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입양합니다 (117)화 (117/145)

<117화>

클로드의 뿌리 깊은 상실감이 카리나를 해일처럼 덮치고 지나갔다.

카리나가 여태까지 겪어 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카리나는 그 감정이, 무척이나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클로드를 붙잡았다.

“……클로드.”

클로드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후회하는 듯한 목소리가 그의 잘생긴 입에서 흘러나왔다.

“흉한 꼴을 보였군.”

“흉하면 뭐 어때요.”

카리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좀 흉한 모습을 제게 보인다고 해서, 누가 다치거나 죽나요? 토르스가 약해지나요?”

“…….”

클로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안에서 일렁이던 고통과 후회는, 한결 가라앉아 있었다.

“그 당시의 클로드는 분명 무능력했을지도 몰라요. 분명, 공작이 되기에도 한참 부족했을 거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클로드가 잘못하고 있는 건 절대 아니죠.”

클로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알고 있어.”

카리나는 안도했다.

클로드에게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구구절절 말해 줄 필요는 없는 듯했다.

“아는 사람이 왜 그래요?”

“내가 지금 제대로 한다고 해서, 과거가 달라지진 않으니까.”

아.

그제야 카리나는 클로드의 상실감이 왜 이렇게 낯설지 않게 느껴졌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그에겐, 그 어떤 말도 소용이 없으리라는 것도.

‘내가, 롤랜드와 멜리사를 잃었더라면…….’

비록 소설 속 내용일 뿐이라고는 하나 카리나는 멜리사가 죽고 롤랜드는 쓸쓸하게 성장하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만약, 저택에서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분명 클로드와 전혀 다를 게 없는 상황에 부딪히고 말았을 것이다.

클로드와 다른 점이라면, 카리나에게 두 번째 기회는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정도일까.

소설 속 카리나는, 렝케에게서 풀려난 이후에도 롤랜드에게 보호받기만 하는 무기력한 삶을 이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만약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아 그런 삶을 살았더라면…….

카리나는 지금의 클로드보다, 훨씬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롤랜드는…….’

지금의 클로드와 같은 모습일 것이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지키고 구해 봤자 죽은 멜리사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

카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예 몰랐으면 모를까, 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바로 클로드를 홀로 내버려 두는 것.

그녀는 조용히 문가로 향했다.

클로드가 걱정되기는 했다. 당연히 그의 옆에서 다독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았다.

클로드가 신뢰하고, 능력을 인정하는 토르스의 가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클로드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들어준 것으로 자신의 역할은 모두 끝났다.

이제 이곳에 계속 있어 봤자, 그의 무력함을 자극한 역할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카리나는 이를 악물며 문고리를 잡았다.

“가지 마라.”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돌아섰다.

클로드의 시선이, 그녀의 시선과 부딪쳐 놓아주지 않았다.

카리나는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침묵이 흘렀다.

카리나는 클로드의 대답을 더 기다리는 대신, 본능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다.

그녀는 클로드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

클로드의 몸이 일순간 굳었다.

카리나도 클로드도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다른 함의가 있는 접촉은 아니었다.

단지, 그의 신경을 조금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을 뿐이었다.

카리나는 그를 오래 안고 있지 않았다.

아주 잠깐.

겨우 수 초 만에 그녀는 클로드에게서 물러서서, 그를 올려다보면서 미소 지었다.

“놀랐죠?”

“…….”

클로드는 크고 거친 손으로 그 자신의 입을 가렸다.

얼굴이 달아오른 것이, 많이 당황한 듯했다.

카리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다행히 클로드는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단지 당황했을 뿐이지.

그리고 그를 당황시키는 게, 바로 카리나가 원했던 바였고.

그녀는 자신의 책상으로 성큼 걸어갔다.

마정석과 관련된 옛 문헌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클로드가 관심 있어 할만한 주제가 아닌 게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상관없었다.

카리나의 목적은 클로드의 신경을 과거에서 현재로 돌리는 것이었으니까.

그녀는 문헌을 차곡차곡 정리해, 클로드에게 건네주었다.

“도와주세요.”

“…….”

클로드는 말없이 문헌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눈빛은 깊어지고 입매는 단단히 다물어져, 카리나가 잘 아는 모습이 되었다.

바로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해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카리나는 팔딱거리는 가슴이 점차 진정되어 가는 걸 느꼈다.

‘다행이야.’

클로드의 약한 모습을 처음 보았기에, 그리고 그의 역린을 알게 되었다.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카리나의 현재 상태는 단순히 당황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클로드가 안타까웠다.

평생 부모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릴, 그리고 아스트리드가 그렇게 즐거워하는 폭설을 공포의 대상으로 받아들일 그가.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가슴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드는 밝고 곧은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아니야.’

카리나는 자신이 조금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이내 깨달았다.

클로드는 그가 겪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밝고 곧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 시련을 그 나름의 방식으로 극복했기에, 지금과 같은 훌륭한 군주가 된 것이다.

클로드가 극복하지 못한 과거의 파편들은, 모두 차가운 비수가 되었지만 남이 아닌 그 자신을 향했고.

‘…….’

카리나는 물끄러미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생각에 잠긴 채 문헌을 빠른 속도로 읽어나가고 있었다.

오른손으론 가벼운 마법식을 써 보는 게, 카리나와 전혀 다른 방법으로 분석하는 모양이었다.

카리나는 홀린 듯이 클로드를 바라보는 자신을 깨닫고 소스라쳤다.

‘사람이 구경거리도 아니고!’

다행히 클로드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만약 눈치챘더라면 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클로드가 단순히 롤랜드를 주시했다는 이유로 그를 의심했던 자신이 떠올라 얼굴이 절로 달아올랐다.

‘진짜, 아무 이유 없이 계속 바라보고 있을 수도 있는 거구나.’

괜히 민망해진 카리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남은 문헌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방안은 두 사람이 종이 넘기는 소리를 제외하면 쥐 죽은 것처럼 조용했다.

서로를 잔뜩 의식하고 있는, 두 남녀를 제외하면.

* * *

놀랍게도, 눈은 하루 만에 녹아버렸다.

‘며칠은 갈 줄 알았는데.’

남부가 따뜻하긴 따뜻한 모양이었다.

아스트리드는 아쉬워했지만 클로드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

클로드를 떠올린 카리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날 이후, 틈만 나면 클로드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무척 당혹스러웠다.

그럴수록 카리나는 더더욱 실력을 향상시키는 데 매달렸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브리튼 양.”

카리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치체스터 경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각하께서 부르십니다.”

“각하께서요?”

카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클로드가 그녀를 부르는 것 자체는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치체스터 경이 겨우 그 말을 전하기 위해 온 건 제법 놀랄 일이었다.

“예. 상당히 놀라운 일이 일어나서…….”

“네?”

“가 보시면 압니다.”

카리나는 치체스터 경을 따라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클로드의 사무실이나 침실, 회의실이 아닌 공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

클로드는 물론, 체스와 아이들의 익숙한 뒷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비록 치체스터 경은 침착해 보였나, 원체 침착한 노장이다.

그녀는 잔뜩 긴장하며 공터로 반쯤 뛰어가다시피 걸었다.

잠시 후, 공터에 도착한 순간.

“……!”

카리나의 눈이 크게 열렸다.

잔뜩 먼지를 뒤집어쓴 클로드와 체스의 행색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그들의 발치에 놓인 물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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