아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그…… 각하.”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클로드가 그를 향해 거만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서셋 남작.”
“저는 각하의 결정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신체 건강한 여성이시니, 후계자만 잘 생산한다면 그건 공작가의 복입니다. 하지만…….”
서셋 남작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브리튼 양이 입양한 두 아이는, 정리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차피 브리튼 양과 친인척 관계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적당한 가문에 새롭게 입양시키는 것이…….”
“옳소!”
사방에서 동의하는 외침에 카리나의 피가 식었다.
정리라니?
저자들은, 카리나의 아이들을 대체 무엇으로 본다는 말인가?
“입 조심하라, 남작.”
클로드가 차갑게 경고했다.
“말을 할 땐, 그 대가를 생각해야 할 터.”
하지만 연회장의 분위는 더는 걷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노인들은 카리나의 약점이, 아이들이라는 점을 드디어 눈치챈 듯 계속해서 롤랜드와 멜리사를 공격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진 카리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 할 때.
명료한 목소리가 울렸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몰랐네요.”
“……!”
바로, 아스트리드였다.
아스트리드의 목소리는 클로드처럼 차가웠으나, 본연의 우아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각하께서 지금 당장 돌아가시면 다음 공작은 바로 저일 터. 경들께서는 저 역시 내쫓으실 건가요? 선대 공작 각하의 혈통이 아니니까?”
“아, 그, 그게…….”
그 질문에 제대로 답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스트리드의 말에 그렇지 않다고 하자니, 조금 전까지 롤랜드와 멜리사를 공격하는 자신들이 우스워졌고 그렇다고 하자니 공작가에 대한 반역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공작 각하.”
아스트리드가 클로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듣자 하니 참을 수가 없네요. 브리튼 양과 저를 모욕한 자들을 엄하게 다스려 주시기를 간곡히 청합니다.”
“공, 공녀님……!”
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챈 귀족들이 바닥에 엎드릴 기세로 싹싹 빌기 시작했다.
아스트리드뿐만 아니라, 그녀와 아이들에게도.
카리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이들이 바로, 앞으로 그녀에게 반기를 들 인간들의 수준이었다.
“미안하다, 카리나.”
귀족들이 모두 돌아가고 난 이후, 클로드가 그녀에게 사과했다.
“도를 지나친 자들은 모두 남부에서 추방될 거다. 그대와 아이들에게 적대감을 대놓고 표한 자들은 놔두면 골칫거리만 될 테니까.”
그제야 카리나는 깨달았다.
사실, 오늘 자리는 썩은 사과를 골라내기 위한 자리였음을.
그녀와 아이들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은 자들을 합법적으로 쫓아내기 위해선, 공적인 자리에서의 모욕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일이 잘 해결되었음에도, 클로드는 진심으로 안절부절못해 보였다.
“그대가 받았을 상처는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
“괜찮아요.”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는 더한 일들이 많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녀는 클로드를 껴안았다.
“전, 클로드와 함께라면 그 어떤 일이라도 버텨낼 수 있어요.”
“나 역시 그래.”
클로드가 카리나에게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러니, 평생 내 곁에 있어 줘.”
* * *
아몬드꽃이 휘날리는 봄날.
클로드 데비아탄 토르스와 카리나 브리튼은 결혼했다.
롤랜드와 멜리사는 마법으로 꽃가루를 하늘에 수놓았고, 아스트리드는 카리나의 들러리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그들은 가족이 되었다.
평생.
행복하게.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