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버리올은 그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지금 자신이 본 것이 헛것에 불과하길 빌었으나 현실은 냉정했다.
그의 좋은 머리는 이미 눈에 보이는 상황들을 냉철히 분석하고 있었다.
‘분명, 어디선가 잘못됐어.’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수년에 걸쳐 준비해온 마법이다.
그간 자신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헤쳐온 롤랜드 블로에조차도 그 마법을 전혀 방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왜……!’
버리올은 마법을 시행했을 당시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복잡한 마법식을 완성한 이후, 대가를 바치고 주문을 외운 직후.
누군가가 그의 결계에 침입했다.
롤랜드 블로에는 당시 자신의 계략에 의해 먼 극지방에 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아니었다.
기실 그는 여태까지 침입자의 존재에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쨌든 마법은 완벽하게 성공했고, 그는 과거로 되돌아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그놈이 무언가를 한 게 분명해.’
버리올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자신을 방해할만한 사람을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설령 알아낸다 한들…….
지금 와서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였고.
버리올은 이를 악물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썩어들어가는 발바닥에서 불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시간이 없어.’
버리올은 알았다.
몸의 괴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꼬맹이의 몸을 빼앗아야 해.’
실패한 마력의 반작용을 막으려면 상당한 잠재력의 마법사의 몸을 빼앗는 수밖에 없었다.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사실, 버리올은 롤랜드 블로에보다는 훨씬 덜 까다로운, 약해빠진 마법사의 몸을 빼앗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약한 인간들의 마력은 자신이 지닌 부작용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도리어 부패만 더욱 가속화될지도 모르고.
‘…….’
버리올은 이를 으득 갈았다.
여태까지 자신은 체스판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미 체크메이트가 걸려 있는 상황이 아닌가.
‘잠깐.’
버리올의 눈에 기묘한 안광이 스쳤다.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그것도 롤랜드 블로에의 몸을 빼앗을, 완벽한 방법이.
* * *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카리나는 롤랜드의 떨리는 목소리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롤랜드.”
그녀의 입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롤랜드는 석고상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카리나는 천천히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녀의 아들을 향해.
“엄마, 다…… 다 들은 거예요?”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엿듣게 되었어. 미안해.”
“…….”
롤랜드는 천성이 착하기 때문인지 체스를 탓하지도 않았다.
단지, 불안한 얼굴로 카리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롤랜드.”
카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간 자신은 얼마나 오만했던가.
아이들의 의사를 물을 생각도 하지 않았고, 아이들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아볼 생각도 없었다.
그저, 그녀 자신의 오만과 고집에 의지해 아이들의 진로를 결정했다.
하지만 롤랜드와 멜리사는 그런 그녀의 속내마저 모조리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해. 여태까지 일, 전부 다. 마법을 은근히 강요했던 거랑…… 네가 남부의 가신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까지. 다…… 사과할게.”
카리나는 굳이 단어를 고르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기에.
그간 그녀는 아이들을 어리게만 봐오고, 오직 자신의 판단에 근거하여 어떤 것은 숨기고 어떤 것은 알려 주었다.
그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 쓸데없는 짓을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이제는…… 뭐든 롤랜드가 원하는 걸 해.”
카리나는 멜리사를 바라보았다.
“멜리사도 마찬가지고.”
하고 싶은 말이 정말로 많았다.
서툰 엄마라서 정말 미안하다고.
무엇보다도 너희들이 뭘 원하는지, 뭘 생각하는지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카리나는 그중 그 어떤 것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지나친 사과는 아이들을 놀라게만 할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엄마.”
입만 열었다 닫았다 하는 롤랜드 대신, 멜리사가 입을 열었다.
아이의 목소리엔 울음이 섞여 있었다.
“왜…… 왜 미안하다고 해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죄책감 어린 얼굴로 카리나를 바라보는 롤랜드 역시 멜리사와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그거야…….”
카리나는 목이 메여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엄마.”
롤랜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리나는 무심코 롤랜드를 바라보았다가, 숨을 들이켰다.
얼핏 보기엔 클로드와 비슷한, 하지만 그보다 밝고 따뜻한 느낌의 파란색 눈이 그녀를 간절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저는요.”
롤랜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요. 엄마가 행복하기만 하다면요.”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카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생각하지 말고, 네가 원하는대로 해야지.”
“왜 엄마를 생각하면 안 돼요?”
롤랜드는 이제 제법 흥분한 듯했다. 얼핏 들으면 화난 것 같기도 했다.
멜리사와 관련된 일만 아니면 그다지 흥분하지 않는 롤랜드였기 때문에 카리나는 놀란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아니었으면, 우린 아직도…… 아직도…… 그 마법사랑……!”
카리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롤랜드의 말이 맞았다.
만약 자신이 아니었다면 멜리사는 지금쯤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생에 읽은 소설 속에서 롤랜드가 비참하게 성장하고 멜리사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자신 때문이 아닌가.
카리나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아서.
소설 속 인물이니 다르다…… 라고 하기에는, 카리나 역시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
렝케가 롤랜드에게 인체 실험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하지만 카리나는 자신의 어두운 진실을 아이들에게 밝힐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아이들이 영특하여 자신의 속을 뻔히 들여다보았다고 한들 전생까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카리나는, 아이들을 안심시켜주기 위해 미소 지었다.
“……그렇네. 더는 미안하다고 하지 않을게.”
“저희는 엄마가 좋아요.”
멜리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지, 롤랜드?”
“응……!”
롤랜드가 먼저 카리나를 와락 껴안았다. 뒤이어 멜리사도 그랬고.
카리나는 눈을 감았다.
죄책감이 빗물처럼 그녀의 마음에 들이닥쳤다.
동시에 그녀는 맹세했다. 이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아이들이 원하는 걸 한 발 앞질러 생각하고 재단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미래에 달린 일이었다.
그러니, 카리나는 지금 당장은 그저 아이들의 애정을 마음 속에 고이 간직하기로 했다.
자신이 어떤 실수를 하든, 변함없이 그녀를 사랑해주는 아이들을.
* * *
시간이 흘렀다.
롤랜드는 더는 예전과 같은 위력적인 마법을 연습하지 않았다.
대신, 아이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지켜줄 수 있는 방어 마법에 파고들었다.
사악한 저주들을 풀 수 있는 역마법도 롤랜드가 좋아하는 마법 중 하나였다.
롤랜드와 반대로, 멜리사는 위력적인 마법에 흥미를 느끼고 깊게 파고들었다.
카리나는 내심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버리올과 같은 강력한 마법사에 대항하려면 창과 방패가 함께 있어야 할 테니까.
일상은 다시 평온해졌지만 카리나의 마음을 아프게 찔러오는 문제가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더 커졌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일전의 그 대소동에서 카리나는 아이들과의 문제는 해결했지만, 클로드와의 문제는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으니까.
‘……어떡하지.’
카리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동안 자신은 대놓고 클로드를 피해왔다.
일전에, 그를 경계하여 피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유에서였다.
‘날, 어떻게 생각할까.’
롤랜드의 순진한 말들은 그에게 그녀의 치부를 모조리 알려 주고 말았다.
당연히 클로드는 그답게도 카리나를 탓하는 대신, 롤랜드를 감싸고 위하는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했다.
그 덕분에 아이들과의 응어리가 풀렸으니, 카리나는 클로드에게 마땅히 감사해야 할 터였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머리와는 달라서, 현재 카리나는 클로드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힘겨운 지경이었다.
물론 이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카리나의 이 바보 같은 마음을 접기만 하면 되는 문제였으니까.
문제는 당장 오늘 회의가 열린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새로이 수복한 마정석 광산이 주 안건이라서, 결코 카리나가 빠질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