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 *
그날 아침.
클로드는 찻잔을 들어 올리는 황태자를 천천히 응시했다.
얼핏 보아서는 귀빈의 접대에 최선을 다하는 듯했지만, 그의 머릿속은 온통 카리나로 차 있었다.
‘좋아할까.’
아이들과 달리, 그는 아침부터 카리나의 생일을 축하해 줄 시간이 나지 않았다.
“자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나?”
“광산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클로드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상단을 이용할 생각인가?”
황태자는 날카로웠지만 다행히 클로드의 진짜 생각까지 엿보는 재주는 없었다.
“제 생각을 읽으셨군요.”
포드 상단.
카리나의 인망을 듣고 찾아온 자들이었다.
겨우 황태자의 이야기로 집중했던 그의 생각은 다시금 카리나로 흘렀다.
그는 가능한 많은 것들을 카리나에게 선물하고 싶었지만, 그 경우 카리나가 질겁하고 선물 대부분을 거부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물은 최소한 자제했다.
더군다나 황태자가 지금 머무르고 있지 않은가.
카리나 브리튼처럼 소중한 인재를 그의 눈에 띄게 할 순 없었다.
한 가지 기분 좋은 점은, 그 덕에 아서 템프턴 역시 카리나의 생일을 모르고 지나가리라는 점이었다.
“포드 상단이라…… 그들의 능력이야 나도 모르지 않아. 마정석의 품질과 상관없이 구매처를 찾아내겠지. 상등품의 경우 마탑과 거래할 수도 있는 자들이고.”
클로드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황태자는 포드 상단의 저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역시 전하께선 모르는 게 없으십니다.”
“하지만 난 자네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
클로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황태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은 광산을 개발하기엔 시기가 좋지 않아. 자네도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황태자의 말이 맞았다.
황제가 황태자에게 황위를 선양하기 전까지는 결코 황실의 눈에 띌 만한 행동을 해선 안 되었다.
카리나의 안전이 달린 문제가 아니었다면, 클로드는 이렇게까지 조급하게 광산 개발을 추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어.’
베리티 솔베타인은 마정석 광산에서 자란 새로운 ‘그 꽃’의 효능이 기존과는 달라 보인다고 보고했다.
‘각하, 이번에 광산에서 자란 카리나움의 효과는…… 조금 더 연구를 해 보아야 하긴 하겠지만, 아서 경의 질환만이 아닌, 일반 질병을 고치는 데에도 효능이 있어 보입니다.’
‘자라는 곳만 다르지, 꽃 자체는 같아 보였다. 그 꽃의 효능이 왜 그렇게까지 차이가 나지?’
‘에이드리안 경에 따르면, 마정석 광산은 자연 마력이 응축된 곳이라 카리나움이 자연히 마력을 흡수한 것 같다고 합니다. 마정석 광산에 자생하는 이끼와도 좋은 상호작용을 한 듯 하고요.’
클로드는 ‘그 꽃’을 카리나움으로 부르기를 꿋꿋이 거부했다.
카리나를 이름으로 부르기를 원하는 자들이 ‘그 꽃’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작?”
클로드는 눈을 깜박였다.
황태자가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는 아무 변명이나 내뱉었다.
“시기야 늘 좋지 않았지요. 더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맞는 말이군.”
놀랍게도, 황태자는 그 말에 흡족한 듯했다.
“더 기다릴 필요가 없지.”
황태자의 어조에는 어딘가 사람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클로드는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전하.”
“그래.”
황태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더는 기다리지 않겠다.”
* * *
남부로 돌아온 카리나는 다시 이전의 업무로 돌아왔다.
바로 공개 모집 제도였다.
‘더는 지체할 수 없어.’
마정석 광산이 가동되면서, 공작가의 업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공작가의 인재들은 각각의 특화된 분야가 있었기 때문에 평범한 일을 처리할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겨울이 되어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북부에 있는 지원자들은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을 것이다.
마차가 다니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아도, 여름에 비해 삯이 몇 배나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위해 마정석을 만드는 훈련도 이전보다 더 열심히 했기 때문에 카리나는 몸이 두 개라도 되는 것처럼 바삐 뛰어다녔다.
당연히 클로드에게 감사 인사를 할 시간도 없었다.
‘……인사를 하긴 해야 하는데.’
카리나는 초조하게 깃펜으로 종이를 두드렸다.
아스트리드도 자신의 생일이라는 사실을 선물 더미를 보고서야 알고 깜짝 놀랐다.
그랬으니 선물은 전적으로 클로드 와 아이들이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도 없고…… 내가 시간이 날 땐, 전하와 함께였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진 않았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감사 인사를 할 만큼 카리나는 뻔뻔한 인물도 못 되었으니까.
카리나는 종이로 시선을 떨어트리다가, 무언가 생각이 난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직접 마주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카드로 마음을 전달하면 된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카리나에겐 이제 예쁘고 다양한 인사용 카드들이 많았다.
그녀는 즐거운 마음으로 카드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카리나는 아이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한 다음 사무실로 돌아갔다.
아이들은 자신이 남부로 돌아오자마자 바빠져 섭섭한 듯했지만, 상황을 설명해주니 이내 수긍했다.
카리나는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어린아이가 어른의 사정을 이해하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카리나가 서류 작업을 막 끝마쳤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
카리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클로드가 멋쩍은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각하!”
클로드가 미소 지었다.
“지금은 아무도 없어, 카리나.”
“……바쁘신 줄 알았어요.”
“바쁜 건 사실이야.”
클로드가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대 얼굴 한 번 볼 시간도 없는 건 아니지.”
“…….”
카리나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그 말에,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카드 잘 받았어.”
그는 카리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아무렇지도 않은 발걸음이었다.
반대로 카리나는 숨을 들이삼켰다.
싸늘하기만 하던 방이 열기로 달아오르는 듯 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에요. 되게 고민했거든요.”
카리나는 바보같다는 걸 알면서도 카드를 고심해서 골랐다.
은빛 돌고래가 그려져 있는 진한 푸른색 카드였다.
“당연히 마음에 들 수밖에. 그걸 보자마자…… 그대에게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카리나는 손을 내저었다.
자신이 카드에 적인 건 생일 선물에 대한 감사 인사뿐.
그에게 부담을 줄 그 어떤 말도 남기지 않았다.
“알아.”
클로드가 웃었다.
그의 입가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카리나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늦었지만…… 생일 축하한다, 카리나.”
카리나는 감사하다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려 했지만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클로드도 딱히 감사 인사를 또 듣고 싶었던 건 아닌 모양인지, 천천히 그녀를 살펴보았다.
그의 시선이 카리나의 팔찌에 닿았다. 카리나는 선물 중 방어 마법이 걸린 팔찌만 하고 다녔다.
나머지 두 개도 하자니 너무 눈에 띄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제일 마음에 들었나 보군.”
“다 마음에 들었어요. 정말로요.”
카리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제게 평소 필요한 건 기껏해야 방어 마법뿐일 테니까요.”
“다 하도록 해.”
클로드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이곳도 안전하지 않아.”
평소와 다르게 어딘가 긴장하기까지 한 그의 어조에, 카리나는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똑바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클로드의 시선엔 불안이 일렁였다.
“……클로드, 무슨 일인가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긴요.”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다른 일들엔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제 아이들의 안전과 관련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죠. 알려 주세요. 최선을 다해 대비할 테니까.”
클로드는 숨을 들이켰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카리나마저도 그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클로드는 본디의 냉철하고 딱딱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냥, 걱정이 되었을 뿐이다. 그 마법사가 언제라도 그대를 다시 노릴 수 있으니.”
카리나는 그 말에 속지 않았다.
그리고 클로드 역시 그녀가 속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카리나는 그 이상 그를 다그치지 않았다.
클로드가 말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이유는 분명 자신을 위함이라고 카리나는 믿었다.
그래서 카리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클로드를 안심시키기 위한 미소였다.
“언제든 말하고 싶을 때 알려 주세요. 저는 항상 여기에 있을 테니까.”
“……고맙다, 카리나.”
카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오늘의 일은 다 끝났다.
“전 이제 돌아가서 쉬려고요. 클로드는 계속 일해야 하죠?”
클로드는 잠시 뜸을 들였다.
“……아니. 나도 이만 쉬어야 할 것 같군. 방까지 데려다주겠다.”
당연히 카리나는 혼자서도 방을 잘 찾아갈 수 있었다.
설령 안전이 걱정된다면 사용인을 부르면 된다.
하지만 그녀 역시 클로드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고 싶었기 때문에,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영광이네요. 공작 각하께서 직접 바래다주신다니.”
“토르스 최고의 인재를 배웅할 수 있어 내가 더 영광이군.”
클로드는 손수 문을 열었다.
그들은 카리나의 방까지 최대한 느릿느릿 걸었다.
헤어지는 게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 보았자 같은 본관 안.
금방 도착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방문 앞에서 아쉬운 시선을 서로 교환했다.
“오늘 고생했다. 푹 쉬도록.”
“클로드도요.”
카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자신의 방에서 아스트리드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