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클로드는 축 늘어진 카리나를 안아 올리면서 멜리사를 바라보았다.
“그게, 정말이냐?”
“네.”
멜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그냥 자고 있는 거예요.”
“각하…….”
베리티가 클로드에게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멜리사는 단순히 어린아이답게 엄마가 죽지 않았다는 착각에 빠져 있을 뿐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여태까지 멜리사의 능력을 봐왔다.
그리고…….
설령 멜리사가 단순히 착각한 것이라 해도, 클로드는 이렇게 쉽게 카리나를 포기할 수 없었다.
물론 그가 베리티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분명 베리티는 남부 제일, 아니 제국에서 제일가는 의사였으니까.
하지만 클로드는 이번만큼은 베리티의 판단을 무시하기로 결심했다.
분명, 이성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겨우 마력에 대한 통찰력을 몇 번 보여준 어린아이보다는, 유능한 의사의 말이 옳을 가능성이 더 높을 테니까.
하지만 클로드는 멜리사의 말 한마디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카리나를 포기한다는 건, 곧 그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진짜야. 엄마 살아 있다니까!”
갑자기 멜리사가 롤랜드를 향해 샛된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엄마는 죽었어. 나 때문에 죽은 거야. 내가 저걸……!”
롤랜드는 아직도 시커먼 속을 보여주고 있는 균열을 벌벌 떨리는 손으로 가리켰다.
온통 눈물범벅인 롤랜드는 침착한 멜리사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클로드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분명 카리나는 롤랜드의 저런 모습을 보면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카리나가 가슴 아픈 일은…….
클로드 역시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롤랜드, 멜리사.”
클로드는 두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부드럽게. 마치 카리나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
두 아이는 즉각 그를 바라보았다.
“너희 어머니는…… 살아 계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너희 어머니’ 라는 카리나에 대한 지칭은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클로드에게 카리나는 언제까지나 카리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지금, 엄마를 잃고 비통해하는 아이들에게 괜히 자신과 카리나의 관계를 강조할 생각은 없었다.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겠어. 그리고…… 저것도 해결해야겠구나.”
클로드는 카리나를 자신의 침실로 옮겼다. 전 공작저에서 가장 방어막이 삼엄한 곳으로.
그는 베리티에게 카리나를 잘 지켜보라고 당부한 다음, 믿을 수 있는 호위 기사 몇몇에게 목숨을 걸고 카리나를 지키라고 명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 모두 카리나의 계획으로 인해 토르스의 기사가 되었기 때문에, 은혜를 갚을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으려 했다.
“제 생명보다 더 소중히 지키겠습니다.”
“……그 말, 잊지 않겠다.”
카리나가 공작 부인이 된다면 그녀를 보필할 기사들도 필요하다.
지금 클로드의 눈앞에서 충성심을 증명한 기사들은 분명 카리나를 성심성의껏 지킬 것이다.
클로드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침실에서 벗어났다.
카리나의 곁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시간이 없었다.
비록 롤랜드를 따라다니는 균열은 더는 마물의 소요가 느껴지지 않고 잠잠해졌다고는 하나, 체스에 따르면 저 마법을 일으킨 자가 따로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자는 저 균열을 이용하여 언제든 롤랜드를 공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고.
클로드의 머릿속에 떠오른 마법사는 단 하나였다.
‘올리버 라크포드……!’
그자를 붙잡아 산채로 조각내어야, 지금 자신의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을 듯했다.
클로드는 빠른 걸음으로 아이들과 체스가 균열을 연구하고 있는 방에 도달했다.
“각하!”
체스가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는데,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했고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클로드는 체스의 상태를 살필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든 건 오직 두 가지. 카리나의 안위와 올리버의 죽음이었다.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진짜, 딱 때맞춰 오셨어요. 막…… 균열이…….”
클로드는 롤랜드의 곁에서 균열의 모습을 발견했다.
‘……?’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롤랜드의 곁에 있는 텅 빈 공간은, 더는 검은 어둠이 도사리는 균열이 아니었다.
오히려 유리로 된 길쭉한 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저게 아까 봤던 그 균열이라고?”
“예.”
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바꾸었을 뿐입니다. 반대편이…… 심연이 아니라, 시전자의 위치가 되도록.”
“……!”
클로드의 눈이 커졌다.
시전자라면 분명 올리버 라크포드일 터.
“어떻게 가능했지?”
체스가 자랑스레 대답했다.
“당연히 제가 유능해서죠.”
“……농담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으니, 제대로 답해.”
체스는 눈알을 굴렸다.
“각하, 너무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 아니에요? 멜리사의 말이 맞을 텐데. 브리튼 양은 그냥 자고 있을 거라고요.”
“너…… 뭐라고.”
클로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모두 멜리사의 말을 믿은 자신을 미친 사람 보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 체스 또한 멜리사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 같았다.
체스가 아이들을 향해 고갯짓했다.
“각하, 이제 저는 저 아이들이 해가 서쪽에서 떠오른다고 해도 믿을 겁니다.”
“……!”
“길은 멜리사가 발견했어요. 기술적인 부분들은 모두 롤랜드가 처리했고요. 저는…… 안전망 정도?”
체스는 자조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어린 천재들의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줬다는 사실이, 퍽 자랑스러운 듯했다.
“그러니까, 저 사악한 마법을 쓴 자가 누구든 간에 그의 곁엔 롤랜드와 같은 균열이 따라다닐 것이란 말이죠. 이제 곁에 시커먼 균열을 달고 다니는 자를 수소문하기만 하면…….”
클로드는 더는 체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나 시간이 오래 걸릴 방법을 쓸 생각은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 역시 범상치 않는 마법사.
대응책을 얼마든지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
클로드는 전사가 아니었다.
그의 소임은 영지를 가꾸고 다스리는 것이었고, 대대로 받은 능력은 대장장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타고난 본능은…….
저 심연으로 뛰어들어, 적을 기습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클로드는 망설임 없이 균열로 다가갔다.
뛰어들기 직전.
“……아빠!”
라는 소리가 들린 건, 아마도 환청이었을 것이다.
* * *
“빌어먹을!”
버리올은 바닥을 냅다 발로 찼다.
시커먼 균열은 아무런 변화 없이, 거대한 눈알처럼 그를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순순히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반격이 이렇게나 빠를 줄이야.
아무래도 공작가에는 유능한 마법사가 있는 듯했다.
혹은, 재빨리 다른 곳에서 공수했거나.
어쨌든 그를 바로 공격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균열을 역으로 이용하는 정도에 불과한 걸 보니 아주 실력이 뛰어난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위안이었다.
버리올은 이를 까득 갈았다.
‘그 공작만 아니었더라도……!’
토르스의 공작.
시간을 거슬러 되돌아오기 전에도, 그는 상당히 거슬리는 존재였다.
사사건건 롤랜드와 부딪혔기 때문에 고마울 때도 있었으나, 정작 버리올이 롤랜드에게 회심의 일격을 가하려고 하면 훼방을 놓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무력으로도 웬만한 대마법사에 대적할 수 있는 경지.
비록 지금은 그 수준은 아니겠으나, 상당한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만약 마검의 능력을 지닌 그자만 아니었더라면 버리올은 진작 공작저에 침입해 그 신경 거슬리는 꼬맹이들의 목숨을 끊어놓았을 것이다.
쿵.
버리올의 몸이, 일순간 뻣뻣하게 굳었다.
쿵.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둔탁한 걸음 소리가, 균열 저 아래로부터 울려 퍼지고 있었다.
버리올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만약, 공작가의 마법사들이 심연 속 악마들마저 그를 공격하게끔 만들 방법을 발견했다면……!
자신은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버리올이 아무리 뒷걸음질 치고 도망쳐도, 균열은 그가 달아나는 속도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그를 따라잡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버리올이 균열에서 도망치는 것조차 포기하고 주저앉았을 때.
균열 속에서 한 인영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