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쿵.
심장이 갈비뼈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오랜만에 봐서 그래, 오랜만에.’
카리나는 애써 가슴을 가라앉혔다.
클로드는 그간 자신에게 많은 것들을 해 주었다.
당연히 반가울 수밖에 없다.
“브리튼 양.”
그녀를 발견한 클로드가 한 걸음 다가왔다.
곧은 이마 아래의 두 눈이 반가움으로 빛났다.
‘……!’
카리나의 심장이 다시 달음박질하기 시작했다.
“각하께서 배려해주신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그녀는 평온하게 클로드에게 인사하려 애썼지만, 어색한 목소리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저 거리만 가까워졌을 뿐인데, 왜 이렇게 당혹스러운지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 클로드는 그녀가 단순히 놀랐다고만 생각했는지, 다소 이상한 태도 정도는 모른 척 해 주었다.
“상속은 무사히 끝마쳤겠지? 이젠 카리나 경이라고 불러야겠군.”
“아뇨.”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예전처럼 불러주시면 될 듯해요. 영지와 작위를 모두 팔았거든요.”
“정말인가?”
이번엔 클로드가 놀랄 차례였다.
카리나는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애초에 렝케가 그녀를 후계자로 삼은 이유는 바로 클로드의 협박 때문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클로드가 그녀를 배려해준 것이다. 귀족의 작위를 이어받을 수 있도록.
“죄송해요. 배려해주셨는데…….”
클로드가 손을 내저었다.
“이런 걸로 사과하지 마라. 그대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네.”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남부에 계속 머무를 텐데, 북부에 있는 영지 관리를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요.”
“잠깐.”
클로드의 시선이 흔들렸다.
“브리튼 양, 그 말은…….”
카리나는 숨을 들이 삼켰다.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제야 깨달은 탓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나…… 남부를 떠나고 싶지 않아.’
자신이 직접 정하고, 계약서에 써 놓은 5년이라는 기한은 한때 마음속 단단한 장벽이었다.
그러나 그 장벽은 지난 반년 동안 허물어졌다.
지금은 흐드러지게 핀 꽃들에 뒤덮인 벽돌 몇 조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카리나는 더는 시간을 끌지 않았다. 클로드에게 그녀 자신이 새롭게 발견한 감정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
“네. 저는 계속 남부에 머무르고 싶어요. 물론…….”
카리나는 잠시 망설였다.
“각하께서 허락하신다면요.”
“…….”
침묵이 흘렀다.
클로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카리나를 내려다보았다.
카리나는 다시금 자신의 심장 고동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뭐라고 생각할까.’
사실, 카리나는 걱정할 게 없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클로드는 그녀가 모두에게 거짓말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도리어 위로를 해 주었다.
더군다나 그는 거짓말을 하는 성정이 아니었으니…….
‘내가 도움이 된다는 것도, 거짓말이 아닐 거야.’
하지만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카리나는 불안했다.
만에 하나, 클로드가 그녀를 기꺼워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봐.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까 봐…….
카리나의 심장이 다시 한 번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클로드가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머물러도 좋아.”
불안해하던 카리나는 클로드의 대답을 듣는 순간, 긴장이 탁 풀려버렸다. 그 때문에 그녀는 클로드가 자신만큼이나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얕게 미소지었다.
“역시 각하께선 너그러우시네요.”
“그대 같은 인재를 내 곁에 계속 둘 수 있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나.”
카리나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클로드는 차가운 얼굴이었지만, 카리나는 그 얼굴의 뒤편에 있는 다정한 본심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향해 한쪽 손을 내밀었다.
“어서 들어가지. 긴 여정이었으니 지쳤을 것 같군.”
“그, 바쁘지 않으세요?”
카리나는 문득 떠오른 의문을 내뱉었다.
황태자가 도착했다고 한다.
당연히 클로드가 그의 곁에 온종일 붙어 있어야 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황태자가 아니라도, 클로드는 충분히 바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예상과 달리 클로드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내 가신을 돌볼 시간 정도는 있어, 브리튼 양.”
“다행이네요.”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드릴 게 있거든요.”
의문은 풀리지 않았지만, 어찌 됐든 잘된 일이었다.
클로드에게 버리올에 대해, 그리고 올리버 라크포드에 대해 알려야 했으니까.
잠시 후.
카리나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클로드의 말대로 그녀는 정말 지쳐 있었다.
‘빨리 말씀드리고, 쉬어야겠어.’
보고 때문에 억지로 떼어놓은 아이들도 마음에 걸렸다.
저 나이대 아이들이 얼마나 작은 것에 상처받는지 카리나는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부모는 그런 것 따위에 신경을 쓰는 어른이 아니었지만 카리나는 달랐다.
클로드가 그녀를 세심히 살폈다.
“몸이 좋지 않다면 솔베타인을 부르지.”
“괜찮아요.”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좀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것보다, 각하.”
“……클로드.”
잠시 뜸을 들이는 카리나의 말을 클로드가 잡아챘다.
느닷없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카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네?”
“우리 둘이 있을 때라면 서로 이름을 부르기로, 하지 않았나.”
“어…….”
카리나는 입을 멍하니 벌렸다가 그대로 닫아버렸다.
클로드는 평상시와 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조금 쑥쓰러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카리나는 당시, 묘한 감상에 젖어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했던 멍청한 자신을 잠시 탓했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카리나는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클로드.”
그녀는 미묘한 이름의 느낌을 입안에서 떨쳐내기 위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저…… 누가 렝케 경의 공범인지 알아냈어요.”
“누구지?”
클로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제 그의 머릿속에서 이름 같은 사소한 문제는 사라져버린 듯했다.
“그때, 렝케 경이 데리고 다녔지만 놓쳐버렸던 열 살짜리 아이를 기억하시나요?”
“당연하지.”
“그 아이예요.”
“뭐라고……?”
클로드의 입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무언갈 착각한 게 아닌가?”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생에 대한 얘기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클로드를 설득하기 위해선 자신과 아서가 저택에서 겪은 일을 알려주어야 할 듯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글씨만을 제외하고는, 저택에서 겪은 일들을 모두 클로드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마법은…….”
카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부터는 클로드를 설득하기 위한, 거짓말을 할 차례였다.
실은 카리나는 모든 걸 사실 그대로 털어놓을 생각도 해 보았다.
전생의 기억까지 포함해서.
하지만 누구에게 말하든 미치광이 취급을 받을 것 같은 기억을, 어떻게 클로드에게 말하겠는가?
지금, 이 상황에서 최선은 클로드가 믿을 만한 적당한 거짓말을 꾸며내는 것뿐이었다.
“제가 확인해봤어요. 그 아이가 연습하던 흔적이 남아 있더라고요.”
“……그렇군.”
수긍한 듯한 클로드의 대답에, 카리나는 안도했다.
만약 클로드가 아서에게 물어봐서, 아서가 그런 흔적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면 카리나는 그가 놓친 것뿐이라고 답하면 된다.
어차피 증거가 될 저택은 모두 산산이 부서진 상태이지 않은가.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그 아이는 흔적도 없이 남부를 빠져나갔어. 열 살에겐 불가능한 일이지.”
카리나는 팽팽히 긴장했다.
그녀는 자신의 전생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기에, 당연히 올리버가 그녀와 같은 존재이리라는 말 역시 할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정체를 위장한 것 같군.”
“……네?”
맥이 조금 풀렸다.
“마법사라면 어린아이 모습으로 겉모습을 바꾸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혹은 오래전 성장이 멈추었을 수도 있지. 어느 쪽이든 간에, 렝케 브리튼은 그의 정체를 몰랐던 것 같군.”
“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렝케는 정말로 올리버 라크포드를 대마법사로 키워낼 아이로 대했을 뿐이었다.
“그대가 얼마나 불안할지는 충분히 이해한다. 나 역시 생각했던 것보다 까다로운 상대라 느끼니. 하지만…….”
클로드가 생각에 잠긴 시선으로 카리나를 응시했다.
“최선을 다해 이 자로부터 그대와 아이들을 지키겠다, 카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