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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입양합니다 (126)화 (126/145)

<126화>

침묵이 흘렀다.

그녀도, 클로드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라도 말해야 해.’

이러다 자신의 감정을 들킬까봐 염려된 키리나가 입을 연 순간.

“멈춰라!”

뒤에서 날선 소리가 들려왔다.

카리나와 클로드는 동시에 등을 돌렸다.

“……?”

카리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한 무리의 경비대들이 치료소를 향해서 뛰어가고 있었다.

“가봐야겠군.”

클로드가 망설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카리나도 서둘러 소란이 들려오는 곳으로 이동했다.

뛰어가는 도중에도 그녀의 마음은 오직 클로드에 대한 감정만이 지배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조금 전 화려한 개관식이 치러졌던 장소에 도착했다.

‘……!’

카리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치료소 앞에서 양떼처럼 북적이는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가 아파 보이는 환자들이었다.

“정식 업무는 사흘 뒤 아닌가요……?”

카리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안이 벙벙해진 카리나와는 반대로, 클로드는 전혀 당황한 것 같지 않았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거지. 이 사람들은.”

“그렇네요.”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드의 말이 맞았다. 이 사람들은 분명히 절박할 것이다.

마치, 아픈 롤랜드를 두고 발만 동동거리던 예전의 자신처럼.

“공작 각하!”

누군가가 클로드의 앞을 막아섰다. 자세히 보니 일흔은 되었을 듯한 노인이었다.

“각하, 제발…… 이들을 살려주십시오. 마지막 희망이 이곳이라…… 여기까지 왔습니다.”

클로드는 한쪽 무릎을 굽혔다.

“알겠다. 당장 치료소를 열도록 하지. 전부 적절한 치료를 받을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도록. 자네는 어디가 불편한 거지? 노약자들을 먼저 치료하도록 하겠다.”

“그게…… 각하, 그게 아닙니다.”

노인이 쉰 목소리로 다급하게 대답했다.

“전, 환자가 아닙니다.”

“환자가 아니라고?”

클로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뭐지?”

“각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비올이라는 마을의 이장입니다.”

아무리 클로드가 공작이라고 한들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었다.

토르스는 드넓었고, 작은 마을들은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당연히 노인은 클로드가 비올이라는 곳에 대해 전혀 모르리라고 생각하고 말을 꺼낸 것이었다.

“당연히 알지. 좋은 포도주를 만들어내는 곳이 아닌가.”

“……!”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에 이장이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떡 하니 벌렸다.

“설마,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비올 사람들인가?”

“아, 아닙니다.”

비올의 이장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저희 마을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들도 다 엉망이 되었습니다.”

“엉망이라니?”

이장은 고개를 떨구었다.

“다들 병에 걸렸습니다. 처음엔 손발이 좀 저릿저릿하다가, 나중엔 다리를 움직이지도 못하는 무서운 병에…….”

이장은 숨을 헐떡였다.

“이제는 걷지도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각하, 제발 이들을 살려주십시오!”

“……!”

클로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건조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전염병이 돌았는데, 왜 나는 지금껏 한 마디도 듣지 못했지?”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전염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구는 걸리고, 누구는 걸리지 않고……. 그래서 저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냥 몇몇 사람들에게만 전염이 되지 않은 거일 수도 있잖아요.”

“그건 아닙니다. 여섯 개의 마을에서만 환자가 나왔으니까요. 다른 마을들로는 더 번지지 않았습니다. 친척들이 많이 살아서 환자들이 자주 오간 마을에서도요.”

노인은 쓰게 말했다.

“만약 병이 더 번졌다면 각하께서도 소식을 들으셨겠죠. 하지만 환자가 나온 지역은 한정되어 있고, 누구도 저희같은 시골 마을에 신경을 써주지 않으니…… 이 지경이 된 것입니다. 의사들이 와도 이상한 소리나 하고…….”

노인의 목소리가 노기에 겨워 흔들렸다.

카리나는 그가 그간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충분히 알 듯했다.

겨우 평정을 유지한 노인이 클로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제가 이들을 모두 끌고 왔습니다. 각하께서 모두를 위한 치료소를 만드셨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이마의 땀방울을 훔쳤다.

이제 겨우 초봄이니, 날씨는 쌀쌀한 편인데도 그는 열기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최선을 다하도록 하지. 비올과 인근 마을도 따로 조사하겠다. 발병 원인이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향을 떠나고 수도에 가까워지자 몇몇 회복자가 나왔습니다. 그래도 절반 이상이 여전하지만요.”

“그럼 원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다는 소리겠군.”

클로드가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예. 훨씬…… 그래도 장정들은 대부분 회복했습니다. 어린애들이 문제지요.”

“어린아이들도 걸리나요?”

카리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차별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아이들과 어른은 같은 병에 걸려도 고통을 느끼는 정도가 차이 날 수밖에 없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습니다. 한 집에 걸리면 그 집의 모든 식구가 걸리고…… 어떤 집은 한 명도 걸리지 않고.”

“아무래도 내가 들어 봤자 알아낼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군.”

클로드가 이장의 말을 끊었다.

“치료소장한테로 가야겠어.”

베리티 솔베타인은 밀려든 환자들의 진료를 정신없이 보고 있었다. 그녀는 클로드와 베리티가 들어오자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넘겼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바쁩니다. 나중에 보고드릴게요.”

클로드는 베리티의 날선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웃어넘겼다.

“만나야 할 사람을 데려왔어, 솔베타인 선생.”

이장은 처음에는 여자 의사가 치료소장이라는 사실에 놀랐고, 그 다음에는 자신이 이 모든 사태를 설명해야 할 막중할 책임을 지녔다는 사실에 부담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찬찬히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병에 걸린 이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시골 마을에서도 못 사는 축에 속하는 가족만 걸렸다는 점이었다.

잘 사는 축에 드는 가족들은 단 한 가족도 걸리지 않았다는 점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뭔가…… 원인이 있겠네요.”

베리티가 생각이 잠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단은 다 입원시키죠. 마침 병실에 여유가 있으니까. 사망자는 어떻게 됩니까?”

베리티는 ‘사망자’라는 말을 마치 바깥 날씨를 이야기하듯 가볍게 입에 올렸다.

“서, 서른 둘…….”

“총 환자 수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하세요? 중간에 절반이 자연적으로 나아서 돌아갔다면서요.”

“삼, 삼백은 되었을 겁니다.”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삼백 명이라니.’

삼백 명이 누구도 진단하지 못하는 미상의 병에 걸렸는데, 이들이 제 발로 공작저까지 찾아오기 전까지 공작가에서 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했다고?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망률은 그리 높지 않군요.”

베리티가 태연하게 판단했다.

“상태를 보니, 심각해 보이는 환자들이 많아 걱정했는데 그나마 다행입니다.”

“…….”

이장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꾹 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리나는 노인의 입장도, 베리티의 입장도 이해됐다.

베리티는 그간 죽은 사람들을 숱하게 많이 봐왔을 것이다.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녀가 생명을 경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마도 죽은 환자들에 대한 죄책감을 극복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반대로 이장 입장에서는 그의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두고 단순히 수치적으로 ‘생각보다 사망률이 낮아서 다행이다’라고 치부하는 베리티가 야속할 것이고.

하지만 이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덕분에, 베리티는 바로 일에 착수할 수 있었다.

치료소의 첫 번째 임무가 시작된 것이다.

* * *

“모르겠어요!”

베리티가 사자후를 내뿜으며 서류더미로 책상을 쾅 쳤다.

“이렇게 증세가 심각한 병이 별다른 치료 없이 치료소에서 지낸 것만으로도 대부분이 낫는다는 것도 이상하고, 온갖 수를 다 써도 낫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이상하고!”

베리티의 성의 어린 보살핌 덕분인지 대다수의 환자들은 완치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비올과 인근 마을에선 환자들이 속속들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상황은 도긴개긴이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환자들이 쉽게 나아서 다행이었다.

카리나는 베리티를 달래는 대신, 이 새로운 병에 기록해둔 서류들을 집어들었다.

베리티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봐봤자 소용없어요. 제가 수십번은 더 봤으니까.”

하지만 카리나는 포기하지 않고 페이지를 넘겼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보다야 낫다.

얼마나 지났을까.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왜 그동안 아무도 이걸 지적하지 않았지?’

베리티가 그런 그녀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브리튼 양, 왜 그래요?”

카리나는 입을 열었다.

“아직 낫지 않은 환자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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