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카리나는 토르스의 상황이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완전히 놓인 건 아니었다.
아무리 내전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 한들 토르스의 전 신경은 제국의 정세에 쏠려 있을 것이다.
버리올이 움직이기에는 최적의 시기였다.
‘버리올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유는 단 하나, 아직 토르스의 상황을 모르기 때문이겠지.’
아무리 버리올이 카리나처럼 소설에 대한 기억이 있더라도 완전히 뒤바뀐 제국의 정세를 속속들이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카리나는 이 한가해진 상황을 휴가가 아닌, 기회로 받아들였다.
버리올에 맞서 더더욱 강해질 기회로.
‘겨우 평범한 마정석을 만드는 것에 만족할 순 없어.’
카리나는 마정석을 만드는 것에 대해 보고 배울 선례가 없었기 때문에, 클로드에게만 의지해왔다.
하지만 백 년에 한 번 정도는 카리나와 같은 사람이 나타난다고 하지 않는가.
분명 문헌이 존재할 것이다.
카리나는 그동안 자체적으로 문헌을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은 해 왔지만, 그럴 시간이 부족했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 * *
한 달이 흘렀다.
그동안 서늘한 가을이 물러나고 겨울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계절의 변화와는 반대로, 제국의 정세는 여전히 팽팽한 긴장 상태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라면, 황태자가 드디어 제국으로 돌아간 일 정도일까.
하지만 황태자가 황위를 이어받으려면 아직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한편, 옛 문헌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던 카리나는 자신의 생각이 정답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겨우 한 달 만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것이다.
물론 옛 문헌들엔 부정확하고 틀린 정보들이 많았다.
하지만 카리나가 새로이 발전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카리나는 이제, 마정석을 자신이 원하는 성질로 만들 수 있었다.
마력이 폭발하듯 발산되어 공격 마법에 알맞은 마정석, 반대로 천천히 뿜어져 나와 지속적인 효과를 유지해야 하는 마법에 알맞은 마정석, 기존 마정석과 비슷하나 훨씬 위력적인 마정석까지…….
카리나의 발전은 곧 롤랜드의 발전을 의미했다.
롤랜드는 새로운 성질의 마정석들에 정신없이 빠져들었고, 아이가 세공한 마정석은 클로드가 직접 지니고 다닐 만큼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둘의 발전에 가만히 있을 멜리사가 아니었다.
멜리사 역시 무섭게 성장해서, 이따금 카리나는 롤랜드와 멜리사가 함께 대마법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면 정말 좋을 텐데.’
소설 속 롤랜드가 고독했던 이유는,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롤랜드와 멜리사가 함께 대마법사가 된다면 둘은 서로를 이해하고 의지하면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일어날 시간이네.’
카리나는 망설임 없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랜 하녀 생활로 생긴 습관이었다.
비록, 기상 시간은 그때에 비해 훨씬 늦추어졌지만.
카리나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마시며 차가운 아침 공기에 반쯤 얼어가는 몸을 녹일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
카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아이들의 방과 자신의 방은 이어져 있으니 문을 두드리고 들어올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문을 두드릴 사람이 있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브리튼 양!”
문을 열어보니, 잔뜩 상기된 얼굴의 아스트리드가 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공녀님, 무슨 일이세요?”
“눈이야!”
카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밖에 눈이 쌓인 것 같기는 했다.
그제야 카리나는 첫눈이 낭만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카리나는 그런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예술에 조예가 깊은 아스트리드는 다를 것이다.
“소원 비셨어요, 공녀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스트리드가 어이가 없다는 듯한 어조로 되물었다.
“나는 어린애가 아니야. 그런 걸 믿는 나이는 훨씬 지났다고.”
“그럼……?”
“눈이 쌓였어!”
카리나는 더더욱 어리둥절해졌다.
둘의 대화 소리를 듣고 나온 롤랜드와 멜리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녀님, 눈이 왜요?”
“봐, 많이 쌓였잖아. 눈사람도 만들 수 있어!”
“눈사람을 만들고 싶으셨구나.”
카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제법 어린애 같이 느껴지긴 했지만, 아스트리드는 겨우 열두 살이었다.
당연히 눈사람을 만들고 싶어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구…….”
아스트리드의 어조가 침울해졌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온 건, 내가 엄청 어릴 때 이후로 처음이야.”
“정말요?”
카리나는 창밖을 확인한 후 놀라서 되물었다.
밖에는 눈이 한 뼘은 족히 될 정도로 쌓여 있었다.
북부의 기준으로도 적은 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보기 드물 정도로 많은 눈도 아니었다.
롤랜드와 멜리사는 카리나처럼 아스트리드가 왜 이렇게까지 흥분했는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눈사람에는 관심을 보였다.
“눈사람은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어요. 손이 너무 시리거든요. 눈을 만지면.”
“장갑을 끼면 되지.”
아스트리드는 장갑은 당연히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냐는 투로 대답했다.
롤랜드가 고개를 저었다.
“사실 마법을 써도 돼요. 공녀님도 원하시면 걸어드릴게요.”
“좋아. 내가 하녀에게 주방에서 당근과 파슬리도 가지고 와 달라고 할게.”
카리나는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당근과 파슬리로 치장한 눈사람이라니.
그녀가 여태까지 본 눈사람 중 가장 맛있는 눈사람일 듯했다.
잠시 후.
잔뜩 무장한 아이들은 눈사람을 만들면서 공작저의 눈을 모조리 거덜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스트리드는 작은 눈사람을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이미 거대한 눈사람을 여러 번 본 롤랜드와 멜리사는 더 크게 만들어야 한다면서 고집을 부렸다.
아이들은 점심쯤이 되어서야 눈을 가지고 노는 걸 끝냈다.
카리나는 한 가지 신기한 사실을 깨달았다.
토르스의 사람들은 모두 눈을 보고 흥분한 듯했다.
심지어 그 깐깐한 가정교사, 테라이스 양까지도 아스트리드가 체통 없이 뛰어노는 걸 보고는 흐뭇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다들 눈을 좋아하는구나.’
카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렝케 경의 저택에서, 눈은 악마의 똥가루라고 불릴 정도로 지긋지긋한 대상이었다.
그런 눈이, 이곳에선 환영의 대상이라니.
‘자주 오지 않아서인가 봐.’
나름의 결론을 내린 카리나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옛 문헌을 잔뜩 모아놓은 사무실로 향했다.
아이들은 하루쯤 통으로 놀아도 상관없지만, 자신은 달랐다.
복도를 천천히 걷던 카리나는 우뚝 멈춰 섰다. 반가운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창밖의 무언가를 주시하고 있는 클로드였다.
‘어……?’
카리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클로드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창밖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심지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카리나의 기척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클로드?”
카리나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조심스럽게 클로드를 불렀다.
클로드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브리튼 양.”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카리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을 딱딱한 호칭으로 부른 것 까지야 그럴 수 있지만, 클로드의 상태는 어딘가 이상했다.
“괜찮으세요?”
“……아무것도 아니다.”
클로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 단순한 움직임마저 큰 노력이 들어가는 것처럼 보여, 카리나의 의심은 더더욱 깊어졌다.
“몸이 안 좋아 보여요. 솔베타인 선생님께 가시는 게…….”
“…….”
클로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말없이 그녀로부터 등을 돌릴 뿐이었다.
“클로드!”
카리나는 황급히 그를 불렀다.
클로드는 예전에, 막중한 부담과 임무로 궁지에 몰려 있었을 때조차 이렇게까지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의 클로드는 마치, 조금이라도 충격을 가했다간 무너져버릴 거대한 모래성처럼 보였다.
“피곤할 뿐이다. 잠시 쉬면 해결될 문제야. 솔베타인 선생에게도 연락해서 약을 달라고 하겠어.”
클로드는 조금 정신을 차린 듯한 말투였지만, 그래도 카리나의 걱정은 커지기만 할 뿐이었다.
“……오늘 미다스 백작 부부를 만나기로 하셨잖아요. 이 상태로…….”
클로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들은 오지 못할 거야.”
“왜죠?”
“…….”
클로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텅 빈 시선을 창밖을 향해 던졌다.
‘눈 때문이구나.’
눈에 익숙한 북부조차도 제법 많은 양의 눈이 내리면 교통이 마비되곤 했다.
“토르스엔 눈이 드물게 오는 편인가요?”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카리나는 클로드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다가, 기겁하고 말았다.
클로드의 가면 같은 얼굴에, 경악과 공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설마…….’
카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전생에서, 무언가를 이유 없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눈을 두려워하는 사람 역시 충분히 있을 만 했다.
개중 심하면, 제대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할 정도로 공포에 질리는 자들도 있었다.
카리나는 가장 가까운 문을 열었다.
바로 자신의 사무실이었다.
클로드는 카리나가 말하기도 전에 사무실로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카리나는 서둘러 커튼을 쳐서, 창문을 모조리 가려버렸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클로드는 더는 공포에는 질리지 않은 듯했으니까.
그의 입에서 자조하는 듯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고맙다.”
“그, 쉬다가 가세요. 아니면…….”
카리나는 눈이 보이지 않도록 어두워진 이후에 나가도 된다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클로드는 ‘눈’이라는 단어 자체에도 반응하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럴 것 없다.”
클로드가 고개를 저었다.
“눈 자체가 두려운 건 아니니까.”
“……!”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클로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언급했다.
“그…… 그럼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카리나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단지, 클로드의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 싶은 마음에 물어보았을 뿐이었다.
클로드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침묵이 흐른 이후, 쓰디쓴 대답이 돌아왔다.
“나의 무능력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