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사랑해.”
단 세 글자.
열기 어린 목소리엔 미약한 떨림마저 숨겨져 있었다.
카리나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서도 깨달았다.
클로드 역시, 그녀에게 거부당하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그 사소한 사실 하나에, 카리나의 마음이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요동쳤다.
“카리나.”
중저음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카리나는 그를 올려다보고 싶었지만, 그간 그녀를 옥죄어 온 족쇄들이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저, 전…….”
카리나의 말들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의미 없는 소리로 공중에 흩어졌다.
“…….”
클로드가 그녀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카리나는 그의 단단한 품이, 상냥하게 전해져 오는 열기가, 그리고 부드럽게 그녀를 배려하는 움직임이 빠져나가는 게 아쉬웠다.
아니, ‘아쉽다’와 같은 어린애 같은 표현 못 할 감정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들끓었다.
그래서, 카리나는…….
이번만큼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기로 했다.
아이들도, 공작가도, 심지어 그녀와 클로드의 신분조차도.
그녀는 클로드의 옷자락을 붙들고, 키스했다.
“……!”
클로드의 동요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카리나는 자신이 먼저 움직여 놓고도 굳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무슨, 무슨…….’
물론, 카리나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똑똑히 알았다.
고용주이자 이 땅의 군주인 그에게 키스한 것이다.
감히, 의사도 묻지 않고!
하지만 다음 순간.
클로드의 부드러운 그림자가 그녀를 덮쳐왔다.
카리나는 눈을 감았다.
서툴고 초조했던 카리나와 반대로, 클로드는 부드럽고 열정적으로 움직였다.
카리나의 이성은 클로드의 다정한 움직임에 의해 서서히 녹아내렸다.
이성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오직 그를 향한 마음뿐이었다.
* * *
그날 이후.
클로드 데비아탄 토르스와 카리나 브리튼의 관계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클로드는 생각했다.
“카리나.”
우선, 언제 어디에서든 그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카리나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클로드는 굳이 부르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생각해 보니, 전 공작저에서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는 건 자신뿐이지 않은가.
카리나의 의사에 따라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이 특권이 존재하는 동안은 계속해서 즐기고 싶었다.
“…….”
한 가지 더 달라진 것은, 이제 카리나는 자신에게 용건을 묻지 않았다.
그저 가까이 다가올 뿐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연인끼리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데, 굳이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클로드.”
카리나가 미소를 띤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날씨가…… 좋아서.”
또, 목소리가 떨리고 말았다.
클로드는 자기 자신을 탓했다.
이렇게 감정 하나 감수 못 해서야, 카리나가 그를 어떻게 보겠는가.
하지만 카리나에 대한 그의 마음은 매시간, 매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갔고, 생애 처음으로 느끼는 강렬한 감정에 대응하기는 제아무리 공작이라도 쉽지는 않았다.
“그렇네요. 이렇게 화창한 날은 오랜만이에요.”
카리나는 눈이 부신지 눈을 가늘게 뜨고 웃고 있었다. 햇빛은 조금 따갑게 느껴질 정도로 그들의 머리 위를 내리쬐었다.
햇살을 받은 카리나의 머리칼은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클로드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들어온 질문에 정신을 차렸다.
“많이 바쁘신가요?”
클로드는 잠시 망설였다.
카리나가 저렇게 서두를 꺼낸다는 건, 무언가 그와 함께하고 싶은 일정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
카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제가 클로드의 스케줄을 따로 알아낼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카리나 브리튼에게는 정말로 그럴만한 능력과 인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클로드는 한숨과 함께 그날의 일정을 털어놓았다.
“그대가 참석하지 않는 회의가 두 개 있고…… 내가 확인해 보아야 할 안건이 네 개 정도. 하나는 국경지대 문제라 시간이 걸릴 거다.”
“그래요?”
카리나는 그다지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
“그럼, 공작 각하께서 임무를 수행하시는 동안…… 제가 곁에서 조금 방해하더라도 큰 상관은 없겠네요?”
“…….”
클로드는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바보같이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들킬 것만 같아서였다.
잠시 후.
그들은 클로드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카리나는 냉큼 소파에 앉더니, 가방에서 서류를 한 움큼 꺼냈다.
“그건, 뭐지?”
“잊으셨어요? 저도 제가 해야 할 일들이 있거든요. 이것들부터 빨리 끝내놓고 어서 클로드를 방해해야겠어요.”
카리나가 장담한 대로, 그녀의 일은 수십 분만에 끝났다.
하지만 카리나가 클로드를 방해한답시고 하는 일들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기껏해야 소파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클로드를 빤히 쳐다보는 정도였다.
문제는 이 사소한 행동이 클로드에게는 엄청난 방해로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카리나. 그…….”
클로드가 헛기침을 했다.
차마 얼굴을 그만 바라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카리나는 곧바로 클로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깨달은 듯했다.
곧바로 사과하는 걸 보면.
“아, 죄송해요. 그냥…… 클로드가 너무, 잘생겨서요.”
카리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냥, 평소엔 몰래몰래 봐야 하니까…… 이렇게 기회가 있을 때, 열심히 봐두려고…….”
침묵이 흘렀다.
클로드는 조금 전 알게 된 두 가지 새로운 사실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한 가지는, 카리나가 그동안 그를 몰래 봐오고 있었다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그녀가 그를 잘생겼다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클로드는 자신이 제법 잘난 외모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무도회에 잠깐 얼굴이라도 내비칠 때마다 찬사가 들려오는데, 모르는 게 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개개인마다 취향이 있지 않은가.
카리나가 특이 취향이 아니라는 법도 없었고.
그래서 카리나의 입으로 그의 얼굴이 취향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클로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계속 봐도 되는 거죠? 그렇죠?”
“당연하지.”
클로드는 카리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여인이 얼굴을 보는 게 소원이라는 데, 들어주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바보였다.
곧바로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잠시 평정을 되찾았던 카리나의 시선이 즉각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클로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속, 똑바로, 카리나를 바라보면서.
카리나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쁘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생각해 보니, 조금 미뤄도 되는 듯하여.”
달깍.
클로드는 문을 잠갔다.
아직까지 카리나는 수줍음이 많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둘 사이의 일을 비밀로 해주었으면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으니, 클로드는 최대한 카리나에게 맞춰주기로 했다.
클로드는 자세를 고쳐 앉은 카리나의 곁에 앉았다.
“클로드.”
카리나가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그녀 특유의 화사한 꽃향기가 클로드의 코에 감돌았다.
클로드는 생각했다.
카리나가 원한다면, 어쩌면…….
자신은 그간 필사적으로 쌓아온 모든 걸 다 내버리고, 떠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만약, 정말 그것이 카리나가 원하는 미래라면.
‘미쳤구나, 클로드 데비아탄.’
클로드의 이성은 그를 엄하게 꾸짖었다.
만난 지 겨우 일 년이 지난 여자를 위해, 그동안 쌓아온 것들을 버릴 수도 있겠다니?
돌아가신 부모님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그것조차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만큼 카리나가, 카리나와 함께하는 미래가…….
그에게 소중했으니까.
“카리나.”
클로드는 카리나의 부드러운 장밋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면서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게 있다.”
“뭔가요?”
평온에 젖은 카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이게 성급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더 늦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을 듯하여.”
클로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겨우, 말 한마디일 뿐인데 왜 이렇게 힘들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게…… 그대와, 평생 함께할 기회를 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