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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입양합니다 (116)화 (116/145)

<116화>

입안이 바싹 말랐다.

카리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에 실린 무게감이 카리나를 짓눌러 왔기에.

‘무능력이라니.’

그보다 더 클로드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그간 클로드는 토르스를 혼자의 힘으로 지탱해 오지 않았는가.

지난 반년 동안 사정이 예전보다야 나아졌다고는 해도, 완전히 같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직감했다.

이 모든 게, 그녀가 새까맣게 몰랐던 클로드의 과거와 관련이 있는 일이라는 걸.

‘뭐라고 말해야 할까…….’

클로드를 위로해 주고 싶었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일에 관해 가타부타 말을 얹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클로드가 이렇게나 힘들어하는 상처를 후벼 파고 싶지는 않았다.

클로드의 눈에는 아직도 고통과 공포가 일렁였으니까.

“……미안하다. 괜한 말을 했군.”

클로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카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는 쪽이 정확할 것이다.

클로드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차마 표현 못 할 감정에 숨이 막혀왔다.

‘어떡하지.’

카리나는 입술을 짓이겼다.

자신이 클로드에게 섣불리 다가갔다간, 그의 자존심만 다치게 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위태위태한 지경의 사람을 그냥 보고만 있는 것도 안 될 일이었다.

“괜찮아요.”

카리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한마디를 겨우 내뱉었다.

“진짜로요. 저도…… 무능력하다고 느낄 때가 많으니까요.”

“부인이?”

클로드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부인이 어떻게 무능력하다고 할 수 있지? 남부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일 텐데.”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죠.”

카리나는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토르스에 머무르게 된 이유는 순전히 클로드 때문이에요.”

“……!”

클로드의 텅 빈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빈말이 아니에요. 위로도 아니고요. 그러니까…… 그만큼 본인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그대도 마찬가지야.”

클로드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가벼워졌다.

“상황이 반대였다면 나 역시 그대 때문에 이곳에 남았을 거다.”

“정말인가요?”

카리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 그대가 내게…… 내 영지에 해 준 것들을 생각하면, 황제 폐하께 작위를 청해도 될 정도야.”

“과찬이시네요.”

클로드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무엇을 생각하는 지 알 수 없는 눈으로 카리나를 지그시 응시할 뿐이었다.

“오늘 추태를 부려 미안했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더한 꼴을 남들에게 보일 뻔했군.”

“뭐 어떤가요.”

카리나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었다.

“상관없잖아요. 좀 힘들다 한들.”

“그러는 그대야말로.”

클로드는 잠시 뜸을 들였다.

“약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미안해했던 것 같은데.”

“…….”

정확한 지적이었기에, 카리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그랬는지 궁금하겠지.”

카리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궁금하지는 않았다.

카리나에게 중요한 건 무엇보다도 클로드의 안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 운을 뗀다는 건, 무언가를 털어놓고 싶다는 신호였다.

“7년 만이다. 토르스에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린 건.”

“7년 전…….”

카리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단 한 번, 클로드로부터 들은 기억이 났다.

‘……!’

마침내 기억을 완전히 떠올린 카리나의 눈이 경악으로 흔들렸다.

7년 전은 바로 선대 공작 부부가 죽은 해였다.

“당시…… 나는 어렸다. 철도 없었고. 그때의 내게 비하면, 지금 아스트리드는 그야말로 다 자란 숙녀지.”

클로드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자조하는 기색을 띠고 허공에 울려 퍼졌다.

카리나는 클로드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시퍼렇게 날이 선 비수 같다고 생각했다.

그 자신의 가슴을 노리는.

클로드가 가슴 깊숙한 곳에 간직해 둔 비수들이었다.

자그마치 7년 동안.

* * *

7년 전.

토르스는 저 옛날 명성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굳건한 영지였다.

젊은 나이에 결혼해 아들을 낳은 공작 부부 역시 현명하게 공작령을 다스렸다.

클로드 데비아탄 토르스가 일개 시골 기사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책임감을 가지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작위를 물려받으려면 삼십 년은 흘러야 할 터이니, 마정석을 세공하고 마물을 물리치는 소임만 다하면 되었던 것이다.

공작 부부는 그런 클로드를 걱정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직은 어리게만 느껴지는 아들의 어깨 위에 무거운 짐을 나누어 주고 싶지는 않았기에 내버려 두었다.

스무 살 청년은 원래 혈기왕성한 게 장점이라고 생각하면서.

제국은 평화로웠고 공작 부부는 건강했다.

아들의 철없는 행보마저도 응원할 여유가 그들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그들 자신은 물론이고 제국의 그 누구도 공작 부부의 안위를 의심하지 않았다.

남부에, 기상 이변으로 인한 폭설이 내리기 전까지는.

“……지금, 뭐라고 했나?”

클로드는 헐레벌떡 달려온 기사들을 향해 거칠게 되물었다.

침통한 대답이 들려왔다.

“각하와 마님께선…… 눈 덮인 영지를 시찰하다가 고립되셨습니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몇 년에 한 번씩, 남부에 눈이 쌓일 정도로 많이 내리기는 했다.

하지만 이런 폭설은 처음이었기에, 공작 부부는 영지 구석구석을 걱정하면서 직접 시찰에 나섰다.

그들은 클로드도 데려가려고 했지만, 클로드는 공작저 전체를 보호할 마도구 작업에 한창 집중하고 있어 거절했다.

“당장 수색대를 보내.”

“이미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전서구로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전갈만…….”

“직접 가겠다.”

클로드는 만지작거리던 마정석들을 내던졌다.

공작 부부는 마도구를 다룰 줄 알았다.

본디도 공작가는 대대로 마도구를 만들어왔고, 최근 들어 자신은 보다 진일보한 마도구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쌓인 눈을 빠져나올 수는 없어도, 어디에서나 보일 신호 정도는 쏘아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했다는 건 여간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는 걸 뜻했다.

잠시 후.

소식을 듣고 어설픈 발걸음으로 뛰어온 아스트리드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클, 클로드. 어머니랑 아버지가…….”

“괜찮아, 아스트리드.”

클로드가 애써 미소 지었다.

“우리 부모님이 어떤 분들이신데, 이깟 진눈깨비 정도는 훌훌 털고 계시겠지.”

“……정말요?”

“그래.”

클로드는 자기 자신에게 거는 주문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은 무사하실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하루를 꼬박 달려 도착한 곳은 설원이었다.

클로드는 전 토르스를 누비며 자랐기 때문에 이곳이 어디인지는 잘 알았다.

봄이면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여름이면 나뭇잎이 무성한 이곳은 깊은 계곡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발이 무릎까지 폭폭 빠지는 눈으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이곳 어딘가에 공작 부부가 갇혀 옴짝달짝도 못 하고 있다면…….

클로드는 마정석을 움켜쥐었다.

마법사들처럼 섬세한 마법을 다루는 재주 따윈 없었지만, 그래도 마정석을 조정해 폭발을 일으키는 건 숨쉬는 것보다도 쉬웠다.

쾅!

폭발이 일어났다.

잔뜩 쌓인 눈들이 허공으로 치솟더니, 물이 되어 흘렀다.

쾅! 쾅! 쾅! 쾅!

클로드는 멈추지 않았다.

계곡은 서서히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공자님! 그만하십시오! 그렇게 무리하시다간 공자님마저……!”

“…….”

클로드는 대답 대신 칼을 빼들었다. 시퍼런 칼날이 기사의 목을 노렸다. 붉은 선혈이 한 방울 눈 위로 떨어진 다음에야 클로드는 칼을 거두었다.

“입 조심해라. 그 다음엔 목을 아예 잘라버릴 터이니.”

수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클로드는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아낼 수 있었다.

서로를 보호하듯 껴안은 채, 얼어붙어버린 두 시신을.

* * *

긴 이야기가 끝났다.

카리나는 목이 꽉 멘 탓에, 단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토르스가 남부라서 다행이야.”

클로드가 웃었다.

그녀가 여태까지 들은 웃음소리 중, 가장 처절한 웃음소리였다.

“북부였다면 나는 매년 겨울마다 미쳐버렸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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