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카리나는 방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후회했다.
‘그렇게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클로드는 자신의 행동이 무척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느닷없이 울더니 연신 사과하고는 밖으로 뛰쳐나오다니.
무얼 보나 최악이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미 클로드가 알려 준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벅찼으니까.
‘아이들에게 대비를 시켜야 해.’
다행스럽게도 이제 토르스에는 훌륭한 기사단과 마법사가 있었다.
그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그녀와 아이들이 직접 나가 싸워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줄도 모르고 인재 모집을 하겠다고 열심히 수선을 피웠으니…… 얼마나 애잔해 보였을까.’
미리 말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해 조금도 원망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카리나는 클로드가 말하지 못한 이유를 충분히 잘 알았다.
‘미리 알려 준다 한들…… 나는 불안해 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까.’
익숙한 죄책감이 몰려오기 시작했으나, 카리나는 고개를 저어서 가라앉은 감정을 털어 버렸다.
부정적으로 생각할 상황만은 아니었다.
좋게 생각한다면, 카리나가 할 일은 이제 별로 없었다.
그러니 아이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일은 클로드에게 맡겨 둔 채.
‘…….’
카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만약, 몇 달 전의 자신이었더라면…….
도리어 행운이라고 생각하면서 클로드에게 모든 일을 미루어 버렸을 것이다.
아니, 미룬다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본디 클로드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에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카리나는 달랐다.
클로드 혼자 그 모든 일을 감당하고 있다는 상상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조여들었다.
‘…….’
카리나는 결심했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지금 상황을 아예 모르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모두를 위해 무거운 짐을 지고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어떻게 보고만 있겠는가?
* * *
카리나와의 대화로부터 몇 날 며칠이 흘렀다.
클로드는 일부러 카리나를 피했다.
대체 어떠한 표정으로, 어떠한 말투로 그녀 앞에 서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색해선 안 된다는 것.
만약, 내색을 했다가는…….
‘……달아나겠지.’
클로드는 카리나를 결코 폄훼하지 않았다.
그녀만큼 영리하고 용기 있는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카리나의 문제점 역시 명백했다.
그녀의 세상은 오직 두 아이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클로드 자신이라거나, 아스트리드라거나…… 카리나 브리튼이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구한 모든 사람들은 그 세계에 결코 들어가지 못했다.
만약 카리나가 클로드의 마음을 눈치챈다면, 그녀는 그 세계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달아날 것이다.
북부에서 그랬듯이.
클로드는 눈을 감았다.
카리나의 물결치는 장밋빛 머리칼과,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가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그래.
클로드는 인정했다.
자신은 훨씬 예전부터 카리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지 잠시 마음이 동하는 정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부정해왔을 뿐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당시는, 토르스가 카리나보다 중요했으니까.
피가 섞이지 않은 아이 둘을 키우는 평민 과부는 공작가의 안주인 후보로도 들지 못할 신분이니까.
그래서 클로드는 그 마음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자신의 마음이 더 진전되었다간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한 토르스의 정세에 파란만 불러오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관없지.’
토르스는 이제 공작 부인이 평민이라는 이유 하나로 흔들리지 않는, 부강한 영지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토르스를 그렇게 만든 당사자가 바로 카리나였다.
그래서 클로드는 더는 카리나의 신분에 신경 하나 쓰지 않았다.
기껏해야 토르스 공작가와 혈연이 조금 있다는 이유로 고개 빳빳하게 세우는 늙은이들이 소란을 피우는 정도일 것이다.
문제는 카리나였다.
클로드가 이마를 문지르며 괴로워할 때, 시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각하, 브리튼 양이…….”
클로드는 헛기침했다.
뒤는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바쁘다고 전해라.”
“그렇게 말씀드렸지만, 물러나지 않으십니다. 정말로 중요한 용건이 있다면서요.”
“……황태자 전하와 함께 있다고 전해라.”
시종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클로드는 이렇게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 성정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상대가 가신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공작령에선 공작의 말이 곧 법인 법.
시종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클로드는 잠시의 안식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황태자라는 핑계만큼 확실한 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예상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각하, 공녀님께서 뵙기를 청하시는데요.”
“아스트리드가?”
클로드는 놀라워하며 되물었다.
아스트리드가 그를 먼저 찾아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비록 카리나 덕분에 둘 사이가 예전보다는 가까워졌다고는 하나,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깨닫는 정도에 불과했다.
친근하게 불쑥불쑥 찾아오는 사이는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클로드는 왜 낯가림이 심한 여동생이 자신을 찾아왔는지 생각 한 번 하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바로 들어오라고 해라.”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아스트리드가 우아한 걸음걸이로 사뿐사뿐 들어왔다.
“아스트리드, 무슨 일…….”
클로드의 말소리가 끊어졌다.
심장이 가슴을 방망이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카리나 브리튼이 아스트리드의 뒤를 이어 집무실에 발을 들였다.
그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긴장한 것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화난 것 같기도 했다.
‘화난 거겠지.’
클로드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카리나는 자신 앞에서 긴장하지 않으니 화가 난 쪽일 거라고.
그는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스트리드, 무슨 일이지?”
“브리튼 양이 가, 각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해서요.”
“…….”
클로드는 한숨을 삼켰다.
이런 경우를 예상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스트리드는 정말로 카리나를 좋아했으니까.
카리나 역시 아스트리드를 친여동생으로 여기는 듯해, 어떨 땐 둘의 관계에 질투가 날 정도였다.
“나가 보거라, 아스트리드.”
아스트리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빠르게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클로드는 카리나가 아스트리드에게 고맙다고 소리없이 말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아스트리드가 내게 거짓말을 하게 만들면서까지 들어온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군.”
클로드의 말은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날카로웠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말을 후회했지만, 다행히도 카리나는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은 듯했다.
혹은, 상처받기에는 너무 화가 나 있거나.
“질문이 있어서요.”
잔뜩 긴장한 클로드와는 반대로, 카리나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지금 상황에서…… 전혀 도움이 안 되나요?”
“……?”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클로드의 눈이 커졌다.
그는 책망을 예상했다.
왜 그동안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는지, 혹은 왜 그동안 연락을 피했는지에 대한.
하지만 지금, 카리나는 그에게 자신의 효용성을 물을 뿐이었다.
“그건 왜 묻지?”
카리나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도움이 안 된다면 도와드리겠다는 제안 자체가 부담으로 느껴지실 테니까요.”
“……!”
클로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카리나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아니, 그를 돕고 싶어했다.
그 단순한 사실 하나가 클로드의 가슴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질러, 순식간에 시야를 타오르게 했다.
“……뭔가 오해하고 있는 듯한데.”
클로드는 자신을 잠식해 가는 열기를 숨기려 노력하며 상황을 천천히 설명했다.
“그렇게 위험한 상황은 아니야.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을 뿐이지, 그렇게 크진 않고. 내가 그대에게 그렇게 말을 해둔 이유는 몸을 사리는 게 좋기 때문이야.”
“아…….”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상황을 과대평가했네요.”
“내가 제대로 설명을 못한 탓이다. 그리고, 그 뒤로 그대를 피하기만 했으니까.”
클로드는 일부러 카리나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지 않으러 애썼다.
자신의 마음을 깨달아버린 이상, 카리나의 이름을 예전처럼 담담하게 입에 올릴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다행이에요.”
카리나가 싱긋이 웃었다.
클로드는 잠시 멍해졌다.
분명 그가 잘 아는 카리나라면, 자신이 바보가 된 기분이라고 투덜거려야 했다.
하지만 카리나는 클로드의 본의 아니게 속은 상황이었음에도 전혀 화난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클로드가 더 힘들어질까봐 정말 걱정했거든요.”
클로드.
카리나의 붉은 입술에 그의 이름이 오른 순간, 달콤한 전율이 클로드를 엄습했다.
그는 간신히 대답을 짜내었다.
“그대가…… 나를 그렇게나 걱정해 주다니 기쁘군.”
* * *
클로드와 카리나 사이의 중요한 대화를 모두 엿듣고 돌아가는 아스트리드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역시!’
아스트리드는 공녀로서의 체통도 잊어버린 채 활짝 미소 지었다.
그간 무수히 읽어온 연애 소설들에 따르면 남녀 간의 애정엔 여러 장애물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럴 때, 자신같은 조력자가 도와준다면 남녀 주인공의 사이는 순식간에 발전한다.
아스트리드는 침실에 숨겨 놓은 연애 소설을 마저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