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그렇게 걱정할 것 없다. 내 가신들은 모두 너에게 직, 간접적으로 은혜를 입었으니.”
클로드는 마치 카리나의 새악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카리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클로드의 말은 위로일 뿐이었다. 사실과는 제법 다른.
클로드의 가신들은 카리나에게 도움을 받았을 뿐이지, 은혜를 입었다고까지 할 사람은 없었다.
‘뭐, 굳이 따지자면 아서 경 정도이려나.’
아서는 카리나가 만들어낸 꽃으로 된 약을 먹고 있었으니, 충분히 은혜라고 할 만했다.
하지만 나머지는…….
그저, 약간의 도움에 불과했다.
카리나가 아닌 그 누구라도 쉽게 줄 수 있는.
하지만 카리나는 굳이 클로드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클로드는 자신이 일으킬뻔한 문제를 덮어 주었다.
지금도 카리나를 위로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어이없게도…….
그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정신차리자.’
카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클로드를 의식하고 있는 자신이 정말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실례야.’
카리나는 자기 자신을 크게 꾸짖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라지만, 공과 사는 분리해야 했다.
‘특히, 클로드 앞에선 조심해야…….’
하지만, 클로드와 있는 매분 매초가 왜 이리도 달콤하게 느껴진다는 말인가.
“카리나.”
그녀는 마음을 혹여나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소스라쳤다.
클로드가 심각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각, 아니, 클로드.”
심장이 마구 뛰었다.
클로드를 부르는 카리나의 목소리엔 죄책감이 조금 섞여 있었다.
불순한 의도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그녀 자신이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다음 순간.
클로드가 그녀에게로 급격히 가까워졌다.
“……!”
카리나는 숨을 들이켰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클로드와 그녀의 거리는 겨우 한 뼘이었다.
자칫했다간 닿을 수도 있는 거리.
클로드의 숨결이 카리나의 귓가를 간질였다.
“이것 하나만 알아줘.”
카리나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그녀 몸의 모든 부분이 오직 클로드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하고 있었다.
클로드는 숨도 쉬지 않고 카리나에게 속삭였다.
“그대의 안전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걸. 왜냐하면 그대는…….”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클로드를 소리쳐 불렀다.
“각하!”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는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일순간 깨져 버렸다.
‘체스?’
카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지만, 지금 토르스는 위기일발의 상황이었다.
아무리 그녀의 머릿속이 클로드로 가득 차 있다 한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체스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카리나는 마음을 놓았다.
체스는 정말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저 표정을 보니,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난 듯했다.
“무슨 일이지?”
체스가 숨을 헐떡였다.
“롤랜드가…… 옥구마에 걸린 마법을 풀었습니다.”
“……네?”
카리나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체스가 마법으로 개량된 옥구마를 연구한다고 고생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런데, 롤랜드가 옥구마에 걸린 마법을 풀었다니.
“역마법까지 개발했어요. 그다지 어렵지도 않아서, 평범한 수준의 마법사들도 옥구마에 걸린 마법을 풀 수 있을 겁니다.”
“……!”
클로드가 체스 쪽으로 한 발자국 다가갔다.
“대단하군. 직접 듣고도 믿을 수가 없을 정도야. 어린아이가 그렇게 사악한 마법을 풀다니…….”
체스가 기분 좋게 대답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던데…… 어떻게 이걸 숨길 수가 있겠어요?”
카리나는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충격의 연속이라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알리지, 말아 달라고 했다고요?”
“특히 엄마한테 말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하던걸.”
체스가 윙크했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다는 사실은 비밀이야. 어쩌다가 알게 되었다는 거로 해줘.”
카리나는 롤랜드가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갈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롤랜드는 어디 있어?”
“내 훈련장에. 지금은 거의 애들 전용 훈련장이야.”
체스가 클로드의 가신이 된 이후, 그는 공작저의 다양한 공간을 하사받았다.
공작가의 마법사들이 대대로 쓰던 공간들이었는데, 현재 토르스 공작가의 마법사는 체스 혼자뿐이었으니 상당히 넓은 공간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를 롤랜드와 멜리사에게 훈련할 때 편하게 쓰라며 내어 준 모양이었다.
“롤랜드에게서 직접 듣는 게 낫겠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체스가 수긍했다.
“하지만, 브리튼 양에겐 정말로 알리지 말아 달라고 하던데…… 어떻게 할래?”
카리나는 잠시 고민했다.
롤랜드가 그렇게까지 자신이 알기를 원하지 않는 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당장 롤랜드의 일인데, 한 발자국 물러서 있는 것도 마땅치 않게 느껴졌다.
“전 문밖에서 엿들을게요. 모양새가 조금 이상하긴 해도…… 지금은 그게 최선처럼 보이네요.”
“정말 그걸로 괜찮겠어?”
“괜찮아.”
카리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롤랜드의 마음이 다치지 않는 게 더욱 중요했다.
잠시 후.
그들은 아이들의 훈련장에 도착했다.
카리나는 일부러 아이들의 시야에 노출이 되지 않을 만한 곳에 숨기로 했다.
본디 체스가 사용하던 곳인만큼, 그는 훈련장의 다양한 구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여기 있으면 될 거야. 그런데…….”
체스는 영 떨떠름한 모양이었다.
“그냥 나오지? 핑계는 뭐든 댈 테니까.”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으니까 가 봐.”
롤랜드와 멜리사는 클로드가 모습을 드러내자 긴장한 듯했다.
“공, 공작님.”
“롤랜드, 네가 옥구마에 걸린 저주를 풀었다고 체스에게서 들었다. 설명해다오.”
카리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체스는 분명 자신이 바로 일러바친 것처럼 말하지는 말아 달라고 클로드에게 부탁했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지금, 체스의 요청을 전면으로 무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저것도 뭔가 이유가 있겠지.’
카리나는 너무 깊게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클로드는 남에게 해코지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가 아이들에게 체스의 고자질을 숨기지 않기로 결심했다면, 무언가 체스를 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체스!”
롤랜드가 원망스러워하는 목소리로 체스를 불렀다.
체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미안, 롤랜드. 하지만 이걸 숨길 수는 없었어.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 있잖아.”
“…….”
롤랜드는 여전히 기분이 나쁜 듯했지만 그래도 납득한 듯했다.
아이는 곧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 옥구마에 걸린 마법은 레, 레…….”
“렝케겠지. 굳이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
클로드가 조용히 롤랜드의 더듬거리는 말을 끊었다.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그 작자를 그냥 마법사라고만 불러도 좋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네……!”
롤랜드는 렝케의 이름을 입에 올릴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만으로도 한결 편안해진 듯했다.
“마법사에게서 직접 배웠던 마법의 변형이에요.”
“…….”
훈련장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침내 심증이 확증으로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옥구마에 마법을 건 범인은, 바로 올리버 라크포드였다.
“고맙다, 롤랜드. 네가 한 일에 대해 토르스 전체를 대표하여 감사하마.”
클로드가 롤랜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대답해다오.”
“뭔가요?”
“왜 네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기를 원하지 않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