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우우욱……!”
오랜만에 느껴지는 종류의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카리나는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죽은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듯한 부패한 마물과 마수들의 사체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리고 천장과 바닥, 벽면에 빼곡하게 적힌 낯선 필체의 마법식까지.
“끔찍하군.”
아서가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평소에도 이랬나?”
“아뇨.”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렝케의 작업 방식을 알고 있었다.
렝케는 편집증에 가까운 결벽증이 있었기에, 실험이 끝나면 카리나를 시켜 쓸고 닦게 했다.
즉, 이 실험실을 마지막으로 사용한 사람은…….
‘절대 렝케 경이 아니야.’
카리나는 아서를 향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경, 들어오면서 무언가 이상한 점은 없었나요?”
“많았지.”
아서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럼 왜 저에게 말을 안 하셨죠?”
“내가 다 처리하면 되니, 네가 신경 쓸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잠시 어이가 없으면서도 아서의 실력에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카리나는 실험실까지 들어오는 길에서 위협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
아서의 실력이 조금만 덜 뛰어났더라도 자신은 아마 반송장이 되어 이곳에 도착했을 것이다.
“어떤 것들이었는지 알려 주세요.”
“함정들의 높이가 지나치게 들쑥날쑥해.”
카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잠시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함정은 보통 성인에 맞추어 설계되지. 하지만 어떤 것들은 어른 눈높이에, 어떤 것들은 어린아이 눈높이에 맞추어 설계되어 있더군.”
“어린아이라고요……?”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머릿속에서 한 명의 이름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버리올.
지금쯤, 열 살 남짓할 소년일.
카리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다른 특이한 점은 없었어요?”
“함정 말고는 딱히……. 어린아이 눈높이에 맞추어 설계된 것들이 더욱더 악랄하다는 것 말고는, 딱히 특이한 건 없었다.”
“어린아이용 함정이라면, 성인에겐 아무런 해가 가지 않는 건가요?”
“천만에.”
아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다리부터 허리까지 완전히 갈려서, 순식간에 죽고 말았을걸.”
“…….”
카리나는 마법식을 향해 다가갔다.
아서의 이야기를 들으면 혹시 버리올이 활동을 시작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마법식을 보면 그 생각이 사라졌다.
‘천장에 손이 닿으려면,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야 해.’
카리나는 마법식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제 그녀는 마법식의 종류 정도는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드러난 이것들은…….
‘전혀 모르겠어.’
카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수준도, 아이들의 수준도, 어쩌면 렝케 경의 수준도 훌쩍 뛰어넘은 듯한 마법식이었다.
‘베껴가야겠어.’
지금 당장은 몰라도 언젠가는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룻밤이면 마법식을 모두 기록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니, 카리나는 지금 당장은 실험실을 좀 더 둘러보기로 했다.
‘……역시.’
렝케 경이 떠난 이후, 이 실험실을 사용한 사람은 값진 재료와 도구들을 모두 털어 갔다.
카리나는 곳곳에서 휑한 자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카리나는 누군가가 바닥의 타일을 벗겨 내고 그 안에서 반쯤 끄집어내다 만 문서를 발견했다.
그녀는 별 기대 없이 종이 더미를 집어 들었다.
이 실험실을 뒤진 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버려두고 갈 정도면 보잘것없는 종류의 문서일 것이다.
‘……!’
카리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지?”
“…….”
카리나는 아서에게 대답 대신 서류를 건네주었다.
“농노 문서?”
아서가 얼굴을 찌푸렸다.
“아까 그 에보슨이라는 자가 남작가의 농노였군.”
카리나는 이제야 에보슨이 왜 남작위를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브리튼 남작위는, 자신과 부모의 혈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에보슨에게는 불행히도, 작위는 영지나 저택과는 달리 영원히 귀족에게 귀속되었다.
영지와 저택을 판다면 당연히 허울뿐힌 작위이기는 하겠지만 그마저도 렝케나 카리나에게서 강제로 가져올 순 없었다.
‘그래서 내게 빚을 전부 탕감해 주겠다고 한 거야. 내가 작위를 순순히 넘겨주도록.’
카리나는 농노 문서를 조심스레 접어 품에 넣은 다음, 실험실 전체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하지만 별다른 단서는 나오지 않았고, 결국 카리나는 낯선 마법식을 모두 기록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다음날 아침.
카리나는 저택을 찾아온 에보슨과 다시 대면했다.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네.”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보슨은 초조한 미소를 지었다.
“궁금하군요.”
“지하에서 이런 걸 발견했어요.”
카리나는 그에게 농노 문서를 건네주었다.
“……!”
에보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건…….”
“간신히 찾았어요. 꽁꽁 숨겨져 있더군요.”
에보슨은 말이 잠시 말이 없더니, 떨리는 손으로 다시 카리나에게 문서를 건네주었다.
“브리튼 양이 가지고 계십시오.”
“왜죠?”
“제가 그걸 가지고 있다간…… 당장이라도 찢어버릴 것 같으니까요.”
그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에보슨의 손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카리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찢으세요.”
“예?”
“어차피, 그러라고 가지고 온 거예요. 에보슨 씨께서 하고 싶은 대로 하시라고.”
“……!”
카리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차피 신분은 회복하셨을 테니, 이 종이가 세간에 알려진다 한들 다시 농노가 되실 리는 없겠죠. 하지만…….”
“저와 제 부모님이 손가락질 받긴 할 겁니다.”
에보슨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눈으로 보이는 증거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 차이니까요.”
“렝케 경이…… 이 문서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었나요?”
“딱 한 번, 있었습니다.”
에보슨이 쓰게 대답했다.
“자신에겐 제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게 있다고 하더군요.”
“…….”
덩달아 카리나의 입맛도 썼다.
사실, 그녀가 농노 문서를 본 순간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였다.
‘이걸로 협박했구나.’
카리나는 북부까지 온 이상 정당한 이득을 찾고 싶은 것이었지, 평범한 가족을 협박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 순간 렝케와 같은 수준의 인간으로 떨어져 버릴 테니까.
그녀는 문서를 에보슨의 손에 반강제로 쥐여 주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태우든, 찢든…… 상관하지 않겠어요.”
그 말에 에보슨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품에서 성냥을 꺼내, 순식간에 종잇장들을 태워 버렸다.
에보슨은 문서가 잿가루가 되어 버린 뒤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모양인지, 구둣발로 짓밟기까지 했다.
카리나는 그가 안정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빚은 모두 탕감해드리겠습니다.”
“네?”
예상치 못한 말에 카리나는 놀라고 말았다.
“작위를 넘기지 않아도요?”
“이제는…… 필요없습니다.”
에보슨이 조용히 대답했다.
“이게, 제가 바로 원하던 것이었으니까요.”
카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생각지도 못한 성과였다.
이제 그녀가 작위를 온전히 물려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샘 에보슨이라는 사람의 신뢰가 바로 그 성과였다.
그녀는 에보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에보슨 씨, 렝케 경의 자금을 여태까지 융통해 주셨죠?”
“맞습니다.”
에보슨이 순순히 대답했다.
“영지와 작위를 모두 팔아 주세요. 이 저택만 남기고요.”
“……!”
에보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값만 후하게 쳐주신다면 에보슨 씨께서 사셔도 상관없어요.”
“빚은 제가 다 탕감해드리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관리할 수 없으니까요.”
카리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여기에 남겨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돈으로 바꾸는 게 낫죠.”
물론, 사정은 그보다 좀 더 복잡했다. 카리나는 미지의 마법사가 더는 이 저택을 사용할 수 없게 할 생각이었다.
즉, 저택의 완전한 파괴였다.
그럴려면 돈이 필요했고.
‘지금은 떠났지만 언제 또 돌아올지 몰라.’
만약 이곳이 남부였다면 카리나는 이렇게 극단적인 수는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한 번 왕복하기 위해선 보름이라는 시간을 소요해야 하는 북부였다.
‘내가 관리할 수 없다면, 사용할 수 없도록 해야 해.’
카리나는 자신의 계획을 철거 당일에나 에보슨에게 알릴 생각이었다.
만약에라도 철거 계획이 그를 통해 새어 나가, 렝케의 공범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구매처를 찾아보겠습니다.”
“에보슨 씨만 믿을게요.”
생긋 웃는 카리나의 귓가에, 의외의 질문이 들려왔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무슨 아이 말씀이신가요?”
“올리버 라크포드 말입니다. 렝케 경이 남부로 데려갔던.”
“……!”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렝케 경과 동행한 열 살 남짓한 그 소년을 보기는 했다.
하지만 그 소년이 소란을 틈타 사라진 뒤로는 한동안 잊고 있었다.
어차피, 렝케에게서 학대만 당하던 불쌍한 아이다.
자유를 찾았다면 그게 기쁜 소식이라고 생각하면서.
따라서 카리나를 놀래킨 건 그 아이의 존재가 아니었다.
어딘가 익숙한 울림의 이름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카리나의 눈앞에 시퍼런 글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