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아니, 환상은 맞을까.
카리나는 더는 확신할 수 없었다.
눈앞의 광경들은…….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녀 자신의 기억 같았다.
하지만 카리나가 충격을 미쳐 수습할 시간도 없이 환상은 빠르게 흘러갔다.
롤랜드의 자서전을 완성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어린 남매가 렝케의 저택에 도착한 이후부터는 카리나와 롤랜드의 의견이 갈렸기 때문이었다.
롤랜드는 카리나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만 넣고 싶어 했으나 카리나는 극도로 자신에 대한 노출을 꺼렸다.
다행히 롤랜드는 고집을 꺾고 결국엔 카리나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마침내 자서전이 완성된 이후.
롤랜드와 카리나는 크나큰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롤랜드 님, 저희는 정말로 롤랜드 님의 자서전을 출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본디 그들과 친분이 있었던 출판사 사장은 난색을 표했다.
“지금 쓰신 이런 내용으로는 출간이 어렵습니다.”
카리나가 조용히 반박했다.
“롤랜드 블로에의 자서전이라고 하면 누구나 사 볼 텐데요.”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놀랍게도, 출판사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초판은 불티나게 팔려 나갈 겁니다. 하지만 이 내용들이……. 롤랜드 님, 이 글을 읽고 제국민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 모르시겠습니까?”
“…….”
“사람들은 분노할 겁니다. 반란이 일어날 거라고요.”
“……그런 의도로 쓴 건 아니었습니다.”
“압니다.”
사장이 어깨를 아래로 힘없이 늘어뜨렸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저 역시 분노하게 되는 것을…….”
카리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롤랜드의 자서전은 결코 출간되지 않을 것이다.
고위 귀족과 황실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 때문에.
물론 수정한다면야 가능하겠지만, 롤랜드는 그런 타협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미안해요, 카리나.”
돌아오는 길에, 롤랜드는 카리나에게 진지하게 사과했다.
“카리나가 그동안 정말로 고생했었는데…….”
“괜찮아요.”
카리나는 미소 지었다.
“저도, 완성하고 싶었는걸요. 꼭 출간을 위해서는 아니었어요.”
빈말이 아니었다.
카리나는 자신이 쓴 자서전 원고를 읽고 또 읽었다.
과거의 일들을 잊어버리고 싶지가 않아서.
특히, 그녀가 구하지 못한 두 어린아이를 결코 잊고 싶지 않았기에.
시간이 흘렀다.
롤랜드는 한층 지치고 약해진 모습이었다.
카리나는 충격에 휩싸여 롤랜드를 바라보았다.
“……버리올을 막아야 해요.”
벽에 기대앉은 롤랜드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바닥엔 검은 피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남의 피일 거야.’
카리나는 공포에 질려 생각했지만 롤랜드의 목소리는, 분명 죽어가는 자의 것이었다.
“버리올의 마법이 성공하면…… 그자가 전 세상을 지배하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도련님”
기억 속 카리나가 롤랜드의 손을 쥐었다.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롤랜드가 힘없이 웃었다.
“미안해요, 카리나.”
롤랜드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게 끝이었다.
카리나는 울부짖었다.
이렇게는 아니었다. 롤랜드는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되었다. 단 한 번도 행복해진 적이 없는 채……!
기억 속 카리나는 죽은 롤랜드를 바닥에 고이 눕히고는, 일어섰다.
얼마나 지났을까.
길고 어두운 통로를 한참 동안 걸은 이후.
밝은 빛이 카리나를 덮쳤다.
“늦었군.”
비아냥거리는 한마디가 카리나의 귀를 스쳤다.
아니.
카리나는 생각했다.
저건 비아냥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은 자의, 환희에 찬 목소리였다.
빛 속으로 들어가자, 새하얀 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마법식이 보였다.
그리고 그 바닥의 중심에는…….
버리올이 있었다.
‘……어?’
카리나는 자신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마정석이었다.
카리나는 마정석을 꽉 움켜쥐었다.
‘할 수 있어.’
마정석의 발동만큼은 뼈를 깎는 노력 끝에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켠 다음 마정석을 냅다 버리올을 향해 집어 던졌다.
버리올의 얼굴이 고양감에 달아올랐다.
“겨우 이까짓 것으로 나를 막으려 하다니. 나는……!”
버리올은 자신의 말을 끝내지 못했다. 마법식 전체가 붉게 달아올라, 그를 집어삼켰기 때문이었다.
“안 돼!”
카리나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조금 전과 같은 모습을 몇 번이고 봐 왔다. 마법식이 제대로 발동하는 모습을……!
카리나는 허겁지겁 마법식을 향해 달려갔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의기양양하게 노려보던 버리올은 온데간데없었다.
‘아.’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마정석이 평범한 돌처럼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분명히 마정석의 발동을 열심히 연습했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제대로 발동시키지 못한 것이다.
카리나는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결국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
롤랜드가 죽음까지 불사하며 막으려 했던 버리올의 마법식마저, 눈앞에서 멀쩡히 발동하는 걸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때였다.
마정석이 빛을 발한 건.
‘왜? 왜 지금?’
카리나는 멍하니 마정석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차피 버리올을 막기 위한 마정석이었다.
지금 발동한다 한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마정석은 야속하게도 본디의 주인, 롤랜드가 의도한 마법을 카리나의 눈앞에서 터뜨렸다.
바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었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생명이 사라진 카리나의 몸이 마법식 위로 줄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쓰러졌다.
카리나의 인생은, 그렇게 끝났다.
* * *
<네 소원이 무엇이지?>
카리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깜박였다. 분명 자신은 죽었다.
그것도 버리올을 죽이기 위한 마법에 의해, 허무하게.
<네 소원이 무엇이지?>
사람의 것 같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를 향해 다시금 물었다.
이곳이 어딘지, 어쩌다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기력도 없었던 카리나는 질문에 대한 대답만을 멍하니 생각했다.
‘내가, 내가 원하는 건…….’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롤랜드와, 멜리사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 자신에게도 너무나 허무하게 울렸다.
롤랜드는 죽었다. 멜리사는 그보다 훨씬 전에 죽었고.
둘 모두, 카리나가 지키지 못한 아이들이었다.
이미 죽은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다니.
카리나 자신이 생각하기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소원이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이, 너무나 달콤했기에.
“다시…… 다시 기회가 있다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카리나는 의식을 잃었다.
다시 깨어났을 땐…….
카리나는 더는 자신이 잘 아는 세계에 있지 않았다.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새로운 세상은 너무나 달콤했다.
카리나를 사랑하는 가족과 그동안 감히 상상하지도 못한 다채로운 문물들까지.
하지만 카리나는 그 와중에서도 전생을 잊어버리지 않으려 애썼다.
롤랜드와 멜리사를 잊어버리는 순간, 자신이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한 죄마저 잊어버릴 것 같아서.
그래서 갓 태어난 카리나는 계속해서 자신이 썼던 자서전의 글귀들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직접 손으로 쓰고, 수십 번을 읽어보며 다듬었던 자서전이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때.
어느덧 전생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고, 카리나에게 남은 것은 한때 그런 내용의 책을 읽은 것 같다는 느낌뿐이었다.
마침내 새로운 세계에서의 수명이 다하고 평화롭게 잠들었을 때.
카리나는 깨어났다.
전생의 희미한 기억과 함께.
* * *
“카리나……!”
클로드는 비명을 지르듯 카리나의 이름을 토해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심연 속으로 뛰어들었던 카리나처럼, 그 역시 카리나를 향해 즉각 뛰어내렸다.
금방 되찾아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저 심연 속에 무엇이 도사리든 간에, 그의 마검술을 버티지는 못할 것이기에.
하지만 이내 그의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카리나는 심연 속 마물들을 모조리 그녀 자신에게 달려들도록 유인했다.
‘왜……?’
클로드는 새까맣게 달라붙어 오는 마물들을 베어내면서 생각했다.
이 싸움이 끝나면, 반드시 그 이유를 추궁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하지만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그의 품에 안긴 카리나의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각하, 이미…… 늦은 것 같습니다.”
뒤늦게 달려온 베리티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로드는 멍하니 베리티를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카리나는 이렇게 간단하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겨우 사악한 마술 따위에 목숨을 빼앗길 사람 역시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현명하고 바르며 강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때였다.
멜리사가 카리나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아무도 아이를 말리지 않았기 때문에 멜리사는 카리나의 몸에 손쉽게 도달했다.
잠시 후.
아이의 명료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안 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