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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입양합니다 (122)화 (122/145)

<122화>

“……!”

카리나의 휘둥그레진 얼굴을 보고, 베리티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놀라셨습니까?”

“네.”

카리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평민들을 위한 치료소라고 하셨으니까요.”

본디 클로드가 구상한 치료소는 영지민 전체를 위한 치료소였다.

사실 영지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게 바로 평민인만큼, 대놓고 평민들을 위한 진료소를 만든다면 귀족들이 심한 반발을 일으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클로드에게도 해가 갈 거야.’

카리나는 입술을 짓이겼다.

“아, 제가 그렇게 생각이 없어 보였나요?”

베리티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카리나의 머뭇거리는 반응에도 전혀 기분이 상한 듯하지 않았다.

“당연히 영지민 전체를 위한 치료소가 되겠죠. 하지만 높으신 분들은…….”

“굳이 평민들과 섞이지 않으려고 하겠네요.”

“정확합니다.”

클로드와 아스트리드가 귀족들에 대한 카리나의 생각을 많이 바꾸어주었다고는 하나, 기존 인식을 완전히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군다나 카리나는 자신에 대한 귀족들의 달라진 태도가 토르스 공작가의 가신이라는 특수한 직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에요.”

“좀 우습죠? 각하께서 예전에 제게 넌지시 말씀하신 적이 있거든요. 영지민 모두를 위한 치료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당연히 말도 안 된다고 했어요.”

베리티가 말을 이어 나갔다.

“말 그대로, 저를 갈아 넣어야 하잖아요! 그런 대형 치료소를 짓는다면 거기에 얽매이게 될 텐데, 저는 그런 삶은 원치 않았어요.”

“그럼, 지금은 왜……?”

“부인이 데려온 환자를 치료하면서…… 많이 느꼈어요. 제가 원하던 건…… 바로 이런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이라고.”

카리나는 어리둥절해하는 얼굴로 다시 물어보았다.

“텟사 씨가 뭔가 많이 특이한 환자였나요?”

“아뇨. 매우 평범했습니다. 매우 평범하게…… 돌팔이 의사 탓에 증세가 악화된 환자였죠.”

“…….”

입맛이 썼다.

롤랜드 역시, 텟사와 같은 상황이었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환자들이 많다는 걸, 모르시진 않으셨을 텐데요. 솔베타인 선생님은.”

“……알죠. 알고 있었어요.”

베리티의 눈이 어둡게 침잠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제 손으로 공을 들여 치료해보니…… 제가 잊고 있던 것들이 떠오르더군요.”

“텟사 씨 같은 환자들이요?”

“아뇨. 제가 의사가 된 이유 말입니다.”

베리티의 목소리가 열기로 달아올랐다.

“제가 원래 의사가 되고자 했던 건…… 그런 돌팔이들에게서 피해자들을 구하기 위해서였거든요.”

* * *

그날 저녁, 베리티는 자신의 결심을 클로드에게 알렸다.

당연히 클로드는 크게 기뻐했다.

그는 티를 별로 내지 않으려 했지만, 카리나는 일전에 영지민 모두를 위한 치료소를 만들고 싶다는 클로드의 소망을 들은 적이 있었다.

“솔베타인 선생, 나는 자네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얘기를 먼저 꺼낸 건…… 예상외로군.”

“그럴 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베리티가 기분 좋게 대답했다.

“빨리 회의를 소집해야겠어.”

클로드의 행동력은 그간 카리나가 익히 본 그대로였다.

회의에는 예전과 다르게 많은 수의 가신들이 참여했다.

대부분이 평민 출신이었기에, 전 영지민들을 위한 치료소라는 말에 크게 찬성했다.

단 한 명, 치체스터 경을 제외하고선.

“평민들을 위한 치료소라니…… 실력 있는 의사라면 아무도 오지 않으려 들 겁니다.”

“치체스터 경, 영지민을 위한 치료소다. 표현에 주의하도록.”

“……각하.”

늙은 시종장은 피로한 얼굴로 이마를 문질렀다.

“진심으로 말씀드립니다.”

들떠 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새로운 공작가의 일원 중엔 치체스터를 대놓고 노려보는 이들도 있었다.

“이미 남부는 지나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제위에 오르시기 전까지,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건 위험합니다.”

“영지민들을 위한 치료소를 짓는 게 반역 행위는 아니야.”

“귀족들이 반발할 거라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각하께서 지금보다 더 힘들어하시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

클로드는 조금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카리나도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클로드는 그 자신을 위하는 사람들에게 약했다.

아마 그런 이들이 몇 없기 때문인 듯했다.

치체스터 경도 그 몇 없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때, 뜻밖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저도 일단 귀족인데요…… 전 괜찮은데요?”

에이드리안이었다.

“에이드리안!”

베리티가 눈을 반짝 빛냈다.

‘언제부터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된 거지?’

카리나는 의아하게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과 베리티는 결코 성격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으나 불같은 기질을 지녔고, 각각 다른 면에서 괴짜였다.

이렇게 빨리 친해졌다는 점이 의외로 느껴졌다.

“모두를 위한 치료소잖습니까? 귀족을 배척하는 것도 아니고. 뭐…… 불평 많은 인간들 때문에 정 걱정된다면, 특실을 몇 개라도 만들어놓으세요. 아주 비싼 가격으로 해서.”

“그럼 운영비도 충당되겠군요! 좋은 의견 고마워…… 요, 에이드리안 경.”

베리티와 에이드리안은 서로 미묘한 시선을 나누었다.

‘……아.’

카리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단 그녀만의 심증이 아니었는지, 거의 모든 시선이 에이드리안과 베리티를 향해 쏠렸다.

에이드리안이 헛기침을 했다.

“그러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뭐, 불만이 있다 한들 뭐 어떻습니까. 무슨 명분으로 영지민 모두를 위한 치료소를 반대하겠어요?”

“반대할 이유야 많습니다.”

치체스터가 이번에도 반박했다.

“단지 평민과 함께 있기 싫다는 것만으로도 고위 귀족에겐 충분한 반대 조건이 되지요. 에이드리안 경도, 그걸 모르시진 않을 것 같습니다만.”

에이드리안이 가벼운 미소를 띠었다.

“반대할 이유야 있겠지만…… 내세울 명분이 있겠습니까?”

“없지.”

클로드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본인의 기분이 나쁘다는 둥 이유야 많겠지만, 내세울 만한 명분은 단 하나도 없다.”

“그 말은.”

에이드리안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감히 공작 각하께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대적할 수 있는 귀족이 있다는 건데…… 전 딱 한 명밖에 안 떠오르는데요. 바로…….”

에이드리안은 관심을 즐기는 듯 잠시 뜸을 들였다.

“황태자 전하입니다.”

“……!”

동요가 가신들 사이에 퍼져 나갔지만, 클로드의 얼굴엔 미미한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도리어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경의 말이 맞아. 그리고 황태자 전하께선 이런 사소한 일에 토를 다실 분이 아니지. 그럼, 이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봐도 되겠나?”

“예!”

에이드리안이 경쾌하게 대답했다.

치체스터 경은 아직 불만이 많은 듯했지만, 단 한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잠시 후, 회의는 간단한 사항만 몇 가지 정하고 끝났다.

주로 아직 치료 시설에 기거하고 있는 기사들은 어떻게 할지와 향후 기사단의 부상자들은 어디서 치료할지 정도였다.

회의가 끝나자 가신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카리나는 습관처럼 그들 모두를 보내고 나가려다가, 자기보다 늦게 남아 있는 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에이드리안과 베리티였다.

‘……?’

조금 호기심이 생긴 카리나는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었다.

둘은 카리나가 아직 회의실 안에 있음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서로만의 대화를 시작했다.

“고마워, 에이드리안.”

“별일 안 했는데. 그나저나 치료소를 만들면 엄청 바빠지겠네.”

“그럴 만한 보람이 있는 일이야.”

“…….”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에이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결혼하자, 베리티.”

카리나는 귀를 의심했다.

둘 사이의 기류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청혼이라니.

베리티 역시 그녀와 생각이 별로 다르지 않은 듯했다.

“……뭔 개소리야?”

그는 품에서 편지 봉투를 하나 꺼내더니, 편지를 펼쳐 베리티에게 건네주었다.

“읽어봐.”

순식간에 편지를 읽은 베리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너, 내 얘길 가문에 알렸어?”

“아니. 우리 아버지가 보기보다 발이 넓으셔서, 내 소식도 전혀 알 수 없는 경로로 아시거든.”

“……그래서, 결혼해야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네게 남기신 유산을 받을 수 있으니까…… 나랑 결혼하자고? 지금?”

카리나는 이마를 짚었다.

정말 세상에서 가장 멋없는 청혼이었다.

유산을 받기 위해서 결혼하자니.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단 한순간 만에 바뀌었다.

“그래야 내가 그 유산을 모조리 치료소에 기부할 수 있으니까요, 솔베타인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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