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입양합니다 (136)화 (136/145)

<136화>

카리나는 다가올 고통에 대비하면서 눈을 꽉 감았다.

‘어……?’

예상했던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카리나는 멍하니 손을 휘저어보았다.

오직 어둠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이건…….’

피가 식었다.

카리나는 곧바로 상황을 알아차렸다.

마물들이 흥미 자체를 잃은 모양이었다.

자신은 버리올이 제물로 각인시킨 롤랜드도, 강력한 대마법사도 아니었으니까.

심연의 마물들은 곧 롤랜드를 향해 몰려갈 것이다.

당장, 카리나가 무슨 수를 쓰지 않으면!

‘안 돼!’

카리나는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판단을 내리는 그 시간조차 사치로 느껴졌다.

카리나는 숨을 들이켰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한 가지 뿐이었다.

폭발 마법.

제아무리 심연의 마물들이라고 할지라도 강력하고 제어할 수 없는 폭발 마법에는 갈기갈기 찢길 것이다.

어쩌면, 그녀 자신까지도.

하지만 카리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가 나서지 않으면 롤랜드가 심연으로 끌려갈 테니까.

쾅!

폭발음이 일었다.

푸른 불꽃들이 카리나의 눈앞에서 튀었다.

카리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걸로는 부족해.’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위력적인 공격 마법을 몇 가지 익혀두었다.

일부러 익혀두었다기보다는, 멜리사와 롤랜드의 훈련을 지켜보다 보니 자연히 익힌 쪽에 가까웠다.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마법들이었지만 카리나는 실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불사르고 갈기갈기 찢고 충격을 가하는 마법들이 카리나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일제히 일었다.

카리나는 마물들이 정확히 어디에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무작정 공격했다.

사실, 처음이 어려웠지 나머지는 쉬웠다.

카리나는 자신이 사용한 마법들이 고삐를 벗긴은 야생마처럼 질주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정석을 만들어내는 훈련 덕분인지 그렇지 않아도 거대한 그녀의 마력은 더욱더 거대해져 있었다.

자그마치 일여 년 만에 사용한 마법은…….

강력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감상에 잠길 여유 따윈 없었다.

“아아악!”

카리나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드디어, 악마들이 그녀의 존재를 발견한 것이다.

온몸이 터져나가는 듯한 고통이 카리나를 갈가리 찢어발겼다.

만약 카리나가 평범한 마법사였더라면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공격 마법을 멈추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리나는 마법사가 아니었고, 그녀의 마법은 더더욱 평범하지 않았다.

카리나의 마법은 그녀의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마물들을 공격했다.

카리나는 눈을 감았다.

언제까지 자신의 마법이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목숨은 의외로 질기다.

이것들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해도 롤랜드에게 시간을 벌어다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카리나!”

카리나의 눈이 경악에 질려 크게 떠졌다.

망막에 맺힌 것은 어둠뿐이요, 느껴지는 건 고통뿐이었지만 카리나는 확신했다.

조금 전.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큰 소릴 불렀다.

아니, 누군가가 아니었다.

카리나가 잘 아는 남자였다.

절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카리나는 그의 이름을 외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순간.

마지막 불꽃을 모두 토해낸 그녀의 의식은 차가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기에.

* * *

“청소해.”

냉엄한 목소리.

카리나가 평생 잊을 수가 없는 냉혈한의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뭘 멍하니 있는 거지?”

다시금 그 목소리가 카리나를 재촉했다.

“어서 움직여.”

“……네.”

카리나의 혀가 저절로 움직였다.

무심코 들어 올린 시선엔 이미 죽어 없어진 사람이 들어왔다.

렝케 브리튼.

한때 그녀와 아이들의 인생을 쥐고 흔들던 남자.

그가 고개를 거만하게 까닥이며 오른쪽을 가리켰다.

당장 가서 치우라는 뜻이었다.

‘헛것이구나.’

카리나는 한숨을 내쉬고 싶었다.

아무래도 고통이 극에 달한 나머지, 웬 괴상한 환영을 보게 된 모양이었다.

“총 세 마리다. 사체는 불을 살라서 처리하도록.”

“불사르라고요?”

잠깐.

카리나는 경황이 없는 와중에서도 생각했다.

그녀는 분명 이 대화를 렝케와 한 적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언제인지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롤랜드와 멜리사를 만나기 전이었다.

그날 렝케가 죽인 불쌍한 실험체들을 불에 태우며 몇 번이나 구역질을 했는지 모른다.

‘과거…… 과거를 보는 거야.’

문득 어디선가 들은 사실이 떠올랐다.

사람은 죽기 직전, 자신의 과거를 빠르게 보게 된다고.

카리나의 추측을 입증하듯, 렝케의 환상은 사라지고 새로운 환영이 나타났다.

“멜리사가…… 멜리사가 숨을 쉬지 않아요. 멜리사를 살려주세요……!”

축 늘어진 멜리사를 품에 안고, 롤랜드가 울부짖었다.

‘어……?’

카리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당연히 이런 적은 없었다.

아무리 렝케가 멜리사를 괴롭혔다 한들 아이의 숨이 멈출 정도로 과했던 적은 단 한 번도…….

“롤랜드.”

싸늘한 음성이 카리나의 생각을 끊었다.

“네 동생이 저렇게 된 게 누구 탓이라고 생각하느냐?”

“…….”

롤랜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는 멜리사를 꽉 붙들어 안고서, 렝케를 노려다 보았다.

카리나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롤랜드가 이렇게 키가 컸던가……?’

분명 좀 전에 보았던 롤랜드보다 한 뼘은 더 커 보였다.

반면 멜리사는, 가장 밥을 못 먹었을 때보다도 더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고.

“내가 알려주마.”

렝케가 코웃음을 쳤다.

“바로 너다. 너 때문에 네 여동생이 죽었어, 롤랜드 블로에.”

“……!”

카리나는 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렝케는 단 한 번도 저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당연했다.

멜리사가 실제로 죽은 적이 없었으니.

카리나는 깨달았다.

이건…….

책 속의 롤랜드와, 멜리사였다.

그녀가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닥쳐왔을 미래이기도 한.

다시금 환영은 바뀌었다.

이번에는 제법 성장한 롤랜드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카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소설의 어느 지점인지, 알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가요, 카리나.”

카리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전 여기 남아 있어야 해요.”

마치 노인처럼 쉰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왜요? 카리나도 이 집을 싫어했잖아요!”

“도련님.”

카리나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전 도련님께 방해만 될 거예요. 저처럼 약하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걸 데려가시면 짐만…….”

“카리나가 어떻게 짐이에요?”

롤랜드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목소리로 카리나에게 되물었다.

순간, 성인에 가까운 나이의 롤랜드가 어린 소년으로 보였다.

‘아.’

카리나는 깨달았다.

이 롤랜드는…….

소설 속 롤랜드나, 그녀가 아는 롤랜드가 아니라고 치부하고 넘길 수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니었다.

눈앞의 롤랜드 역시 카리나가 잘 아는 롤랜드였다.

너무나 착하고 여린, 그래서 결코 남을 해칠 아이가 아닌…….

다시 환영이 바뀌었다.

카리나는 롤랜드의 적에게 인질로 붙잡혀, 그의 짐이 되기만 했다.

또다시 환영이 바뀌었다.

카리나는 롤랜드가 그를 이용하기 위해 달라붙는 세력들에 점점 피폐해지는 모습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한번 더, 환영이 바뀌었다.

“……!”

카리나는 숨을 들이 삼켰다.

눈앞에 나타난 남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였기 때문이었다.

헝클어진 은발.

그 근원을 짐작할 수 없는 분노로 불타오르는 푸른 눈.

지나온 세월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거친 피부와 뺨에 난 흉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리나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미남자.

클로드 데비아탄 토르스가, 그녀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비켜라.”

그녀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차가운 목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나는 롤랜드 블로에를 만나러 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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