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공통점이라고요?”
베리티의 눈이 크게 열렸다.
“대체 무슨……?”
카리나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깨달은 사실을 즉각 베리티에게 알려 주었다.
“이것 보세요. 증세가 심각한 이들은 모두 다 치료소 식단을 거부하는 환자들이에요.”
베리티는 의아한 눈빛이었다.
“그러니까 브리튼 양 생각은 영양 결핍이라는 거군요? 하지만 이들도 먹는 것 자체는 잘 먹어요. 단지 치료식이 입에 안 맞아서 그렇지…….”
치료소의 식단은 영양을 갖춘 식사였지만, 간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호불호가 많이 갈렸다.
게다가 낯선 음식을 싫어하는 성향이 있는 노인과 어린아이들은 처음 보는 고급 식재료를 입에 대지 않으려 했다.
“물론, 그 탓에 영양 결핍이 왔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치료식을 거부하는 환자들이 유일하게 먹는 건 바로 ‘옥구마’ 요리에요.”
베리티가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있었다.
옥구마는 초봄에 열매를 맺는 작물로 영양가가 높아 그것만 먹어도 건강하게 살 수 있었다.
맛도 상큼하면서도 달콤해서, 편식이 심한 아이들은 옥구마만 먹으려 들 정도였다.
값싸고 영양가 높은 작물을 놔두고 굳이 억지로 치료식을 먹일 인력도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베리티는 옥구마를 원하는 환자들에게 충분한 양의 옥구마를 제공했다.
“옥구마만 먹어도 영양이 충분해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많은 연구 결과가 그걸 증명하죠. 질린다는 문제만 아니었다면, 다들 옥구마만 키울걸요.”
“그…… 제 생각에는…… 그 옥구마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카리나는 조금 자신이 없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옥구마만 먹는 것 자체엔 아무 문제도 없다는 건 카리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혹시, 여태까지 모두가 믿어왔던 옥구마에 문제가 생겼다면?
이건 단순히 환자들의 문제를 떠나 전 토르스, 아니 전 제국의 손실이었다.
“옥구마에, 문제가……?”
베리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문을 박차고 나갔다.
“솔베타인 선…….”
카리나가 다급히 그녀를 불렀지만 이미 베리티는 사라진 뒤였다.
흥분한 목소리와 함께.
“에이드리안에게 당장 옥구마를 조사해 보라고 할게요!”
* * *
다음 날.
카리나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베리티와 함께 에이드리안의 연구실을 방문했다.
연구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카리나가 노크를 하려는 순간, 베리티가 코웃음을 치며 문을 발칵 열어젖혔다.
“에이드리안!”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에이드리안의 얼굴이 삽시간에 환해졌다.
그는 베리티를 향해 헤벌쭉 미소 짓더니, 카리나를 향해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브리튼 양. 부디 옥체보전하셔서…….”
“결과는?”
베리티가 에이드리안을 툭 쳤다.
에이드리안이 조금 전의 그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올해와 작년에 비올에서 수확한 옥구마를 서로 비교해 보았는데, 완전히 달라.”
“어떻게 다른데?”
“다른 종으로 보일 정도야.”
“다른 종이라니요?”
카리나는 어리둥절해져서 되물었다. 작년에 비올에서 수확한 옥구마와, 올해 수확한 옥구마의 생김새는 정확히 똑같았다.
에이드리안이 대체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올해 수확한 옥구마와 작년 옥구마의 이파리 생김새가 다릅니다. 열매는 똑같지만, 이파리는…… 보십시오.”
에이드리안은 카리나에게 이파리 두 개를 내밀었다.
‘……?’
카리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딜 보나 똑같이 생긴 두 개의 평범한 옥구마 이파리였다.
“뭐가 다른가요?”
“아니, 안 보이십니까?”
에이드리안이 답답해하며 되물었다.
“보십시오! 이쪽 옥구마의 솜털이 확연히 적지 않습니까. 이파리의 결도 달라요. 작년 옥구마는 세로로 찢어지는 반면, 올해 옥구마는 가로로 찢어지지요.”
카리나는 에이드리안이 지적한 사항들을 여전히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사실은 알 수 있었다.
“확실히, 다른 종이네요.”
“그렇습니다.”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매년 같은 종자를 쓰잖아요. 어떻게 올해 옥구마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죠?”
종자가 손상되었다 한들 아예 다른 종으로 바꿔치기 당하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에이드리안이 조금 망설이면서 대답했다.
“제 생각에는…… 마법입니다.”
“마법이라고요?”
카리나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그녀는 이제 마법에 대해선 제법 알 만큼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종자를 완전히 바꾸는 마법이 있다고는…….
‘아.’
카리나는 깨달았다.
그녀가 제대로 의식하지 않았을 뿐이지, 씨앗에서 싹을 틔운다거나 식물의 모습을 바꾼다거나 하는 마법들은 모두 종자의 변형과 관련이 있었다.
“하여간 마법사들이란…….”
에이드리안이 툴툴거렸다.
“어떤 미친 마법사가 옥구마를 가지고 실험이라도 한 모양입니다. 종자가 다르니, 영양도 달라졌겠죠. 그래서 본디는 옥구마만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올해의 옥구마부터는…….”
“독이 되었네요.”
심장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카리나는 비슷한 에피소드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버리올은 전투에도 뛰어났지만, 그가 가장 뛰어난 분야는 바로 강에 독을 풀거나 닭들이 사료를 먹어도 굶어 죽는 병을 퍼뜨리는 등 간접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을 말려 죽이는 악행들이었다.
“뭐, 독은 아닙니다. 맛있고 배부른 건 똑같으니까요. 단지 영양이 부족했을 뿐이죠.”
베리티가 에이드리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영양이 부족하다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
“아, 그건 추측.”
“말할 땐 똑바로 말해 주겠어?”
차분해 보이는 에이드리안과는 달리, 베리티는 무척 초조해 보였다.
사실 그녀의 반응이 정상이었다.
‘마을 우물에 독을 탄 것이나 다름없어. 아니, 그것보다 더 나쁘지. 작물은 어디까지 퍼져 있을지 모르는 거니까.’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이런 짓을 한 사람을 쫓아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
“누가, 왜 이런 짓을 했을까요?”
에이드리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합니다. 웬만한 의지와 행동력 없이는 새로운 종자를 이렇게 퍼뜨리기는 어렵습니다.”
에이드리안은 잠시 뜸을 들였다.
“새로운 종자를 만들어냈다고 해도 보통은 싹도 제대로 틔우지 못하고 죽거든요.”
“……마법사인 건, 확실하죠?”
에이드리안이 껄껄 웃었다.
“그럼 이렇게 새로운 종자를 갑자기 만들어 낼 방법이 마법 말고 존재하기는 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그는 새로운 옥구마를 슬쩍 흔들었다.
“마법으로 만들어 낸 종자들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뭐죠?”
“번식을 못 합니다. 이 새로운 옥구마는 땅에 심어도 아무런 싹도 트지 않을 겁니다.”
“다행이네요.”
카리나는 안도했다.
어찌 된 게 상황의 심각성에 비해 에이드리안이 그리 긴장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의 기준으로는 큰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카리나는 이게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해.’
식물, 그다음에는 동물. 마지막으로는 사람.
버리올이 좋아했던 단계였다.
“정말 다행이죠. 마법 종자들이 번식할 수 있다면 저희 식물학자들은 마법사들 꽁무니만 쫓아다녀야 할 테니까요.”
“……저는 당장 치료소로 가서, 그놈의 옥구마들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겠어요.”
베리티가 뛰쳐나간 이후, 카리나는 문득 생각난 사실을 물었다.
“옥구마를 재배하는 곳은 많잖아요. 왜 몇몇 마을에서만 환자가 발생했을까요?”
에이드리안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일단, 옥구마만 먹는 지역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옥구마 재배지는 전국에 퍼져 있으니 마법사가 모두 퍼뜨리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마법사가 아직 활동 중이라면…….”
“충분히 이 병이 더 퍼졌을 가능성이 있군요.”
카리나는 쓰게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이 옥구마만 먹어야 할 사람들이 제국에 분명 많을 것이다.
“맞습니다.”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베리티가 사라진 문을 평소의 가벼운 태도가 아닌, 무거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베리티가 고생하게 되겠군요.”
* * *
다행스럽게도 베리티가 옥구마를 모조리 압수하고, 환자식을 배식하자 모든 환자들이 점차 건강을 되찾기 시작했다.
“나 원, 기가 차서.”
베리티가 쾅, 하고 책상 위에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각기병이었다니…….”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본디, 각기병의 치료법이 옥구마를 먹는 거라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이건 반역죄야.”
클로드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폐하께도 전령을 보냈다. 이 정체불명의 마법사를 잡기 위해선 가능한 모든 도움이 필요해.”
“과연, 정체불명일까요?”
카리나의 목소리가 회의실에 또렷하게 울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수선하던 회의실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브리튼 양.”
클로드가 카리나에게 경고하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멈추지 않았다.
클로드는 가능한 모든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선, 비밀도 털어놓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저는 이런 수법을 쓰는 마법사를 한 명 알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