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 * *
제국의 황태자, 라테온의 방문은 기습에 가까웠다.
정상적인 방문이었다면 한 달 전에는 미리 황명이 내려왔어야 했다.
하지만 황태자는 겨우 기사 대여섯 명만 데리고 느닷없이 남부에 들이닥쳤다.
치체스터가 무례하다며 펄펄 뛸 정도로 파격적인 행보였다.
“흥분할 것 없어.”
클로드가 냉정하게 말했다.
“겨우 방문일 뿐이다. 며칠 머무르다 돌아가겠지.”
“하지만, 각하…….”
치체스터는 그답지 않게 무척 불안해 보였다. 클로드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실은, 그 역시 그랬으니까.
근래 남부는 그야말로 부활 중이었다. 다 스러져 가던 영지가 이렇게 재기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클로드는 이상을 꿈꾸었지만 그만큼 현실 역시 잘 알았다.
지금의 남부는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작은 암초에도 무너져 버릴, 아직은 위태로운 기적.
‘다 카리나 덕분이지.’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묘하게 조여들었다.
그때, 시종이 들어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태자의 위치를 알렸다.
“각하, 전하께서 곧 도착하십니다.”
클로드는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카리나가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다.
그때까지는 자신은 본분에 충실해야 했다.
잠시 후.
항상 웃는 상의 황태자가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바리테온 3세는 항상 항상 그런 남자였다.
“토르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클로드는 복잡한 속내를 숨기고는 담백하게 인사했다.
황태자가 싱긋이 웃었다.
“자네와 자네의 영지에 무한한 영광이 있기를.”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의례적인 인사에 의례적인 답변.
하지만 둘 모두 이 상황이 얼마나 이례적인지 알고 있었다.
“남부에는 얼마나 계실 생각입니까?”
“오래는 걸리지 않을 거다. 자네와 간단한 담소만 나누러 찾아왔으니.”
“영광이군요.”
클로드는 짧게 미소 지었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간단한 담소를 나누러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영지까지 일부러 찾아오는 황태자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
분명, 수도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서둘러 황태자를 기밀한 내실로 안내했다.
외부에서는 그 누구도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없는, 공작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기법으로 지은 비밀 공간이었다.
“자네는 눈치가 빨라서 좋군.”
황태자가 즐거운 듯 말했다.
칭찬에도 불구하고 클로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소리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별 건 아니야.”
황태자가 천천히 대답했다.
“뭐…… 아버지께서 얼마 전 낙마하셨어. 다리가 부러지셨지. 그래서 선양을 생각하신다는 정도?”
“……!”
황태자가 윙크했다.
“기밀이야, 자네만 아는.”
클로드는 자신보다 몇 살 많지도 않은 황태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소문이 새어 나가지 않았을 리가 없을 텐데요.”
예전이라면 모를까, 이제 자신에게는 유능한 정보상이 있다.
하지만 그녀의 조직원들은 이와 비슷한 아무런 정보도 가지고 오지 못했다.
“오.”
황태자가 쾌활하게 답했다.
“자네는 아직도 순진하군. 당연히 목격자들을 모조리 죽였거든. 백작은 죽이기 좀 뭣해서, 탑에 가둬 둔 상태고.”
“…….”
“그리고 아버지께선 원래도 좀 내키지 않으시면 궁에 틀어박히는 분이시지. 자네 정보원들이 무능력한 건 아니야.”
황태자는 클로드가 대답할 새도 없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간단해. 앞으로 한 달 동안만 나를 보호해 줘. 그럼 남부에는 섭섭지 않게 보상하지.”
“……!”
클로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실, 황태자가 ‘선양’이라는 말을 입에 올렸을 때부터 그는 어느 정도 이 결론을 예상하기는 했다.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낙마는 맞습니까?”
황태자는 순순히 인정했다.
“일반적인 낙마는 아니야. 분명, 그때 아버지의 곁을 지켰던 사람 중 범인이 있어. 그래서 모조리 죽인 것이고.”
“배후는 아직 모르시는군요.”
“오, 알지.”
황태자가 쾌활하게 말했다.
“낙마한 아버지의 음식에 독을 타 그분을 혼수상태에 빠트릴 사람이, 사랑하는 내 동생 말고 또 누가 있겠나?”
“……!”
황태자는 클로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제, 내가 왜 여기 왔는지 진정으로 알겠지.”
“예.”
입이 바싹 말랐다.
그들은 한순간에 폭풍우의 중심이 되어 버렸다.
황태자의 유일한 아우, 2황자는 그 본성이 잔악하기로 이름났다.
그가 황좌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황제의 신뢰와 장자라는 정통성까지 손에 넣은 황태자를 제치고 2황자가 황위에 오를 가능성은 전무했다.
황제와 황태자 모두가 항거불능인 상태에 빠질 경우를 제외하면.
“최선을 다해 황태자 전하를 지키겠습니다.”
클로드는 단순히 황태자가 약속한 보상 때문에 맹세한 게 아니었다.
만약 2황자가 황위에 오를 경우, 제국의 정세는 송두리째 변화할 것이다.
현재, 변화는 남부가 가장 원하지 않는 단어였다.
황태자가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남부로 오길 잘했군.”
클로드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런데 왜 저였습니까? 전하께서 믿고 몸을 맡길 만한 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남부가 멀잖나.”
“……아.”
“그리고 자네는 아우의 경계 대상에도 들지 않아서, 상대가 자네라면 대체 뭘 해야 할지도 모를 걸세. 그러니 너무 긴장하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클로드는 그의 말에 겉으로는 수긍했지만, 일이 황태자의 말대로 간단하지는 않다는 점을 알았다.
황태자가 평소 가까이하는 동맹들이 아닌, 자신을 찾아왔을 정도면 무슨 연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연유를 자신에게 밝힐 생각은 없어 보였고.
“지금 저희 기사단장이 임무 때문에 북부로 떠나 있는데, 곧 돌아옵니다. 그가 전하의 경호에는 적임자이니, 그를 붙여드리겠습니다.”
“그 소드마스터 말인가?”
“아직은 아닙니다.”
클로드는 대답하기 직전 조금 머뭇거렸다.
분명 아서는 어딜 보나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단 하나, 검기를 낼 수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 나름은 노력하고 있는 듯했지만 검사의 집념이 응축된 검기가 그렇게 쉽게 생기는 건 아닐 것이다.
“그래도 소드마스터나 다름없다고 들었다. 그런 자를 내주는 건, 자네로서도 큰 결심이겠지. 이 충정은 잊지 않겠다.”
“최선을 다해 황태자 전하를 지키겠습니다.”
클로드는 고개를 숙였다.
정확한 연유가 무엇이든, 황태자는 남부를 선택했다.
그 믿음에 보답할 때였다.
다음 날 점심.
카리나와 아서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소식을 들은 황태자는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아서 경이 그…….”
“맞습니다.”
클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그를 부르겠습니다.”
만약, 황태자만 아니었다면 그는 바로 카리나를 만나러 갔을 것이다.
하지만 클로드는 그녀를 황태자의 시선에 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카리나는 묘하게 사람을 잡아당기는 힘이 있었으니까.
잠시 후, 아서가 도착했다.
아서는 그 먼 길을 달려왔는데도 전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클로드는 그에게 간략한 상황을 설명했다.
“그래서, 앞으론 그대가 황태자 전하의 호위를 맡아주어야겠어.”
“제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아서가 아무런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클로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서 본인은 그 자신이 제법 감정을 잘 숨긴다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마치, 카리나에 대한 구애처럼.
‘황실에 악감정이 있을 수밖에 없긴 하지.’
황실은 촉망받는 기사였던 아서가 재기가 불가능해 보이는 부상을 입자마자 내렸던 작위마저 거두어 버렸다. 그를 철저하게 부품으로만 보는 처사였다.
‘아서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겠군. 가능한 인력을 모두 동원해야겠어.’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 그에게는 훌륭한 기사단과 정보원들, 그리고 마법사가 있었다.
황태자는 그에게 많은 게 걸린 도박을 제의했고, 자신은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볼 때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카리나가 보고 싶었다.
그는 충동적으로 아서에게 황태자를 맡기고 그 자리를 나와버렸다.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 핑계를 대면서.
* * *
카리나는 황태자가 왔다는 사실에 놀랐고, 아서 혼자만 클로드에게 불려갔다는 사실에 내심 섭섭했지만 이내 두 감정 모두 떨쳐 버렸다.
자신은 아무런 능력이 없는 평민 출신 가신일 뿐이다.
조만간 소드마스터가 될 기사단장과 자신을 비교하면 곤란하다.
하지만 카리나는 아이들과 함께 본관에 도착했을 때, 반가운 동시에 믿을 수 없는 사람을 발견했다.
“……각하?”
클로드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