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
심장에 무언가가 턱 하니 걸린 듯 갑갑해졌다.
카리나는 그 사실에 스스로 의아해했다.
클로드는 자신에게 아이들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가 하는 말들엔 그의 지위와 인품만큼의 가치가 있으니, 결코 가벼이 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리나의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카리나는 자신의 사사롭고, 어떻게 보면 유치하게까지 느껴지는 감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어요.”
카리나는 감사 인사를 하는 대신에, 자신에게 맹세하듯 읊조렸다.
지난 몇 달.
그녀는 남부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바로 이 남자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서.
그러니 이번엔 자신과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차례였다.
클로드의 마음은 고마웠지만, 이번 일은 자신과 아이들이 처리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 그대 역시 최선을 다해야겠지.”
클로드는 조금 실망한 투였으나 이내 그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북부에서 데려온 부부는 어떤 이들인가?”
“제가 아이들과 함께 남부로 올 때, 도와주셨던 분들이에요.”
카리나는 간단하게 텟사와 타이슨에 대해 설명했다.
“베리티가 요새 한가로워 보이던데, 환자를 받게 되어 기뻐하겠군.”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쇠한 기사들은 주기적으로 재활을 해야 했지만, 젊은 기사들 중엔 아서처럼 금세 회복하여 재활 시설을 떠난 자도 적지 않았다.
처음에 카리나는 상당히 불안해했다.
나이가 젊어 장래가 유망하니 금세 토르스를 떠나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금방 회복한 젊은 기사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클로드에게 계속해서 충성을 바쳤다.
카리나는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일전에 포드 상단주, 릴리스는 재활 시설을 두고 복지라고 표현했다.
복지를 제공하는 토르스는 단순히 돈과 지위만을 약속한 다른 귀족 가문들과는 다르다고.
복지는 사람을 떠나지 않게 만든다고 하면서.
당시, 카리나는 릴리스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북부에서 타이슨을 만나고 난 이후, 생각이 달라졌다.
카리나는 타이슨을 도우려고 성심성의껏 애썼다. 그녀 자신의 손익은 조금도 계산하지 않고.
단지, 타이슨이 그녀의 은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재활 시설 덕에 클로드는 기사들의 은인이 되었어. 기사들은 절대 그 사실을 잊지 않겠지.’
카리나는 클로드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클로드는 이 사실을 알까?
아마 모를 것이라고 카리나는 생각했다.
그는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면 베풀었지, 입어본 적은 없는 듯한 사람이었으니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은인이 있으신가요?”
카리나는 불쑥 튀어나온 말에 놀라 황급히 수습했다.
“죄송해요. 제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 주제넘었네요.”
하지만 클로드는 그녀의 뒷말에는 전혀 개의치 않은 듯했다.
도리어,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게 아닌가.
“은인이라…… 많지.”
“네?”
카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나머지 어안이 벙벙했다.
클로드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겠는데.”
카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아는 클로드는 남을 쉽게 믿거나, 남에게 도움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껏 배신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홀로 남부를 지탱해오지 않았는가.
누구에게도 등을 맡기지 못한 채.
그런 그녀의 생각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한 클로드가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내 앞에도, 한 명 있고.”
카리나의 눈이 흔들리다가, 이내 어둡게 가라앉았다.
‘역시, 그랬구나.’
클로드가 말하는 ‘은인’은 그녀가 생각하는 은인과는 조금 달랐다.
너무나 곧고 바른 그는, 여태껏 자신에게 도움을 준 이들을 모두 은인으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아마 그 기나긴 목록엔 치체스터와 와일더, 아서까지 들어 있을 것이다.
카리나는 실망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알고 싶었던 건, 조금 더 긴밀한…….
‘정말로 주제넘구나, 카리나.’
카리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대체 클로드의 무엇이라도 된다고 그런 사적인 것들을 궁금해한다는 말인가?
머릿속에 담아둘 이유가 없는 의문들이었다.
“영광이네요. 각하…… 아니, 클로드의 은인이 되다니.”
클로드가 무어라 대답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처음 보는 시종이었다.
북부로 떠나 있는 사이 공작가의 식솔이 늘어난 모양이었다.
“각하, 세트 후작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클로드가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일이지?”
“아마, 황태자 전하께…….”
클로드는 더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기다리라고 전하라.”
“알겠습니다.”
카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트 후작은 토르스와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중립 귀족 중 하나로, 클로드가 이렇게 내칠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클로드가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빠르게 설명했다.
“뻔해. 이 기회에 황태자 전하와 연을 만들어보려는 거지.”
“후작님은 시작에 불과하겠네요.”
카리나는 침울하게 대답했다.
세트 후작은 다른 이들보다 행동이 조금 빨랐을 뿐이었다.
곧 다른 귀족들도 황태자에게 말 한마디 붙여보기 위해 몰려들 것이었다.
“정확해.”
클로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토르스를 이용하려는 귀족들을 잔뜩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은 듯했다.
“전하께서 토르스에 머무르는 동안은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일이다만…… 솔직히, 달갑지 않군.”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황태자에게 잘 보이려는 한편, 클로드를 이용하려고 할 것이다.
살얼음판 위에서 춤추는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클로드가 잠시 망설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카리나를 똑바로 바라보던 시선이 그녀를 비껴가듯 움직였다.
“그대가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담소를 제대로 나눌 시간조차 없다는 게 아쉬워.”
언뜻 듣기에는 단순히 가신을 아끼는 주군의 말처럼 들렸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카리나는 평소처럼 그 말을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한 발 다가왔다가 두 발 물러서는 듯한 클로드의 태도에 가슴이 다시금 쿵쾅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 쌀쌀한 가을인데도 얼굴에 열이 오르면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녀는 머리를 굴려 자신이 지금 해야 할 듯한 말을 짜냈다.
“언제 제대로 보고를 드릴 수 있도록 할게요.”
클로드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보고라…… 그래, 그렇게 되는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카리나를 마지막으로 주시하고는 방을 망설임 없이 나가버렸다.
잠시 후.
카리나는 클로드보다 조금 늦게 방에서 나갔다.
아이들이 곧장 카리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무래도 돌아오자마자 카리나가 보고를 위해 아이들을 떨어트려 둔 게 섭섭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멜리사도, 롤랜드도 카리나의 품에 안겨드는 대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마정석은 왜 다 썼어요?”
카리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아이들의 질문을 피할 핑계가 없다.
물론 아이들에게 진실을 숨겨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하지만 카리나는 아이들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아이들을 지킬 최선의 방법이니까.
만약, 아이들에게 더 이상의 짐을 지우지 않을 다른 방법이 있다면 무조건 그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클로드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확신은 강해졌다.
아이들은 이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만 했다.
“저택에서 문제가 생겼어.”
“……!”
카리나는 어디의 무슨 저택인지 얘기하지 않았으나, 아이들은 곧잘 알아들었다.
카리나는 천천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아이들이 듣기에 지나치게 잔인하거나 무서운 부분들만 순화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렇게 된 거야.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다면, 지금 물어. 사람들이 없을 때 얘기해야 하니까.”
카리나는 어려운 설명을 간신히 마쳤다.
“…….”
아이들은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단지, 불안한 시선을 서로 주고받을 뿐이었다.
카리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눈시울이 시큰한 것이,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지금은 참아야 할 때였다.
“너무 걱정은 하지 마. 공작 각하께선 너희들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셨으니까. 단지…….”
카리나는 힘주어 말하려 했으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마무리 짓고 말았다.
“만약을 위해서야.”
“……엄마.”
멜리사가 무언가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한 얼굴로 카리나를 불렀다.
“응, 멜리사?”
“그러면 마정석이 많이 필요하겠네요. 롤랜드가 만드는 그런…… 마법이 세공된 마정석이요.”
카리나는 조금 놀랐다. 마법이 세공된 마정석은 결코 멜리사의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데다, 롤랜드가 마법을 걸어준 마정석을 카리나가 북부에서 유용하게 사용한 덕분에 멜리사도 관심이 생겼을지도 몰랐다.
“그래. 하지만 이제는 너희들을 위한 마정석을 만들어야지.”
“여튼 마정석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아니에요?”
“맞아.”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멜리사는 값비싼 마정석을 많이 소요하게 될까 봐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거야 뭐, 내가 마정석을 부지런히 만들면 돼. 아무 걱정하지 마렴, 멜리사.”
멜리사는 답답한 모양인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런 말이 아니에요!”
“그럼?”
카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멜리사는 두 주먹을 꼬옥 쥐고는, 중대한 선언을 하는 것처럼 크게 외쳤다.
“잠자는 마정석들이 있어요. 뜨거운 강 바로 옆에 땅밑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