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에이드리안…….”
베리티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카리나는 더는 들어서는 안 될 듯한 느낌이 들어, 슬그머니 발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에이드리안과 베리티라니!’
아직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서로 만나기조차 싫어하던 앙숙이었는데, 어느새 청혼할 정도로 깊은 사이가 되다니.
동료 하녀들이 남녀 사이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면서 쑥덕거리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카리나는 자신의 연애사에 대해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렝케 경의 저택에서 하녀로 지낼 땐 그 어떤 남자도 고용주의 사생아인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리고 토르스에서는…….
그 누가 애 둘 딸린 젊은 과부와 연애를 하고 싶겠는가.
하지만 카리나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물론 연애란 것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토르스에 온 이후, 다양한 권리와 의무가 그 환상들을 밀어내었다.
카리나는 아이들을 돌봐야 했고, 가신으로서 일해야 했고, 버리올에 대척해야만 했다.
‘결혼 선물이나 준비해둬야겠어.’
카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해보니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여태까지는 조금 여유로웠다 치자. 하지만 영지민들을 위한 치료소가 확정된 이상, 카리나가 해야 할 일이 적진 않을 것이다.
‘에이드리안이 기부한다고 했으니 재정이야 넉넉하겠지만…….’
그러나 카리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베리티와 클로드는 일을 절대 허투루 하지 않았다.
제국 그 어디보다도 성대하고 완벽한 치료소를 만들고자 할 게 틀림없었다.
‘그걸 알고 있으니까, 에이드리안이 유산을 모조리 기부하겠다고 한 거겠지.’
물론 에이드리안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돈에 완전히 초연한 사람 역시 아니었다.
당장 연구를 하려면 돈이 필요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큰돈을 내놓겠다는 건, 정말로 베리티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카리나는 진심으로 에이드리안에게 감탄했다.
동시에 감사하기도 했고.
그 덕분에, 클로드가 반년간 지니고 있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될 것이다.
* * *
시간이 흘러 어느덧 기사 전용 치료 시설은 영지민들을 위한 치료소로 탈바꿈했다.
내부 시설을 새롭게 단장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공사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크게 많은 품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곧 공작가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아무도 안 온대요. 단 한 명도!”
흥분한 베리티가 탁자 위에 서신들을 냅다 던져버렸다.
“조건은 수도보다 훨씬 잘 주고 있는데……!”
베리티는 에이드리안과 약혼했다는 편지를 에이드리안의 아버지, 오델 자작에게 보냈다.
오델 자작은 뛸 듯이 기뻐하며 베리티에게 막대한 값의 약혼 예물들을 보내왔다.
당연히 그 예물들은 모조리 팔려 치료소에 들어갔다.
그래서 베리티가 그간 눈독을 들이고 있던 전 제국의 유능한 의사들에게 파격적인 영입 조건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정해, 솔베타인 선생. 이미 예상했던 일이니까.”
흥분하는 베리티와 반대로, 클로드는 실망한 내색 하나 없었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어조였다.
저절로 가슴이 아려왔다.
‘이미 많이 겪어본 거야. 클로드는…….’
사실, 카리나 역시 새로운 기사단을 준비할 때 비슷한 일을 겪었다.
‘하지만 그건 한 번이었지. 클로드는…… 7년이었을 테고.’
그 무력감이 카리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반면, 베리티는 전혀 카리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각하, 토르스는 지금 누구나 일하고 싶어 하는 영지입니다!”
베리티의 총명한 눈이 분노로 활활 불타올랐다.
“그런데 이런 조건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건…….”
“베리티, 너무 흥분했어.”
에이드리안이 황급히 베리티를 달랬다.
이제 그들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베리티는 그의 만류를 무시하고 말을 이어 나갔다.
“순전히 저 때문입니다. 그것 말고는 이유가 없어요.”
“……네?”
카리나는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베리티는 무척 실력 좋은 의사였다. 돌팔이들과는 사이가 당연히 나쁘긴 했지만, 그녀가 남부로 부르고 싶어 할 정도면 제법 실력들이 있을 테니 걱정할 게 없다.
“저는 여자니까요.”
베리티는 아무렇지도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지만,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는 못했다.
“수도에 있을 때, 의사가 되려는 여자는 저 한 명뿐이었어요. 다행히 학칙에 규정이 없는 의사학교를 찾아 입학하긴 했지만, 다니는 내내 적의에 시달렸죠. 별로 놀랄 것도 아니에요.”
“…….”
카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그녀와 아이들은 여자 의사를 처음으로 보았다.
렝케 경의 저택으로 찾아오는 의사는 매번 바뀌곤 했는데, 모두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토르스에는 제 기반을 쌓아두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공작 각하께서 절 지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아.”
클로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베타인 선생의 실력이라면, 어딜 가든 결국엔 진가를 발휘했을 테니까.”
“과연 그럴까요?”
베리티가 씁쓸하게 웃었다.
“제가 아무리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고 환자를 치료해도 전 항상 남자 동기들보다 뒤에 있어야 했습니다. 출세할 기회는 모두 그들이 가져갔고요. 그래도 결국엔 인정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다 제 착각이었나 봅니다.”
베리티는 씁쓸하게 말을 끝냈다.
카리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여태까지 베리티가 탄탄대로를 걸은 젊은 의사라고만 생각해왔다.
하지만 베리티는, 그 누구보다도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자네를 무시하는 인력은 아무리 실력이 좋다 한들 필요 없어.”
“……!”
베리티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클로드의 말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처럼.
“치료소의 총책임자는 바로 솔베타인 선생이니까. 명령에 불복종하는 자는 없는 것만 못하지.”
그는 베리티의 감사 인사를 만류하면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인력이 정확히 얼마나 필요한 거지?”
베리티는 잠시 당황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토르스의 영지민을 감당하려면 의사가 열 명은 필요합니다. 잡일을 맡을 직원들은 교육하면 되지만, 의사는 그게 아니니까요. 의료 지식이 최소 5년은 있어야…….”
“간호사는 필요 없나요?”
카리나는 불쑥 끼어들었다.
일반 직원이 아닌, 전문 의료 인력은 비단 의사만 필요한 건 아닐 것이다.
치료소를 위한 자료 조사 중 카리나의 눈에 들어온 단어가 바로 ‘간호사’였다.
간호사는 수도의 몇몇 대형 치료소에서 시도된 제도였는데, 그 치료소들엔 성공적으로 정착했지만 비용 문제 때문에 일반 치료소들까지 퍼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재정이 넉넉한 상황이니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베리티가 고개를 저었다.
“간호사 또한 전문적인 교육이 필요해요. 제가 그걸 일일이 할 수가 없…….”
“간호사를 모집하면 되잖아요?”
카리나는 베리티가 조금 답답해졌다. 수도의 치료소를 그만둔 간호사들도 있을 것이고, 그밖에도 여러 방법으로 의료 지식을 습득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지식이 의사까지 미치지는 못해도, 일손인 하나라도 급한 새로운 치료소에는 충분히 도움이 된다.
하지만 베리티는 카리나가 알지 못하는 문제들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반박하는 걸 보면.
“그게 무슨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에요. 대부분 수도의 직장에 만족하기 때문에, 거기서 쫓겨났다면 문제가 있는 간호사라는 뜻입니다. 그런 자들을 함부로 받아들일 수는 없어요.”
“그럼…….”
카리나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조산사는 어떨까요?”
베리티의 눈이 크게 열렸다.
그녀는 이번에는 아무 반박도 하지 않은 채, 카리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실력 있는 조산사 중에 의사가 되고 싶어 하는 자들이 있다는 자료를 봤어요. 그들을 수습 의사로 고용하는 건 어떨까요? 교육은 차차 해 나갈 수 있을 거고요.”
“조, 좋은 생각이네요.”
베리티가 말을 더듬었다.
카리나는 미소 지었다.
마침내 정답을 찾아냈다.
조산사들은 모두 여성으로, 오랜 기간 출산을 돕는 일을 해 왔다.
오히려 책만 들여다보는 의사들보다 응급 처치에 능하기도 했다.
출산에는 다양한 돌발상황이 일어나니만큼, 여러 외과적 시술에 익숙한 탓이었다.
당연히 약재에 관한 지식도 풍부했다.
베리티가 찾던 최적의 인재였다.
일주일 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의사에 대한 꿈을 품고 있던 조산사들이 토르스로 몰려들었고, 개중엔 웬만한 의사 못지않은 지식을 지닌 이들도 있었다.
베리티는 뜻과 지식이 동등한 동료를 만나게 되자 행복해했다.
“다 브리튼 양 덕분입니다.”
베리티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일과를 마치고 한숨 돌릴 때였다.
그녀가 카리나를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불쑥 뱉은 말이었다.
“또 그러신다.”
카리나는 겉치레라고 생각하면서 웃어넘겼다.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베리티가 단호하게 말했다.
“브리튼 양이 아니었다면…… 전 아직도 자기혐오에 빠져 있었을 겁니다.”
“……저어.”
카리나가 무어라 위로를 하려 할 때였다.
치료소의 업무를 위해 고용한 직원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맨하단 박사라는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솔베타인 선생님.”
“……!”
베리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의 눈에 분노와 원망이 일렁였다.
“도, 돌려보낼까요?”
심상치 않은 기류를 의식한 직원이 물었다.
“아니, 만나야겠어.”
베리티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대체 무슨 낯짝으로 이곳에 기어온 건지, 한 번 들어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