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그 사실에 비하면 돌려받은 영지는 별것 아니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클로드에게 영지가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드디어 남부가 과거의 망령에서 풀려난 것이다.
클로드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풀려날 수 없었던.
‘그리고 오늘도 기뻐하겠지.’
그토록 기다리던 치료소의 개관식에 클로드가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엄마!”
치료소 앞에 도착하자 멜리사와 롤랜드가 그녀를 반겼다.
카리나는 아이들을 안아 주었다.
매일같이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데도, 아직 둘은 항상 카리나의 품에 안기고 싶어 했다.
체스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아슬아슬한데? 조금만 더 늦었다간 얘들이 브리튼 양을 찾으러 뛰쳐나갈 기세였어.”
“롤랜드, 멜리사.”
카리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엄한 어조로 불렀다.
“체스의 말, 정말이야?”
“……찾으러 가려던 거예요.”
롤랜드가 조금 의기소침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리나는 미소 지었다.
“늦어서 미안해. 이렇게 중요한 자리를 놓칠 수 있으니, 너희들이 나를 빨리 찾고 싶어 한 것도 당연하지.”
“……!”
카리나의 미소와 다정한 말 몇 마디에 아이들은 눈에 띄게 안도했다. 굳은 얼굴이 풀어지고 조금 전처럼 카리나에게 엉겨 붙기 시작했다.
카리나는 전혀 내색하지 않으며 아이들과 장단을 맞춰 놀아주었지만, 가슴은 조금씩 아려왔다.
조금 전, 크게 실수할 뻔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조심해야겠어.’
아이들은 큰 말썽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에 야단을 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주의를 한 번도 주지 않고 아이들을 키울 수는 없다.
문제는 롤랜드와 멜리사가 아주 특별한 아이들이라는 점이었다.
조금만 주의를 줘도, 크게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굳어버리는.
그러니 주의를 주면서도 아이들을 안심시켜야 했는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엄마.”
“응, 으응.”
생각에 잠겨 있던 카리나는 자신의 손을 잡아끄는 롤랜드 덕에 정신을 차렸다.
“곧 시작하려나 봐요. 저희도 가까이 가요!”
클로드는 그녀 역시 연단에 세우겠다고 했지만, 카리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버리올이 그녀와 아이들을 노리고 있는 이상 눈에 띄는 자리엔 서고 싶지 않았다.
물론, 오해하는 사람이 없게 잘 설명했지만 베리티는 조금 섭섭해하는 듯했다.
“브리튼 양이 생각해 낸 치료 시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치료소를 열 수 있었어요. 그런데 오지 않겠다니…….”
“연단 아래에서 열심히 응원할게요. 아마 옆에 있는 것보다 더 잘 보일걸요?”
“……맨 앞줄에 있어야 해요.”
“물론이죠.”
카리나는 베리티와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맨 앞줄로 허겁지겁 나아갔다.
“……!”
카리나와 아이들을 발견한 베리티가 손을 흔들었다.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베리티의 손을 잡았다.
베리티가 그의 손을 뿌리치는 덴 단 3초도 걸리지 않았다.
“치료소장, 베리티 솔베타인 선생님이십니다.”
치체스터 경의 안내에 따라 베리티가 연단으로 걸어 나왔다.
베리티는 조금도 긴장한 것 같지 않았다.
이렇게 큰 무대에 늘 서 있던 사람처럼, 자신만만하고 활기차 보였다.
그녀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치료소가 원래 어떤 시설이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지 설명했다.
잠시 후.
치료소의 의무를 하나씩 맡은 이들이 나와서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카리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치료소는 공작가의 시설이었으므로 시작부터 한마디쯤 할 법한데, 클로드는 단 한 번도 발언하지 않았다.
뒤에라도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고.
카리나는 그 사실이 제법 클로드답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이 치료소를 주도적으로 이끈 게 베리티라고 하더라도 클로드의 한마디면 모든 사람들이 오직 그만을 기억할 것이다.
클로드가 단순히 공작이어서는 아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진솔한 호소력 때문이었다.
물론, 클로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카리나의 시선이 무심코 연단 위에서 클로드를 찾아 헤맸다.
‘……!’
카리나의 눈이 커지고, 입이 살짝 열렸다.
‘기뻐할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클로드는 그녀가 보았던 그 어떤 적보다도 더 기뻐 보였다.
심지어, 영지를 반환받았을 때보다도.
‘클로드가 정말 원한 건 이것이었구나.’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클로드 데비아탄 토르스 같은 사람은 이 세상 어딜 가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자신과 영지, 그리고 작위의 이득보다도 평민들을 위한 치료소가 더욱더 기쁘다니.
연단 위의 사람이 바뀌고 또 바뀌었지만 그녀는 오직 클로드만을 바라보았다.
그는 카리나가 제대로 기억하려고 들지 않는 치료소의 직책 하나하나를 귀담아들었다.
‘…….’
카리나는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어느 순간부터, 익숙지 않은 감정이 자신의 심장을 쿡쿡 쑤셨다.
클로드를 보는 내내 가빠지기도 했고, 이내 수그러들기도 하는 그 감정은 한 가지 색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푸른색이었다.
마치, 클로드의 눈처럼 찬란한.
그때.
카리나는 깨달았다.
자신은, 자신과 같은 평민들을 위한 치료소가 열린 것 자체에 이토록 기쁘고 찬란한 동시에 가슴 시린 감정을 품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클로드야.’
그녀는 클로드가 치료소의 개관에 기뻐했기 때문에 기뻤다.
클로드가 찬란한 사람이었기에 찬란하다 느꼈다.
그리고, 가슴이 시린 이유는…….
카리나는 더는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마침내 길고 긴 연설이 끝나고, 인파가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특히 오늘 행사의 주역들은 모두 카리나와 친밀한 사이였기 때문에 아이들의 손을 꼭 쥔 채 기다려야 했다.
‘……?’
카리나도, 아이들도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향해 걸어온 건 오직 클로드 한 명뿐이었다.
클로드의 뒤에 서 있는 난감한 표정의 베리티가 무어라 말하는 게 들려왔지만 들리지 않았다.
오직, 클로드의 존재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잠깐 시간을 내줄 수 있나.”
“네, 네.”
카리나는 정신없이 아이들을 체스에게로 맡긴 이후 클로드를 따라나섰다.
클로드는 한적한 정원으로 걸어갔다.
아직은 앙상했지만 봄의 기운이 조금씩 돋아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정원이었다.
카리나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클로드가 할 말을 예상해서라거나, 예상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클로드가 자신과 너무 가까이 서 있어서였다.
“……고백할 게 있다.”
클로드는 카리나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마치, 그녀의 반응을 두려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간 나는 잘난 척 말을 해오면서도 줄곧 의심했었다. 과연 내가 시도하려는 게 맞는지…… 괜한 아집이 아닌지. 그 성과를 보지도 못한 채 죽는 게 아닐지…….”
카리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 저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동안 카리나는 클로드가 그 자신의 길에 확신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비록, 그 가능성이 희박해 보여도 도전 자체에 의의를 두고 노력하는 남자라고.
‘완전히 착각했어.’
카리나는 쓰게 생각했다.
클로드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불가능해 보이는 계획의 성공을 절실하게 바랐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줄곧 불안해했고.
그래서 그동안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한 채, 혼자서 무거운 짐을 감당해온 것이다.
“전혀…… 전혀 몰랐어요.”
카리나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클로드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절대로…….”
“티가 나지 않았다니 다행이군.”
클로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자존심이 있으니, 불안하다고 말하고 다닐 수는 없지.”
클로드는 자존심 때문에 숨겼다고 말했지만, 카리나는 그 반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약 클로드가 자존심 때문에 남들이 알려야 할 사실을 숨기는 사람이었다면 카리나는 진즉 남부를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클로드는…….
‘진솔하고, 친절하고, 상냥하고…….’
카리나의 얼굴이 별안간 붉어졌다. 갑자기 자신이 전혀 상관없는 생각에 빠져들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대가 소중해.”
“……!”
카리나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그대가 소중해.’
클로드의 말이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착각하지 마.’
카리나는 자기 자신을 꾸짖었다.
클로드는 단순히,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 말했을 것이다.
그녀가 바라는, 당치도 않는 뜻이 아니라…….
하지만 왜 이렇게 그 사실이 슬프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카리나는 이제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카리나는 알았다.
왜 클로드를 볼 때마다 심장이 무서울 정도로 빨리 뛰는지, 왜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는 구석구석마다 불에 덴 것처럼 달아오르는지, 그리고 왜 자신의 작은 착각이 가슴 아프게 느껴지는지…….
‘난, 클로드를 사랑해.’
카리나는 속으로만 되새겼다.
절대, 입 밖으로는 낼 수 없는 말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