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아서 템프턴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카리나를 주시했다.
어제 아침, 클로드와 함께 나눈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브리튼 양을 지킬 호위들을 뽑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추가할 자들이 있다면 말하라. 하지만 단 한 명도 빼선 안 돼.”
아서는 얼굴을 찌푸렸다.
“다 어중이떠중이입니다.”
“경은 경 자신의 부하들을 어느 정도는 신뢰할 필요가 있어.”
“제가 가겠습니다.”
“…….”
침묵이 흘렀다.
클로드가 그를 비스듬하게 쳐다보았다.
“왜지?”
“제가 적임자입니다.”
아서는 당당하게 말했다.
사실, 기사단의 실질적인 업무와 단원 관리는 모두 부단장이 맡아서 하고 있었다.
그가 기사단장인 이유는 순전히 실력 하나뿐이었다.
클로드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기에, 아서는 주로 단독 임무로만 움직였다.
“겨우 그 이유인가? 경은 임무를 싫어하잖나.”
“알고 계셨습니까?”
클로드는 웃지 않았다.
“경이 자원하는 진짜 이유를 알고 싶군.”
아서는 평소 누구에게나 솔직한 편이었다.
심지어 그의 고용주 앞에서도.
하지만 그에게 카리나 브리튼이 평생의 동반자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입 밖으로 내어선 안 될 듯했다.
“그 멍청이들을 보냈다간 무슨 사달이 날까봐 두렵습니다.”
“정말 그것뿐인가?”
“예.”
클로드는 잠시 뜸을 들였다.
“……청혼을 했다고 들었다만.”
“브리튼 양이 거부했으니, 당시에 이미 끝난 이야기입니다.”
“흑심을 가진 자를 호위로 보낼 수는 없다. 브리튼 양도 불안해할 테니까.”
“브리튼 양은 신경도 안 쓰던데요?”
“…….”
언짢은 기색이 클로드의 얼굴을 스쳤다.
아서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각하께서 직접 가실 수는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정곡이었다.
아서는 호위의 적임자가 토르스 전체에서 단 둘뿐이라고 확신했다.
정체불명의 강력한 마법사가 카리나의 두 아이를 노리고 있다.
공작저에서 보호받을 때야 큰 걱정이 없겠지만, 카리나가 남부를 떠나려는 지금이 그 마법사에게 기회일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클로드 이외에는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클로드는 그의 자원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남부의 공작이 일개 가신의 호위 때문에 자리를 비우고 북부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기틀이 제대로 다져지고 부강한 영지라면 영주가 몇 달간 자리를 비우더라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문제는, 토르스는 그런 운 좋은 영지가 결코 아니라는 점이었다.
“……브리튼 양의 신변에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그날로 자네 제삿날인 줄 알아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가볍게 예를 표했다.
어차피 카리나 브리튼이 귀중한 약초를 만들어내는 이상, 그녀의 목숨은 그 자신의 목숨이나 마찬가지다.
굳이 클로드가 일러주지 않아도 목숨을 걸고 지킬 생각이었다.
“허튼 수작은 부릴 생각도 하지 말도록.”
“무슨 수작 말씀이십니까?”
아서는 반신반의하면서 되물었다.
아마, 그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게 맞다면…….
하지만 때마침 치체스터 경이 들어왔고, 이야기도 그 자리에서 끊기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카리나 브리튼이 그와 함께 북부로 떠나기 위해 마차로 다가오고 있었다.
* * *
카리나는 가만히 멈춰섰다.
“내가 반갑지 않은 모양이군.”
언제나 그렇듯 아서 템프턴은 사교적인 인사 한번 하는 법이 없었다.
“놀랐을 뿐이에요. 무려 기사단장님이 제 호위일 줄은 몰랐거든요.”
카리나는 놀란 기색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그야, 클로드가 최정예를 약속하긴 했지만 그건 당연히 이 남자를 제외하고서였다.
카리나 역시 전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남자를 호위로 데려간다는 건 생각지도 않았고.
전문가들은 아서가 길어도 삼 년 안에 소드마스터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이미 그가 인간의 수준을 벗어난 실력을 갖추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자원했다.”
“네?”
“네 호위로, 자원했다고.”
아서는 대놓고 귀찮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왜죠?”
카리나는 궁금증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아서 템프턴은 임무에 자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특히 소드마스터가 되는 수련 도중인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다른 어중이떠중이들에게 맡겼다가 내 약이 떨어지면 큰일이니까.”
“…….”
아서의 말이 너무나 진심으로 들려, 카리나는 잠시 할말을 잃었다.
“경 옆에 있으면 저는 절대 죽지 않겠네요.”
“정확히 아는군.”
그는 마차를 향해 고개짓했다.
“어서 출발하지. 갈 길이 머니까.”
“어…… 잠깐만요.”
카리나는 내심 클로드의 모습을 찾았으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작별 인사라도 하고 가고 싶은데…….’
하지만 클로드는 언제나 그랬듯 바쁠 것이다.
카리나는 포기하고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얘들아, 잘 지내야 해. 알겠지? 밥 잘 먹고, 공작 각하와 에두아르 씨와 체스 말 잘 듣고.”
“네에…….”
아이들은 우물쭈물 대답했다.
카리나는 애써 웃어보였다.
그녀라고 렝케 경의 저택에서 탈출한 이후 한 번도 떨어져 본적이 없는 아이들과 헤어지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카리나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마차에 타려던 때였다.
“브리튼 양.”
카리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반응하며 몸을 곧바로 돌렸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클로드가 서 있었다.
급하게 달려온 모양인지 머리카락은 헝클어졌고 옷매무새 역시 엉망이었다.
무얼 보나 작별 인사를 하러 온 사람이라기보단, 급한 용건이 생각나 달려온 사람이었다.
카리나가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무언가를 쑥 내밀었다.
‘……?’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작은 단도였다.
그녀의 손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은, 하지만 무엇이든 쓱쓱 벨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한.
그 모습은 카리나가 예전에 축제에서 샀던 주머니칼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금방 이가 나가서 버려야 했는데…….’
카리나가 주머니칼을 버리는 모습을 본 체스가 자신이 같이 갔어야 그녀가 사기를 당하지 않았을 거라고 툴툴거리던 기억이 났다.
“감사합니다, 각하. 마침 필요했거든요.”
카리나는 단도를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별다른 장식 없이 수수한 단도였지만, 카리나의 손에 맞춘 것처럼 안정감 있게 잡혀 마음에 들었다.
“마정석이야.”
클로드가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런 형태는 별로 만들어 본 적 이 없어서…… 시간이 좀 걸렸지.”
“직접 만드셨어요?”
“그래. 그대도 몸을 지킬 게 필요하니까.”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스스로 몸을 지켜야 할 상황이 오는 건 질색이었지만,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누군가 달려들면 그냥 그걸로 썰어버려. 그대 자신이 베이지 않도록 조심하고. 물론, 그걸 쓸만한 상황이 오지 않도록 해야겠지만.”
그는 아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한 것들, 잊지 않았겠지.”
“예.”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서를 잠시 주시하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카리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 각하.”
클로드가 다시금 카리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엔 작은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잘 계셔야 해요. 뭐든 무리하지 마시고요.”
“내가 할 소리를 하는군.”
클로드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조금 섞여 있었다.
“보름은 금방이지. 몸 조심히 다녀와라.”
“네.”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아이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시간이었다.
“엄마아…….”
아이들이 안아달라며 너나 할 것 없이 두 팔을 뻗었다.
카리나는 롤랜드와 멜리사를 번갈아 한 번씩 꼬옥 안아주었는데, 그때마다 나머지 한 명이 카리나의 몸에 매달려 한 덩어리가 되곤 했다.
“각하, 아이들을 잘 부탁드려요.”
“알겠다.”
카리나는 미소 지었다.
클로드의 그 한마디만으로도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그는 약속을 어기지 않을 인품과 약속을 지킬 능력을 갖췄으니까.
카리나는 울상을 짓는 아이들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마차에 올랐다.
어쩔 수 없다곤 해도 떠나려고 하니 마음이 정말 편치 않았다.
곧바로 마차가 출발했고, 카리나는 조그만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
아이들이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손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
자신들을 봐 달라는 듯이.
카리나도 손을 작은 창문 밖으로 꺼내 열심히 흔들었다.
위험하다는 아서의 핀잔이 들려왔지만, 카리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오래 아이들에게 인사를 해 주어야 할 것 같았기에.
* * *
여행길은 카리나와 아이들이 짐마차에서 보냈던 그 일주일과 비교가 되지도 않을 정도로 편했다.
그들은 예정보다 조금 더 빨리 카리나의 고향 마을에 도착했다.
카리나는 내심 습격받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렝케의 공범은 몸을 사리는 모양이었다.
“비가 오는군.”
하필이면 장대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북부의 기온 역시 남부와 달라, 따뜻한 기후에 익숙해져 있던 카리나는 덜덜 떨기 시작했다.
“얼른, 어디라도 들어가요.”
바로 그때.
따뜻한 온기가 카리나의 전신을 감쌌다.
깜짝 놀란 카리나는 두리번거리다가 더욱더 놀라고 말았다.
푸르스름한 빛이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카리나는 그 정체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오직 소드마스터만 쓸 수 있다는 검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