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입양합니다 (101)화 (101/145)

<101화>

“경……!”

카리나는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가 소드마스터가 되었음에도 주군에게 알리지 않는 건 중죄였다.

‘삼 년 안에 소드마스터가 될 거라는 예측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웃겼을까.’

모두가 언제 아서 템프턴이 소드마스터가 될지 기다리며 전전긍긍했고, 심지어 클로드도 최대한 그의 편의를 봐주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흥분을 금세 가라앉혔다.

어차피 그녀 또한 아이들의 능력을 클로드에게서 꽤나 오래 숨겨 왔지 않았던가.

그래서 카리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사실관계만을 물었다.

“각하께선 이 사실을 아셔요?”

“모른다.”

아서는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돌아가면 각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알리겠어요. 경이 소드마스터이면서도, 모두에게 숨겨 왔다고요.”

“네가 말하지 않을 거라는 데 10키브린을 걸지.”

“……왜죠?”

“내가 검기를 다룰 수 있는 건, 약효가 강할 때뿐이니까.”

“아…….”

카리나는 그의 말에 곧바로 수긍하고 말았다.

그녀가 없으면, 약도 없다.

에이드리안은 약초 ‘카리나움’을 카리나와 상관없이 증식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 상황에서 아서 템프턴이 약효가 강하게 돌 때만 검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카리나움’을 키워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카리나에게 어마어마한 부담이 지워질 것이다.

“그래서 자원한 거군요. 제게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안 되니까.”

“잘 알고 있군.”

“그래도 각하께는 알리겠어요.”

카리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쓸데없는 부담감은 싫으니 소문을 퍼뜨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클로드는 이 사실을 알아야 했다.

아서는 코웃음을 쳤다.

“마음대로 해라. 어쨌든 너와 나는 죽을 때까지 떨어질 수 없어.”

맞는 말이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지만, 어딘가 기분이 나빠졌다.

“내게 브리튼 양은 내 목숨보다도 소중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니.”

아서 템프턴답지 않게 모처럼 잘 포장했다만은, 그녀를 살아 있는 약병 취급하는 게 아닌가.

“다행히 브리튼 양은 나보다 어리지. 일반적으로 여자의 수명이 남자보다 기니, 건강 관리를 잘하고 이상한 자에게 당하지만 않는다면 평생 약초를 제공할 수 있겠지.”

“……그것참 사려 깊네요.”

카리나는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이유야 결코 정상이 아니다마는, 그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평생 노력하리라는 사실은 충분히 느껴졌다.

“기회가 있다면 그 단검도 제대로 사용하는 법을 배워 둬. 평범한 단검이 아니니까, 기초만 익혀도 제법 쓸 만할 거다.”

아서의 말은 정확했다. 아무리 좋은 검이라도 제대로 사용할 줄을 모르면 순식간에 남의 손으로 넘어가 카리나의 목을 노릴 것이다.

그녀는 아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침 잘됐네요. 가르쳐 주세요.”

“내가? 브리튼 양을?”

아서는 다소 당황한 듯했다.

“경만 한 적임자가 없잖아요. 마침 남부로 돌아갈 때까지 시간이 많기도 하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뜸을 잠시 들였다.

“제가 죽으면 그날로 경의 커리어도 끝이니, 남들보다 좀 더 잘 가르쳐 주겠죠.”

“……확실히 어중이떠중이들에게 가르침을 청해 봤자 안 배우니만 못하지.”

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적어도 사람을 베는 방법 정도는 가르쳐 주지.”

“그 정도면 충분해요.”

어차피 카리나가 전선에 나가 싸울 일은 없을 것이다.

항상 공작가의 보호를 받고 있기도 할 터이고.

그러니 기왕 클로드가 준 단검을 빼앗기지 않고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 정도만 알면 족했다.

아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정도에 만족한다면야…… 그래서, 여기에서 밤을 지새울 건가?”

“아, 그, 어서 들어가요!”

그제야 카리나는 깨달았다.

자신이 평온하게 대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아서가 큰 체구로 흐르는 비를 막아 주고 있어서임을.

그들은 서둘러 가장 가까운 건물로 들어갔다.

일단 비를 피한 다음, 마차를 불러 저택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아.’

카리나는 그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깨달았다.

장대비 때문인지 기억만큼 북적이지는 않았지만 확실했다.

그들이 비를 피하러 들어온 장소는 상단 어벨라우의 건물이었다.

바로 그녀가 아이들과 함께 타고 토르스로 향했던 마차가 소속되어 있는 상단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문지기가 아니었다면 우린…….’

그간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나머지 친절한 문지기, 타이슨에 대해선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렝케 경은 금세 카리나와 아이들의 행방을 추적했을지도 모른다.

‘이번 기회에 보답해야겠어.’

그때 타이슨은 세 사람의 마차 삯조차 대신 내주었다.

문지기의 주머니 사정이야 뻔하니, 그의 입장에선 큰 호의였을 것이다.

카리나는 보답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잠깐만요.”

그녀는 마구간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서는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녀를 따라와 주었다.

‘…….’

카리나는 실망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마구간의 문지기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 난관에 멈출 수는 없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처음 보는 문지기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마차가 한 대도 안 떠납니다. 내일 오셔야겠어요.”

문지기는 그녀와 아서를 발견하자마자 그들의 용건을 묻지도 않고 줄줄 읊었다.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찾고 있어요.”

“무슨 사람 말씀이십니까?”

카리나는 문지기의 말투가 제법 공손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좋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아서는…….

글쎄, 아서는 거적때기를 입고 있어도 기사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아볼 만한 사람이었다.

“타이슨이라는 문지기인데…….”

“타이슨?”

문지기가 얼굴을 대놓고 찌푸렸다.

“알긴 알지만…… 무슨 일입니까?”

카리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타이슨은 동료들에게도 인망이 좋은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찾아와 행방을 물으면 경계가 될 만도 했다.

“올해 초쯤에 제게 돈을 빌려주셨는데, 그때는 제가 경황이 없어 못 갚았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사업이 잘되어서 갚으려고요.”

“정말입니까?”

문지기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네. 그때는 제가 많이 어려웠거든요. 운이 좋아서 지금은 형편이 많이 나아졌지만요.”

“그 찔러도 피눈물 하나 안 날 것 같은 인간이 돈을 빌려주었다고요?”

“네?”

이번에는 카리나가 놀랄 차례였다.

새로운 문지기는 초조한 듯 턱을 긁었다.

“거참, 겨우 반년 사이에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게 정말이었나 보군요.”

“그게 무슨…….”

“저야 그 사람을 안 지 얼마 안 되긴 하는데…… 완전 짠돌이입니다. 돈이라면 눈이 돌아가서, 뭐든 하는 사람이더군요. 동료의 자리를 빼앗기까지 해서, 이 근방에서 타이슨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

카리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잠시나마 알았던, 아니 안다고 생각했던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의 이야기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동명이인이 아닐까.’

하지만 같은 상단, 같은 장소에서 문지기로 근무하는 동명이인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런 상황이라면 더더욱 돈을 갚아야겠네요. 주소를 알려 주세요.”

문지기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타이슨의 주소를 내어 주었다.

교대 근무 전 잠시 집에서 쉬는 시간일 테니,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덧붙이면서.

카리나와 아서는 상단 근처의 가게에서 우산을 두 개 구매한 다음, 타이슨의 집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가는 길 내내 아서는 단 한 번도 카리나에게 사정을 묻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다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카리나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이미 그녀의 과거는 렝케에 의해 까발려졌다.

자신과 상단의 문지기 사이의 관계를 추측하는 덴 그리 많은 생각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얼마 후.

그들은 자그마한 집 앞에 도착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데도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아니야.’

카리나는 이내 자신이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열려 있는 문이 아니라, 부식되어 일부분 부서진 문이었기에 열린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틈 사이로 카리나가 결코 들으려 의도하지 않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또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야, 당신은!”

카리나의 몸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이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했다.

그녀와 아이들을 도와주었던 친절한 문지기의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여보, 내가 이런 거라도 해서 한 푼이라도 벌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했잖아! 내가 내 몸뚱이를 팔아서라도 치료비를 벌어 올 테니까, 당신은 그냥 쉬기만 하라고. 제발, 텟사……!”

카리나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이 잠깐의 대화로 자신은 모든 사정을 알아 버렸다.

그녀는 문을 몇 차례 두드렸다.

곧바로 말소리가 뚝, 하고 그치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돈은 내일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하루만 기다려 주시면…….”

피곤한 얼굴로 변명을 읊조리려던 타이슨이 카리나를 보자마자 놀란 얼굴로 우뚝 멈춰 섰다.

“저, 기억하시죠?”

카리나는 미소 지었다.

“그때 빌려주신 돈, 갚으러 왔어요. 이자까지 합해서요.”

“…….”

잠시간의 침묵 후, 타이슨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들어오시죠.”

카리나는 현관에서 대충 비를 털어낸 다음에야 집안에 발을 들였다.

병자가 있는 집에 물기를 뚝뚝 흘리며 들어갈 수는 없었으니까.

타이슨은 그들을 거실로 안내했다.

유일하게 불을 때고 있는 곳이 거실이라고 멋쩍게 덧붙이면서.

창백한 얼굴에 비쩍 마른 여인, 텟사가 그들을 반겼다.

텟사는 갈등의 원인인 듯한 정교한 자수틀을 소중하게 붙들고 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제 몸이 좋지 않아서 귀한 손님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하네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언질 한번 드리지 않고 무작정 들이닥친 건 저희인걸요.”

텟사는 희미하게 미소 짓더니, 타이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타이슨, 손님께 드릴 간식이라도 내야지. 찬장에 다기도 있을 테니 그것도 들고 와 줘.”

카리나는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타이슨은 이미 간식을 가지러 사라진 뒤였다.

‘뭐, 조금 늦게 저택에 가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그녀는 잠시 난롯불에 으슬으슬한 몸을 녹였다.

일반인들 앞에서 검기를 드러낼 순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추위에 무방비하게 당하고 있던 차였기에, 난롯불이 무척 반가웠다.

몇 분 후.

누군가가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텟사가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아, 왕진 시간인데……! 내 정신 좀 봐. 여기서 소리쳐도 타이슨에겐 안 들릴 텐데…… 좋은 음식은 쥐가 못 파먹도록 꼭꼭 숨겨 놓거든요.”

“괜찮아요, 제가 지금 의사 선생님께 문을 열어 드릴게요.”

카리나는 허둥거리는 텟사를 안심시켰다.

그녀는 서둘러 현관으로 나가서 문을 열었다.

그 순간.

“……!”

카리나의 눈과 입이 크게 열렸다.

속에서 불길이 확 치달아올랐다.

그녀는 이 의사를, 이 뻔뻔스러운 얼굴을 알았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롤랜드가 해괴한 불치병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며 첫 월급을 송두리째 털어간 사기꾼들 중 하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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