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입양합니다 (137)화 (137/145)

<137화>

“안 됩니다.”

카리나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 누구의 방문도 허락하지 말라고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거야 두고 볼 일이지.”

클로드는 코웃음을 치더니, 카리나를 완전히 무시하듯 지나쳐 그녀 뒤의 벽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카리나의 움직임은 빨랐다.

그녀는 몸을 던져 클로드를 막아섰다.

쿵!

클로드는 카리나를 피하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둘은 작은 충돌을 일으켰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카리나의 몸이 그대로 클로드의 위로 엎어졌다.

“…….”

침묵이 흘렀다.

카리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번에는 아예 문 쪽으로 바싹 붙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클로드는 조금 전처럼 강압적으로 그녀를 밀치고 들어오는 일은 하지 않았다.

“……멍이 들었다.”

카리나의 시선이 아래로 움직였다. 발목에 흉측한 멍이 나 있었다.

“걸어봐.”

“싫습니다.”

“왜지?”

“제가 걸으면, 들어오실 테니까요.”

“안 갈게.”

클로드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안 들어갈 테니, 걸어봐.”

“…….”

카리나가 말없이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으윽……!”

절제된 비명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카리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쳤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툭.

무언가가 그녀의 옆에 떨어졌다.

들어 올려 보니 약병이었다.

“발라라.”

퉁명스러운 목소리.

환상 속 카리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제 상처는 제가 알아서 합니다.”

“그 상태로는 나를 막아서지도 못할 텐데?”

카리나는 그 말에 발끈한 듯했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은 듯했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약이라는 보장도 없잖아요.”

“내가 독약 같은 걸 가지고 다닐 사람처럼 보이나?”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토르스의 젊은 공작께서는…… 인재를 얻기 위해서라면 살인도 불사하는 분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던걸요.”

“…….”

클로드는 말없이 움직였다.

그는 카리나의 손에서 약병을 잡아채어, 뚜껑을 열고 조금 전 생채기가 난 손등에 약을 펴 발랐다.

“됐지?”

여전히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는 카리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무릎을 꿇어 그녀의 발목을 쥐었다.

“……!”

카리나는 몸을 빼내려 했지만 클로드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약병에서 약을 듬뿍 꺼내어 발목에 덕지덕지 바르는 게 아닌가.

“남부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가 만든 약이야. 영광인 줄 알도록.”

“……감사합니다.”

마지못한 대답이었으나, 카리나의 숨소리는 더 이상 고통에 차 있지 않았다.

그녀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공작 각하를 오해했군요. 사죄드립니다.”

“사죄할 것 까지야.”

클로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소문이 이렇게 외진 곳까지 퍼져 있다니 놀랍군.”

“그럼, 잘못된 소문들인 건가요? 아니면 부풀려진……?”

“아니.”

클로드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사람이 죽은 건 맞다.”

“…….”

카리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로 그 순간.

클로드가 그녀를 부드럽게 밀쳤다.

“……!”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클로드는 성큼 걸어 문을 잡아당겼다.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 당연히 막아뒀겠지.”

카리나는 클로드에게로 다가가려 했지만 투명한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미안.”

클로드가 가볍게 사과했다.

“하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롤랜드 블로에를 만나야겠거든.”

환영이 바뀌었다.

롤랜드와 카리나는 몇 번이나 클로드와 부딪쳤다.

환영이 바뀌었다.

클로드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카리나, 내 가신이 되어 주겠어?”

카리나가 뒷걸음질쳤다.

크게 떠진 눈이 경악에 차 흔들렸다.

“어…… 어떻게…….”

클로드가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었다. 카리나가 잘 아는 미소였지만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는데, 지금 이 클로드는 카리나의 클로드보다 훨씬 많은 풍파를 지나왔기 때문인 듯했다.

“그대는 겨우 롤랜드 블로에의 유모 노릇을 하기에 너무 아까워. 내가 그대를 롤랜드 못지않은 대마법사로 키워주지.”

카리나는 환상 속 자기 자신이 크게 갈등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주름진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미, 너무 늦었어요. 저는……!”

“그럴 리가.”

클로드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뒷조사를 좀 해 보았지. 렝케 브리튼의 고문 후유증 탓에 머리가 하얗게 세었을 뿐, 아직 살 날이 나보다 많던데?”

“…….”

카리나는 눈을 꽉 감고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전…… 전…… 도련님을 떠날 수 없어요.”

“……역시 그렇군.”

“다시는, 제 앞에 나타나지 말아주세요.”

클로드는 서글픈 얼굴로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돌리고 사라졌다.

카리나는 환상 속 자신이 고통스러워하면서 흘리는 눈물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아.

첫사랑이었다.

환상은 바뀌고 또 바뀌었다.

카리나는 환상들에서 어느덧 클로드를 찾는 자신을 깨달았다.

하지만 클로드는 정말로 그 뒤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 풍문으로 남부의 공작이 드디어 완전히 미쳐버렸다는 이야기가 들려올 뿐이었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덧 소설의 결말부에 가까워졌다.

“난, 대체 뭘 위해 살아왔지?”

롤랜드가 토해내듯 중얼거렸다.

카리나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다른 누가 들으라고 한 소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굳이 정의하자면, 세상에 대한 부르짖음에 가까웠다.

“…….”

카리나는 당장 롤랜드를 끌어안아 토닥거려 주고 싶었지만, 환상 속 카리나는 그 흔한 위로의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단지, 그 곁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을 뿐이었다.

롤랜드와 마찬가지로, 텅 비어버린 시선으로.

‘곧 환상이 끝나겠구나.’

하지만 카리나의 예상과는 달리, 환상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녀가 기억하는 소설의 결말부를 훌쩍 뛰어넘어서, 롤랜드가 어엿한 청년이 되었을 무렵까지.

“카리나, 자서전을 써 볼까 생각중이에요.”

“자서전이요?”

“네.”

롤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서요. 멜리사도, 렝케도…….”

“…….”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카리나가 제 자서전을 써 줬으면 좋겠어요.”

“제가요? 도련님의?”

카리나는 놀라 되물었다.

“카리나는 글을 정말 잘 쓰잖아요. 저보다도 훨씬 더.”

롤랜드는 웃으며 덧붙였다.

“저는 진짜 악필이라서, 출판사에서 인쇄도 안 시켜주려 할 걸요?”

“……한 번 해 볼게요.”

환상들은 그녀와 롤랜드가 머리를 부여잡고 자서전을 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에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쳤는데, 바로 잉크였다.

당시 그들이 함께 지내던 북부는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렸고, 수요가 많은 검은색 잉크는 돈이 있어도 살 수가 없었다.

결국 카리나는 붉은색과 푸른색 잉크를 쓸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초고니까 상관없다고 애써 위안하면서.

“다 준비됐어요.”

카리나는 깃펜을 힘주어 쥐고는, 롤랜드를 바라보았다.

롤랜드는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달싹이는 입술만 보일 뿐, 말은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카리나는 잠자코 그를 기다려 주었다.

“……제가, 기억하는 제일 어린 시절부터 시작할게요. 아마 다섯 살이었을 거에요. 저는 멜리사와 함께 불을 가지고 놀았어요…….”

카리나는 잠자코 그의 말을 푸른색 잉크로 받아 적었다.

「롤랜드 블로에의 생애 첫 기억은 여동생, 멜리사와 함께 불을 가지고 노는 자신이었다.」

그 푸른색 글씨를 본 순간, 카리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환상 속 카리나가 방금 쓴 문장은 전생에 읽은 소설의 첫 문장이었고, 푸른색 글씨는 때때로 자신의 시야에 떠오르던 글자들과 정확히 같은 모양이었기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