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응접실로 이동하면서 카리나는 베리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체 누구길래……?”
“브리튼 양은 몰라도 되는 사람입니다.”
베리티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알려 주세요.”
카리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베리티를 자극하거나 설명을 강요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도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베리티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자는 제, 스승이었습니다.”
“스승이요?”
“선생이라고 해 두죠.”
베리티는 코웃음을 쳤다.
“학교의 규율이었어요. 저자는 스승, 저는 도제.”
“선생이나 교사와는 다른 개념인가요?”
“저희는…… 다른 선생님들의 가르침에는 불복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직속 스승에게는 결코 불복할 수 없었죠. 저자가 제…….”
베리티는 말을 잇지 못했다.
카리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언제나 굳건해 보이던 베리티에게도 상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를 만든 장본인은, 맨하단 박사라는 자일 테고.
잠시 후.
그들은 응접실에 도착했다.
카리나는 베리티에게 같이 들어가도 되겠냐고 물었고, 베리티는 흔쾌히 카리나의 제안을 수긍했다.
“제가 지나치게 행동하면 막아주세요. 그 인간을 보는 순간, 목을 분질러버릴지도 모르니까.”
“약속할게요.”
카리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안심해요. 그 인간이 베리티의 목을 분질러 버리려고 해도, 제가 막을 테니까.”
“오, 그럴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죠?”
“그 인간은…… 뼛속까지 귀족이거든요. 차라리 암살자를 보내 제 물에 독을 탄다면 모를까.”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귀족이었군요.”
귀족들이 직업을 가지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특히 벌이가 좋은 의사는 하급 귀족들이 뛰어드는 경우가 잦았다.
에이드리안처럼 학자가 되는 경우도 많았고.
‘하지만, 의사학교의 교사까지 할 줄이야…….’
평민도 가르칠 수 있는 학교의 교사는 비교적 천한 신분 취급을 받았다.
카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몰락귀족이었나요?”
“아뇨.”
베리티가 기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려 후작이었죠. 저도 다른 학생들처럼, 기껏해야 남작이나 기사가 스승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무려 후작이었다니.
그런 자가 베리티를 괴롭히려고 마음먹었다면 인생 자체를 망가뜨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조심해요, 브리튼 양.”
베리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자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까.”
맨하단 후작은 흰색의 염소수염을 기르고 있는, 날렵해 보이는 중노년의 남자였다.
“잘 지냈느냐, 베리티.”
“……오시느라 고색 많으셨습니다, 맨하단 후작 각하.”
딱딱한 호칭에 맨하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학교를 졸업한다 한들 나와 네 관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예전처럼 스승으로 부르려무나.”
“싫습니다.”
베리티는 딱 잘라 거절했다.
예의조차 차리지 않은 거절에, 맨하단은 전혀 놀라지 않은 듯했다.
“……여전하구나, 네 성질은.”
카리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후작 각하, 용건을 빨리 말해 주시겠어요? 솔베타인 선생님은 바쁜 분이셔서요. 그런 분이 이런 잡담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만 해도, 굉장한 호의라고 생각합니다.”
맨하단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문제가 있다면 찾아오길 잘했군. 내가 베리티에게 도움이 될 걸 가지고 왔지.”
“…….”
카리나는 맨하단을 경계하며 노려보았다.
그 무엇이든 그가 가지고 오는 건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베리티는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 카리나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맨하단 후작은 손을 까닥여 자신이 데려온 시종이 무언가를 가져오도록 했다.
시종은 사람 머리 크기의 검은 상자를 가지고 왔는데, 겉으로 보기엔 내용물이 대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달깍.
상자가 열렸다.
그 안에서 나온 건…….
‘서류?’
카리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건 웬 서류였다.
그것도 한 장짜리.
자세히 보니 굵은 글씨체로 제목이 적혀 있었다.
[의사 선서.]
카리나는 더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사실, 그녀는 이 안에 뱀이라도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온 건 이런 영문 모를 종이라니.
맨하단 후작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치료소장이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앞으로 네가 나아갈 방향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구나. 나는 바빠서 네 곁에 머물지는 못하지만, 네가 긴 세월 동안 배우고 익힌 가르침이 여기 있으니 종종 참고하도록 하여라.”
침묵.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카리나는 힐끗 베리티를 바라보았다가, 소스라치고 말았다.
베리티의 얼굴은 아무런 표현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다짐이라도 한 것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겨우 이런 거로 먼 토르스까지 찾아오셨군요.”
“겨우 이런 거냐니. 네가 하늘과 땅, 그리고 네가 앞으로 치료할 환자들에 대고 맹세한 선서이지 않으냐.”
카리나는 둘의 신경전에서 잠시 시선을 돌려 의사 선서를 읽어보았다.
의사 선서는 그녀가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 용어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이내 그 내용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건…….’
카리나 입술을 깨물었다.
차가운 분노가 서서히 차올랐다.
‘이런 게, 의사 선서라고?’
의사 선서는 오직 힘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었다.
살아남았을 때 더 사회에 기여할 가치가 높은 이들부터 치료하라는 말을 거창한 용어들로 설명해 놓았는데, 한마디로 ‘귀족들을 위한 의사가 되어라’는 말이었다.
당연히 보기 좋은 미사여구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럼 뭐하나.
그 모든 의사로서의 의무와 가치들은 오직 힘 있는 자들을 위한 것들이었는데.
연이어 깨달음이 카리나의 머릿속을 스쳤다.
베리티는 일반적인 의사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학칙에 빈틈이 있던 의사학교에 편법으로 입학했다고 했다.
당연히 일반적인 학교가 아니었을 것이다.
‘귀족들을 위한 의사학교였구나. 베리티가 다녔던 곳은.’
그리고, 베리티의 속을 뒤집어놓기 위해 찾아온 이 작자는…….
‘베리티가 하려는 일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려는 거야.’
카리나는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베리티와 맨하단 후작은 설전 중이었다.
카리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창한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셋밖에 없는 응접실인만큼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카리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상자 속에서 ‘의사 선서’를 꺼냈다.
“지금 무슨……!”
그리고, 맨하단 후작의 만류를 무시하고 얄팍한 종이를 좍좍 찢어버렸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종잇가루가 될 때까지.
“이…… 무…… 무슨…….”
맨하단 후작은 기가 막힌 듯 말을 더듬었다.
카리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용건이 사라지셨으니, 돌아가시는 게 좋겠네요. 후작 각하.”
카리나는 마지막 두 단어를 비아냥거리듯 내뱉었다.
그녀는 제국의 유력 가문들을 모조리 외우고 있었다.
남부에 도움이 되는 정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려 후작임에도 그녀가 전혀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건…….
‘이름만 후작일 뿐, 오델 자작가보다도 별 볼 일 없다는 뜻이지.’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카리나는 고개를 돌렸다.
베리티가 몸을 흔들면서까지 시원하게 웃고 있었다.
잠시 후.
웃음을 마친 그녀는 승리를 만끽하듯 아주 천천히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
“평민한테 한 방 먹었으니…… 어디가서 얘기도 못 하시겠네요, 후작 각하.”
맨하단 후작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를 박차고 사라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겨울이 막바지에 도달했을 즈음.
마침내 치료소가 문을 열었다.
토르스 영지민이라면 누구에게나, 아무런 문턱 없이 열린.
카리나는 공작저의 정원을 가로질러 치료소로 향했다.
아직 대다수의 나무들은 이파리 하나 없이 앙상했지만, 지척까지 성큼 다가온 봄은 이젠 차갑지만은 않은 바람에서 느껴졌다.
카리나는 생각했다.
남부는,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그중 하나가 바로 치료소의 개관이었다.
‘늦겠어!’
카리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겨울이 끝나가면서 자연히 그녀가 준비하던 대규모 인재 모집도 다시 회의에서 부상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황태자 라테온이 황위에 올랐다는 점도 한몫했다.
이젠 황제가 된 라테온은 남부에 큰 선물을 가져왔다.
바로 선대 황제가 빼앗았던 영지 절반이었다.
클로드는 돌아온 영지에 크게 기뻐했지만, 카리나가 생각하는 가장 큰 선물은 따로 있었다.
바로 전 제국이 새로운 황제가 남부의 편을 들어주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