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사방이 조용해졌다.
아서야 늘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고, 텟사는 계속 입을 틀어막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받을 수 없습니다.”
마침내 타이슨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는, 카리나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그녀는 왜 받을 수 없는지 되묻지 않았다.
타이슨처럼 자존심이 강한 사람에게 친절을 강요했다간 역효과만 날 뿐이다.
“저는 그때 진 빚을 갚을 뿐이에요, 타이슨 씨.”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타이슨 씨.”
카리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때, 저희를 도와주지 않으셨더라면 저와 아이들은 다시 집으로 끌려갔겠죠.”
카리나는 최소한의 설명만 고심해서 골랐다.
“그리고 한 명쯤은 죽었을 거예요. 그게 제가 되었을 수도 있고요.”
“……!”
타이슨의 시선이 흔들렸다.
아마 그는 당시 카리나와 아이들이 그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듯했다.
“그래서 저는 타이슨 씨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 드리고 싶어요. 그게 그렇게 불편하신가요?”
“……아닙니다.”
타이슨은 고개를 떨구었다.
“단지, 제게 이런 행운이 생겼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뿐입니다.”
카리나는 그를 충분히 이해했다.
그의 입장에서 그 자신이 한 일은 작은 적선일 뿐.
이렇게 큰 보답으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카리나는 당연히 돈을 들고 다니지 않았지만, 제국 은행에 상당한 돈을 맡겨두었기 때문에 며칠 이내로 이자를 갚아주겠다고 약속했다.
타이슨과 텟사는 카리나가 당황할 정도로 감사 인사를 퍼부었다.
잠시 후, 그들은 타이슨과 텟사의 집으로 나오자마자 마차를 탔다.
어차피 딱히 묵을 곳도 없겠다, 바로 저택으로 갈 생각이었다.
마부는 브리튼 남작저로 가 달라는 말에 의아해하는 듯했지만, 돈을 보여주자 군말 없이 말 고삐를 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리나의 눈에 익숙한 건물의 우중충한 외관이 눈에 들어왔다.
태어나서 평생을 자란 저택이자 곧 자신의 것이 될 저택이기도 했다.
마차는 대문 바로 앞에 그들을 내려주었다.
‘어라……?’
대문은 쇠사슬로 꽁꽁 묶여 있었다. 카리나는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지?’
사용인이 있다면 문을 이런 식으로 봉쇄했을 리는 없다.
‘전부 해고당한 거야.’
무언가 이상했다. 아무리 가주가 죽었다고 한들 기존 사용인의 고용은 유지되는 게 보통이었다.
후계자가 있는 경우엔 더더욱.
카리나는 아서를 불렀다.
“이것 좀, 잘라줄래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쇠사슬이 깔끔하게 절단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마법은 아니네.’
그렇다면 이 쇠사슬을 감아놓은 사람은 절대 렝케가 아닐 것이다.
‘에보슨이라는 사람이겠지.’
카리나는 그들을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는 마부에게 돈을 좀 더 쥐여주며 기다려달라고 한 다음에, 태연하게 대문을 열고 발을 들였다.
정원 역시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티가 역력했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린 건.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카리나는 팽팽히 긴장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렝케와 비슷하거나 조금 젊은 나이대일까.
처음 보는 중년 남성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말쑥한 차림새와 차분한 언사에서 그 신분을 대충 추측할 수 있는 듯했다.
“에보슨 씨 되시나요?”
“맞습니다.”
카리나는 긴장을 풀었다.
“사용인이 한 명도 없네요.”
“렝케 경이 남부로 떠나기 직전, 전부 해고하셨습니다.”
“……그 사람이요?”
카리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못 들으신 모양이군요.”
카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히 들었을 리가 없다.
자신은 그가 울며 겨자먹기로 삼은 후계자에 불과했으니까.
에보슨은 성큼 걸어와 정문에 도달했다.
저택으로 바로 들어가는 출입구는 대문과 마찬가지로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었다.
“아무래도 들어가서 설명을 드리는 게 낫겠습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쇠사슬을 풀었다.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인 순간.
‘……!’
카리나는 당황한 기색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남작저가 기억 속 모습보다 훨씬 초라했던 것이다.
‘그간 공작저에 너무 익숙해져서 착각한 걸까?’
하지만 카리나는 이내 정말로 남작저의 형편이 좋지 않음을 깨달았다.
값나가는 장식이나 가구들은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엔 휑한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렝케 경은 대대로 물려받은 이 저택을 애지중지했다.
이렇게 저택을 훼손시킬 이유라곤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단 하나.
‘내가 모르는 사이, 빚이 많이 생겼다면…….’
당연히 렝케의 사후 빚쟁이들이 몰려와 값나가는 물건들은 모두 뜯어내었을 것이다.
“빚이 많이 남아 있나요?”
“예.”
에보슨은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카리나와 아서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카리나는 응접실까지 가는 내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곳 하나 온전한 곳 없이 휑한 것이, 남작가의 재정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여기까지 헛걸음을 한 걸까. 빚 때문에 영지와 저택을 팔아야 하면 남작위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빈껍데기일 뿐인데…….’
카리나는 울적한 생각에 잠시 잠겼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칫하면 구렁텅이에 빠져버렸을지도 모르는 타이슨을 구해주지 않았는가.
만약 자신이 북부로 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은인은 사기꾼에 홀려 송두리째 가산을 내어주었을 것이다.
아직 실마리도 잡지 못한 렝케의 공범 문제도 있었고.
잠시 후 도착한 응접실 역시 온통 먼지가 쌓여 있었기에, 의자에 앉기 전 대충 손으로 털어내야 했다.
그래도 가구나 장식품 하나 없이 휑한 저택의 다른 공간과는 달리 응접실만큼은 본디의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에보슨은 마치 자신이 이 저택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좋은 소파에 익숙하게 기대어 앉았다.
“단도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브리튼 양.”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카리나는 이어질 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빚을 갚기 위해선 영지와 저택도 내놓아야 한다고 하겠지.’
하지만, 곧이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카리나의 예상과 완전히 정반대였다.
“남작위를 제게 파십시오. 그러면 모든 빚을 탕감해 드리겠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카리나는 조금 입을 벌린 상태에서 굳어버렸다.
‘무슨 소리지?’
남작위를 팔라니.
물론 작위의 매매가 금지되어 있는 건 아니었다.
특히 남작위처럼 파는 사람도 큰 가치가 없다 느끼고, 사는 사람도 부담스럽지 않은 작위의 경우에는 일년에 십 수 번 거래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막연히 알고만 있는 것과, 실제로 제안을 듣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에보슨 씨는 렝케 경의 유산관리인이 아니신 건가요?”
“아, 제 소개를 미처 못 드렸군요.”
에보슨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샘 에보슨입니다. 렝케 경과는…… 거래를 자주 했습니다.”
“거래요?”
“제가 주로 돈을 빌려드렸죠.”
“……!”
카리나는 기가 막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유산관리인인 줄 알았는데, 사실상 저택과 영지를 모조리 가져갈 권리가 있는 채권자였다니.
“그럼, 저에 대해선 어떻게 아신 거죠?”
에보슨은 어깨를 으쓱했다.
“렝케 경이 제게 빚을 졌으니, 후계자가 누군지 알아내는 건 숨 쉬는 것보다도 더 쉽습니다.”
“그리고 에보슨 씨는 그 빚보다, 남작위를 더 원하시는 거고요.”
“맞습니다. 이해가 빠르시군요.”
카리나는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 정도는 천천히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죠, 에보슨 씨?”
“당연합니다.”
에보슨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럼, 여기에서 하루쯤 묵으면서 생각해 볼게요. 뭐니 뭐니 해도 제 고향집이니까요.”
“침대도 없지만은…… 그걸 원하신다면야.”
다행히도 에보슨은 순순히 자리를 떠나주었다.
카리나는 그가 저택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택을 지킬지, 작위를 지킬지는 저택에 뭐가 남아있는지부터 살펴보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라면 저택의 값나가는 구조물들부터 챙겼겠지만, 카리나에게 중요한 건 단 한 가지였다.
실험실.
그 가치를 아는 자에게는 금광이나 다름없지만, 모르는 자에겐 쓸데없는 창고나 마찬가지인.
카리나가 일어나서 움직이자 아서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지하에 실험실이 있어요.”
카리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서는 클로드로부터 모든 설명을 들었기 때문에,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상황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는 묵묵히 카리나를 따라 걷다가, 지하 실험실로 가는 통로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열었다.
“무슨 수를 써 놓았을지도 모르는 자다. 내가 먼저 들어가지.”
카리나는 잠시 물러서, 그를 먼저 안으로 들였다.
아서의 추측이 맞았는지 곳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기구들이 튀어나와 그들의 목숨을 위협했다.
다행히, 아서의 움직임 한 번에 공중분해되고 말았지만.
카리나는 오히려 안심했다.
이정도 장치가 되어있다면 채권자들은 감히 이곳에 발을 들일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서의 다소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인 것 같군.”
카리나는 황급히 그를 제치고 실험실에 발을 들였다.
“……!”
그녀의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지는 데까진, 채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