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이제 카리나에게 익숙해진 작은 소란이 일었다.
“누굽니까?”
“같은 수법이라니, 확실해요?”
“같은 수법이라고 해서 같은 마법사라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카리나는 그 모든 소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이제 공작가의 회의에 참가하는 가신도 제법 많아서, 반응 하나하나에 대꾸하면서 진행한다면 좀처럼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카리나는 이럴 때만큼은 클로드가 조금은 야속하기도 했다.
‘조금 정리를 해 주어도 좋을 텐데…….’
하지만 클로드는 회의에서만큼은 그 어떤 헛소리라도 자유로이 말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카리나는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아무리 헛소리라 한들 강압적으로 제지한다면 그 사람의 말문을 완전히 틀어막게 된다.
헛소리뿐만 아니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소중한 조언마저도 들을 기회를 놓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카리나는 클로드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녀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신 분 중 몇 분은 렝케의 공범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카리나는 옛 주인이자 생물학적 아비에 대해 말할 때 떨지 않았다.
그는 이미 죽었으며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 어떤 세상에서든 카리나를 괴롭히지 못할, 이제는 망령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인간.
“그자의 이름은 올리버 라크포드이며, 이제 겨우 열 살쯤 되었을 어린아이의 모습입니다.”
“……!”
조금 전 회의실의 소란이 믿음과 의구심이 뒤섞인 상태였다면, 이젠 경악이 사방을 뒤덮었다.
“그 무슨……!”
그때, 체스가 눈치 빠르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어린아이의 모습이라면, 진짜 모습은 또 따로 있다는 거네?”
“진짜 모습은 몰라.”
이제부터는 거짓말과 진실을 섞어 말해야 했기 때문에 카리나는 바싹 긴장했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아닌 것만은 확신할 수 있어. 렝케를 죽인 게…… 바로 올리버니까.”
“……!”
이제, 회의실은 고요해졌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렝케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몇은 직접 눈으로 그의 시체를 봤고, 나머지 사람들은 입으로 전해 들었다.
하지만 모두가 사악한 마법에 의해 렝케가 죽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가장하다니…… 사악함이 도를 넘었군요.”
치체스터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모습을 가장하기 때문에 그보다 더 어린 나이의 어린아이로도 변할 수 있어요.”
갑자기, 클로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젊은 공작에게로 쏠렸다.
카리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클로드라면, 이 어려운 상황을 평탄히 헤쳐나갈 방안을 그 짧은 시간 동안 구상했을 것이다.
클로드를 바라보는 카리나의 초록색 눈은 그 누구보다도 맑게 반짝거렸다.
하지만 잠시 후.
클로드의 입에서 나온 건 카리나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아직 성급하게 결론을 내기엔 이른 것 같군.”
“……?”
카리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녀는 이미 클로드에게 모든 설명을 했다.
클로드 역시 버리올이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고.
이렇게 말을 갑자기 바꾼다는 것은…….
“올리버라는 사악한 마법사가 브리튼 양의 아이들을 노리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마법을 썼다고 해서 그가 저질렀다고는 단정할 수 없어.”
“하지만…….”
“브리튼 양, 꼭 그 마법을 올리버 라크포드만 쓸 수 있다는 증거가 있나?”
“그건…….”
카리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클로드의 말에 찬동하는 듯한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의견이 무시당했다는 것보다, 클로드의 뒤바뀐 태도에 가슴이 아팠다.
‘아냐, 이건…….’
카리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자신은 화가 났다고.
클로드가 만약 버리올이 옥구마에 해를 입혔다는 카리나의 생각에 의구심이 있었다면, 미리 말을 했어야 했다.
카리나가 다른 면도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하지만 클로드는 회의실에서 카리나가 말을 꺼낸 다음에야 모두의 앞에서 그녀의 의견을 극구 부정하였다.
‘이건 클로드에게도 좋지 않아.’
카리나는 이를 악물었다. 버리올이 범인일 가능성은 백퍼센트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높아 보였다.
그런데 클로드가 이미 한 번 그녀의 의견을 부정하고서, 나중에 버리올이 범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클로드의 명성에 상당한 누가 될 것이다.
문득 카리나는 자신이 버리올보다도 클로드의 안위를 더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보 같구나, 나.’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사랑이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지만, 그 바보가 바로 자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회의실 안을 오가는 말들은 이제 귓가에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카리나는 체스가 그녀의 어깨를 툭 하고 친 이후에야 정신을 겨우 차릴 수 있었다.
“부인, 너무 의기소침한데.”
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카리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면한 버리올과의 문제가 카리나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체스, 너도…… 그렇게 생각해? 올리버 라크포드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고?”
체스의 붉은 눈이 그녀를 응시했다. 카리나는 지난 일 년 동안, 체스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체스는 어느새 소년과 성인의 경계에서 완전한 성인 남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직접 렝케의 시체를 봤어. 그래서 부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해. 수법이 그대로야.”
“고마워.”
카리나는 힘없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자신을 믿어 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니 다행이었다.
그 사람이 바로 체스라는 점 역시 다행이었고.
“카리나.”
등 뒤에서, 클로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카리나의 심장이 방망이질쳤다.
“……카리나?”
체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클로드의 말을 되풀이했지만, 카리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클로드가 그녀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그 사실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잠깐, 시간을 내줄 수 있겠나.”
“…….”
카리나는 잠시 멈칫했다.
‘나를 달래러 온 걸까.’
어쩌면, 사과일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미리 자신의 의구심을 알리지 않은 것에 대한.
‘……왜 그랬는지는 들어야겠어.’
카리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클로드를 따라나갔다.
잠시 후.
그들은 인적이 드문 복도에 멈춰 섰다.
“미안하다.”
클로드의 첫마디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과 정확히 똑같았다.
하지만…….
‘……뭔가, 이상해.’
카리나는 클로드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클로드와 단 둘이,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입안이 바싹 마르고 심호흡이 가빠질 정도로 정신이 없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뻔히 보이는 징후를 무시할 카리나가 아니었다.
‘내 의견을 무시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게 아니야.’
카리나의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복도로 새어 나갔다.
“왜, 미안하신 거죠?”
“…….”
클로드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대로서는…… 내가 그대의 의견을 무시했다고 보일 테니까.”
“……아니었어요?”
클로드의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절대 아니다.”
“그럼, 이유를 알려 주세요. 대체 왜 그러셨는지.”
하지만 카리나는 이제 클로드의 해명을 굳이 듣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로드가 그랬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자신을 위해서였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사실만큼, 지금 카리나에게 중요한 것도 없었다.
“자칫하면 그대와 아이들이 화근으로 여겨질 것 같았어.”
“……!”
카리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가슴을 가득 채웠던 열기 어린 감정은 순식간에 식고 말았다.
‘나와…… 아이들?’
그녀는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왜, 왜…… 왜 그렇게…… 생각을…….”
“카리나.”
클로드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어둡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카리나의 귀에 와 박혔다.
“나도 올리버 라크포드가 범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 그가 범인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다면, 사람들은 그의 동기 역시 생각해보게 되겠지. 그의 동기는…… 바로 그대와 아이들이고.”
“아…….”
카리나는 신음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단지 마법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을 뿐인 여자들이 사악한 마녀로 몰려 처형당한 게 불과 백년 전.
버리올의 술수는 정확히 먹혀들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의 동기가 순전히 자신과 아이들이라는 사실까지도 알려지고 만다면…….
과연 남부의 그 누가, 그녀와 아이들을 지키고 싶어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