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롤랜드는 푹신한 깃털 이불을 부여잡고 몸을 도르르 말았다.
따갑게 내리쬐는 아침 햇살 덕에 일어나야 할 시간이라는 걸 알았지만, 포근한 이불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연습…… 연습을 해야 해.’
롤랜드는 이불을 꼬옥 쥐고 몸을 일으켰다.
이제 자신은 꺼려지는 공격 마법을 굳이 연습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대신, 롤랜드는 방어 마법을 몇 배는 더 열심히 연습했다.
공격보다 더욱 효과적인 방어 마법을 사용해 멜리사와 카리나를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쿵.
롤랜드는 반쯤 바닥에 몸을 떨어트리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
롤랜드의 새파란 눈이 크게 질렸다.
무언가, 이상한 것이 자신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카펫 위에 나타나 있었다.
시커먼 균열.
단순히 색이 어두운 것이 아닌, 그 깊이를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 심연의 색을 드러낸 균열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입안이 바싹 마르고 소름이 우두두 돋았다.
롤랜드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치다가 침대에 부딪히고 말았다.
“엄……!”
롤랜드는 자신의 입을 억지로 틀어막았다. 자신이 지켜야 할 엄마를 불러서, 어쩌자는 것인가.
‘그렇다고 멜리사를 부를 수는 없어.’
롤랜드는 고개를 떨구었다.
멜리사는 이 균열을 보자마자 바로 달려들어서 공격적으로 해결하려 할 것이었다.
하지만 롤랜드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균열은, 그렇게 접근했다간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한 마법이라는 것을.
‘숨, 숨겨야 해.’
롤랜드는 이불을 끌어 내렸다.
이제 멜리사와 다른 방을 쓴다는 게 다행이었다.
소년은 이불을 한 아름 끌어안아서 균열 위로 덮었다.
“……!”
아이의 눈이 흔들렸다.
균열에 이불이 떨어지자마자 검은 불꽃이 솟아나, 이불을 송두리째 삼켜버린 것이다.
“흐어어어엉……!”
겨우 여덟 살짜리 아이가 혼자 감당하기에 너무 큰 사건이었다.
겁에 질린 롤랜드는 당장 방을 뛰쳐나갔다.
롤랜드보다 일찍 일어나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 카리나가 눈에 들어왔다.
“롤랜드, 잘 잤니?”
카리나가 머리를 빗으며 롤랜드를 향해 몸을 빙글 돌렸다.
롤랜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카리나는 오늘따라 조금 초췌해 보였다.
분명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네.”
롤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항상 자신과 멜리사를 위해 힘쓰는 엄마를 더욱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체스에게 얘기해야겠어.’
롤랜드는 카리나의 눈치를 보면서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저어…… 체스한테 가 봐도 돼요? 갑자기 마법이 생각나서요.”
“무슨 마법?”
카리나가 어리둥절해하면서 되물었다.
롤랜드는 마른침을 삼켰다.
자기 자신의 거짓말에 걸려든 셈이었다.
“그, 그게…….”
하지만 롤랜드는 변명을 꾸며내지 못했다.
“롤랜드!”
경악에 질린 카리나의 목소리가 방 전체에 울려퍼졌다.
그녀는 빗을 바닥에 내팽겨치고 롤랜드를 향해 달려왔다.
롤랜드는 잠시 후에야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이, 이게…… 뭐…….”
카리나의 잔뜩 공포에 질린 시선은, 롤랜드 바로 옆을 응시하고 있었다.
입이 쩍 갈라져 그 심연을 내보이고 있는 균열을……!
* * *
카리나는 도저히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손이 덜덜 떨려왔다.
이건, 균열이었다.
땅속 저 깊은 곳에서 서식하는 강력하고 음산한 마물들이 지상의 한 인간에게 달려들도록 만드는 마법.
인간의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시도조차도 할 수 없는 사악한 마법.
버리올의 회심의 일격.
카리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저 심연 속 존재들은 분류상으로는 마물이었지만, 평범한 마물들과 구분하기 위해 ‘악마’라고 불렸다.
악마들에게서 대항할 수 있는 건…….
대마법사,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 정도.
바로 그 순간.
정말로 오랜만에 새파란 글씨가, 그녀의 시야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롤랜드는 새카만 균열을 내려다보았다. 그 심연이, 그를 향해 끊임없이 속삭였다.
너는 우리의 것이라고.
아무리 도망쳐도, 너를 끝까지 찾아내어 우리의 곁으로 끌고 오겠다고.
‘웃기지도 않군.’
롤랜드는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이런 것에 당할 자신이었다면, 진작 죽어서 땅에 묻혔을 것이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균열로 뛰어내렸다.
쾅!
굉음이 울리는 동시에 불길이 치솟았다.
살이 타는 악취와 고통이 롤랜드를 집어삼켰다.
비릿한 미소가 롤랜드의 입가에 떠올랐다.
버리올은 짚어도 한참을 잘못 짚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고통만큼 롤랜드에게 친숙한 것도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이군.’
롤랜드는 심연 속에서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화염들을 베어내면서 생각했다.
자신은 이 웃기지도 않는 함정을 뿌리채 뽑아내어, 그에게 고스란히 갚아줄 것이다.
그때, 자주색 화염이 그를 향해…….」
“카리나, 카리나!”
카리나의 눈이 번쩍 떠졌다.
클로드가 그녀를 향해 애타게 소리치고 있었다.
“롤, 롤랜드는…….”
“전 여기 있어요.”
롤랜드가 침울한 얼굴로 카리나를 내려다보았다.
“저어, 그, 잘못했어요…….”
아이는 눈가에 한가득 고인 눈물들을 황급히 훔쳐냈다.
카리나는 멍하니 롤랜드를 바라보았다.
항상 카리나는 롤랜드의 여린 마음을 안쓰럽게 여겼지만, 이번만큼은 안쓰러움도 걱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포가 카리나의 마음을 꽉 틀어쥐었다.
저 여린 롤랜드는 소설 속 산전수전 다 겪고 거칠게 성장한 롤랜드가 아니었다.
“절대, 안, 안 돼…….”
“엄마?”
롤랜드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카리나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저 균열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
강력한 마법사가 균열 속으로 몸을 던져서 심연의 존재들을 해치우는 것.
‘죽고 말 거야. 롤랜드는……!’
사실 균열 하나만 놓고 보자면, 롤랜드가 죽는 것 또한 해결책은 맞았다.
심연 속 존재들은 제물을 손에 넣으면 만족하고 사라질 터이니.
만약, 롤랜드가 계속해서 그들을 거부한다면…….
‘악마들이, 지상으로 올라오겠지.’
카리나는 이를 악물었다.
“엄마, 그…… 괜찮아요? 저 때문에…….”
카리나는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는 롤랜드를 꽉 끌어안았다.
지금만큼은 롤랜드의 안전 이외의 다른 그 무엇도 카리나의 안중에 없었다.
“괜찮아. 다 괜찮아.”
그녀는 롤랜드를 토닥였다.
“내가…… 지켜줄게.”
아무도 카리나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심지어 롤랜드마저도.
아마도, 모두가 단순히 엄마가 겁에 질린 아들을 달래는 모습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카리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유일하게 롤랜드를 지켜줄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기에.
‘나야.’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카리나는 롤랜드를 놓아주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심연 저 깊숙한 곳에서 새카만 화염이 넘실거리는 듯했다.
카리나는 그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롤랜드, 롤랜드, 롤랜드…….”
이것들은 지금의 롤랜드도, 멜리사도, 체스도, 클로드도 해결할 수 없었다.
‘대마법사라면 가능이야 하겠지만…….’
겨우 소년 한 명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 대마법사가 기적적으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남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늦었으리라.
카리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마법이라면…….
이것들에게 끝없는 공격을 가하여 소멸시킬 수 있다.
아무리 강력한 마물들이라도, 죽는 바로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폭주하는 공격 마법에 당해내지는 못할 것이다.
마지막 순간.
카리나는 클로드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카리나는 깨달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자신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는 걸.
그래서 그녀는 클로드의 청혼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카리나는 여태껏 클로드에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려준 적이 없었다는 것을.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그녀의 고백이었다.
“사랑해요, 클로드.”
클로드의 눈이 크게 열렸다.
그는 카리나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손을 뻗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그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심연 속으로, 뛰어내렸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