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균열에서 빠져나온 클로드가 올리버 라크포드를 본 순간.
매서운 눈보라처럼 들끓던 분노가 거대한 폭풍으로 변했다.
‘어떻게, 아직도 어린아이의 모습을…….’
어차피 모두가 올리버의 실체를 안다. 그럼에도 열 살 남짓한 아이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건, 자신의 동정심을 자극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물론, 통할 리 없는 방법이었지만.
겨우 평정을 되찾은 올리버 라크포드가 클로드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뭔가 했더니, 마검사 아니신가.”
목소리 역시 어린아이를 닮았지만 말투는 기이할 정도로 중년 남성과 비슷했다.
‘…….’
클로드는 그런 세부적인 사실들은 무시하려고 노력하면서, 눈앞의 적을 관찰했다.
마법사와의 전투는 그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동안 체스와 부지런히 해온 훈련은 이자를 상대하는 데도 제법 도움이 될 것이다.
‘마법을 미리 예상할 수 있다면 편하지. 하지만 그게 어려울 경우에는…… 마력의 흐름에 따라서 공격을…….’
클로드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올리버의 첫 공격이 그를 덮쳤다.
‘……!’
클로드는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반사적으로 흩뿌린 마정석들은 그의 주변에 결계를 형성했고, 거대한 마정석이 만들어 낸 검이 어느덧 손에 들려 있었다.
그 덕에 올리버가 만들어 낸 시커먼 불길은 그의 머리칼 한 올 태우지 못했다.
마법사가 마법을 시전하고, 새로운 마법을 시전하기까지 짧은 시간이 필요하다.
클로드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푸른 마정석으로 만들어 낸 대검이, 곧바로 올리버의 목을 노렸다.
쾅!
그 검이 올리버의 목을 스치기도 전에.
거대한 폭발이 클로드를 벽 쪽으로 날려버렸다.
‘……체스보다 훨씬 빨라. 강력하고. 절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야.’
하지만 클로드 역시 회복이 빨랐다.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웬만한 검사들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올리버를 향해 몸을 던졌다.
어린아이의 모습이 상대방의 동정심을 자극하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그 움직임에는 한계가 있을 터.
붉은빛과 푸른빛이 명멸했다.
클로드는 검과 더불어 결계를 사용하여 올리버를 구속했다.
이번에는, 목을 노리지 않았다.
쾅!
같은 폭발이 일었다.
마법의 부산물인 희뿌연 연기가 걷히고 올리버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을 때.
너덜너덜해진 그의 오른쪽 다리가 보였다.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몸으로, 올리버는 울부짖었다.
“겨우, 이까짓 것으로, 나를……!”
하지만 클로드는 그의 목소리에 섞인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이자는,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다.
‘보이는 것만큼 마력양이 크지는 않아. 기술과 지식으로 메꾸고 있을 뿐, 단점은 명확해.’
문제는, 클로드의 단점 역시 명확하다는 점이었다.
마정석.
그는 오직 마정석을 이용해서만 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항상 지니고 다니는 마정석들은…….
언젠가는 동이 난다.
클로드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당연히 마정석으로 만든 검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순수한 검술로만 승부한다면…….
‘아니, 그 전에 끝내야 해.’
그는 마음을 굳게 다졌다.
아무리 자신의 일격에 당했다 하더라도, 상대는 대마법사 수준의 마법사다.
만만하게 생각한다면 목숨을 잃는 건 클로드가 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조금 전 다리를 노린 공격이 성공했기 때문에, 이제 올리버는 어디로도 피해지 못하고 클로드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방어 마법에 사용하는 마력이, 더욱더 많아진다는 뜻이었다.
클로드는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올리버가 저 순진해 보이는 얼굴로 무언가 방법을 생각해내기 전에, 지금 취할 수 있는 이득은 모조리 취해야만 했다.
쾅! 쾅! 쾅! 쾅!
올리버가 바닥에 주저앉은 바로 그 지점에서 수십 번의 폭발음이 울렸다.
클로드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그리고 그동안 배워왔던 모든 공격을 마법사에게 가했다.
하지만 올리버 역시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는 않았다.
다리에 입은 것과 같은 치명상을 또다시 입히는 행운은 없었다.
결국 클로드가 가지고 있는 마정석을 모두 썼을 때.
그 자리에 남은 건 고철 더미처럼 수북이 쌓인 부러진 마검들과 가쁜 숨을 내쉬는 두 사람이었다.
‘…….’
두 사람은, 천천히 상대방을 관찰했다.
언뜻 보기에 패자는 올리버였다.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클로드와는 반대로, 몸 전신이 너덜너덜해져서 아찔할 정도의 피를 흘려내고 있었기에.
하지만 클로드에게 더는 남은 마정석이, 남은 마검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챈 순간.
환희가 올리버의 눈에 스쳤다.
동시에 깊은 절망감이 클로드를 짓눌렀다.
마지막 남은 마정석마저도 올리버의 목숨을 빼앗지는 못했다.
올리버에게 남은 마력이 얼마나 있는지는 몰라도, 지금 자신의 상태로는 작은 위력의 마법에도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클로드의 본능은 외쳤다.
올리버 역시 멀쩡한 상태가 아니라고.
단 하나의 마정석만 있으면, 저자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고.
클로드는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텅 빈 마정석들의 자리만큼이나, 그의 마음 또한 공허했다.
“그 위세는 어디 가셨나, 공작 나으리?”
올리버가 대놓고 그를 비웃으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마법을 사용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보나 마나 그의 목숨을 빼앗고도 나을 위력이겠지.
‘…….’
클로드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심장에 가장 가까운 곳에, 마정석이라기보단 증표로 간직해 온 마정석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바로 카리나가 생애 처음으로 만들었던 마정석이었다.
언젠가 카리나에게 즐거운 추억이 될까 싶어 간직했다가, 그 이후엔 클로드 자신에게 추억이 되어 소중히 간직해 왔던 마정석.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그땐 카리나에게 스스로 만든 마정석들을 안겨 주고 싶어 위력이 약하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실은 그 위력만큼은 내로라하는 마정석 광산의 마정석들에 못지않은 카리나의 마정석.
클로드는 마정석을 꺼낸 다음, 손바닥을 펼쳤다.
그의 손을 따라 긴 장검이 만들어졌다.
카리나의 마력을 닮은, 황금빛 검이었다.
바로 다음 순간.
클로드는 공격 마법을 준비하고 있던 올리버가 방어막을 펼치기도 전에, 그의 목을 날렸다.
황금빛 검이 닿는 곳마다 대낮의 작렬하는 태양을 닮은 불길이 화르르 타올랐다.
불길 속.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올리버 라크포드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후회도 분노도 아닌 절망이었다.
* * *
카리나는 어둠 속에서 그저 누워만 있었다.
울음소리와 비명, 소란과 공포가 넘쳐나는 바깥세상과 달리 어둠 속은 그저 평온하고 따스했다.
이것이 죽음이라면, 죽음도 제법 괜찮은…….
‘무슨 소리야!’
카리나 내면에서 작은 소리가 울부짖었다.
평온한 어둠과는 어울리지 않는, 비명에 가까운 울부짖음이었다.
‘나는 살고 싶어!’
카리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바로 그때.
거대한 힘이 그녀를 덮쳐 눌렀다.
<소원은 이루어졌다.>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먹먹한 목소리가 그녀를 지배했다.
<소원은 이루어졌다.>
카리나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는 이제 지나온 일들을 모조리 기억했다.
그래, 자신은 분명 롤랜드와 멜리사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자신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그래서 그런 소원을 빌었었다.
자신은 단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은, 오직 아이들에 관한 소원을.
‘지금은?’
카리나는 자문했다.
지금 자신에게 같은 기회가 온다면, 같은 소원을 빌 텐가?
전혀 아니었다.
카리나는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한번 어둠이 덮쳐왔지만, 그녀는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다.
“나는 살고 싶어.”
카리나는 큰소리로 외쳤다.
그래, 소원은 이루어졌지만 새로운 소원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저번 생과 달리, 멜리사는 살아남았다.
저번 생과 달리, 롤랜드는 렝케 경의 손아귀에서 빨리 탈출했다.
저번 생과 달리, 카리나는 클로드의 진심을 알았다…….
이제 카리나는 멜리사도, 롤랜드도, 클로드도 포기할 수 없었다.
“돌아가고 싶어. 내 아이들에게로, 클로드에게로……!”
그 말이 끝난 순간.
카리나는 거대한 메아리와 함께 환한 빛에 빨려 들어갔다.
<목숨에는 목숨으로.>
그 순간.
카리나는 깨달았다.
목숨까지 바치면서 소원을 빌었던 저번 생의 선택이, 지금의 자신을 살렸음을.
한 번 죽었기 때문에 한 번 살아날 기회가 왔음을.
카리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 보게 될 사랑스러운 얼굴들을 기약하면서.
* * *
“엄마!”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리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신은 푹신하고 호화로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얘들아.”
카리나는 미소 지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은 건강해 보였다.
롤랜드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긴 했지만, 못 본 척해줄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아이들은 당장 침대 위로 기어올라 카리나를 끌어안았다.
아이들의 온기에, 눈물이 확 쏟아질 것 같았다.
그때였다.
“카리나.”
애타는 듯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카리나는 화들짝 놀라 위를 바라보았다.
수척한 모습의 클로드가 그녀를 향해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카리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왠지, 무슨 말이 그의 입에서 따라 나올지 알 것 같아서였다.
“내…… 아내가, 되어 주겠어?”
두 사람의 마음에 비교했을 때 소박하기 그지없는 한 마디였다.
심지어 클로드는 그 흔한 사랑 고백 하나 속삭이지 않았다.
공작가의 가신들이 우르르 몰린 자리에서 하는, 공식적인 청혼이었음에도.
하지만 카리나에게도, 클로드에게도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여태까지 카리나는 모든 걸 걱정했다.
미래에 대해서 신분에 대해서 아이들에 대해서…….
하지만 지금만큼은 카리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네, 네, 네, 네…….”
카리나는 으스러뜨릴 것처럼 자신을 끌어안는 클로드의 품속에서 생각했다.
이젠 그 무엇도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자신에게 남은 삶은, 단 하나 뿐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