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입양합니다 (99)화 (99/145)

<99화>

‘…….’

카리나는 편지지를 꼭 쥐고서 입술을 짓이겼다.

예상한 일이었다.

렝케 경은 죽기 전, 카리나를 정식으로 입적했기 때문에 상속인은 자동적으로 그녀가 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카리나는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그간 그녀에게 공포와 억압의 대상이었던 저택을 물려받는다는 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카리나는 이렇게 작위도 영지도 이어받지 않은 채 시간이 계속 흐르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렝케는 죽었고,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유산관리인은 이렇게 편지를 보내 왔다.

‘어쩌지…….’

카리나는 생각에 잠겼다.

영지에 가서, 유산 상속 절차를 밟는다면 자신은 남작이 된다.

솔직히, 카리나 자신은 그다지 남작위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제 카리나는 멀쩡한 직업과 지위가 있었다. 5년의 계약이 끝나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더라도 공작가와의 거래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귀족들의 사회에 진입하기를 선망했던 적도 없었기에, 남작위는 더더욱 끌리는 유산이 아니었다.

하지만 카리나가 바로 상속을 포기하겠다고 답장을 써 보낼 수가 없는 이유가 있었다.

‘아이들은 달라.’

자신에게는 아무 쓸모 없는 남작위지만, 아이들에겐 다를지도 모른다.

물론 롤랜드도 멜리사도 능력이 출중한 데다 토르스 공작이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생겼으므로 탄탄대로만 걸을 것이다.

하지만 카리나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것이라면 모두 해 주고 싶었다.

* * *

“호위를 요청드립니다.”

카리나는 담담하게 말하고선 클로드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빠르게 편지를 훑어내린 클로드는 얼굴을 찡그렸다.

“꼭 가야겠나?”

“제국법을 찾아보았어요. 기간 내에 가지 않으면 상속 포기로 간주되더라고요.”

“…….”

사실, 기대하는 바가 한 가지 더 있긴 했으나 카리나는 그 사실만큼은 숨겼다.

입 밖으로 내었다간 클로드가 펄펄 뛸 종류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공범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렝케의 공범이라면 분명 그의 저택에도 들락날락거렸을 것이다.

카리나는 저택의 새로운 주인으로서 사용인들에게 그에 대한 단서를 탐문할 생각이었다.

클로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

“네, 가야 해요.”

대답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최정예로 꾸려보겠다.”

카리나는 놀라지 않았다.

만약 렝케의 공범이 아이들을 노린다면, 엄마인 자신도 유력한 납치 후보 중 하나일 것이다.

클로드가 최정예 호위를 붙여주는 건 예상했던 바였다.

카리나가 원했던 바이기도 했고.

“아이들을 잘 부탁드려요.”

클로드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혼자 가려고?”

“혼자는 아니죠. 호위가 있을 테니까요.”

“아니, 내 말은…….”

“네. 아이들은 토르스에 두고 갈 생각이에요. 여기만큼 아이들에게 안전한 곳도 없을 테니까요.”

정말이었다.

지금, 무려 20년 뒤에야 등장해야 할 마법이 나타난 지금 카리나가 아이들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클로드뿐이었다.

심지어 그녀 자신도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키지 못할 것이다.

‘나는 아무 능력도 없으니까.’

카리나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기껏해야 마정석을 만들어내는 것 정도.

물론 처음에는 신기하고 기뻤지만 누군가를 지키거나 공격할 수 없는 힘이었다.

그래서 카리나는 아이들이 상처 입을까 봐 걱정되면서도 북부로 데려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물론 토르스의 수비 인력 대부분을 데려간다면 아이들까지 호위가 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경우, 토르스는 대체 누가 지킨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카리나는 아이들을 떼어놓고 가야 했다.

사흘 후.

카리나는 북부로 떠날 채비를 모두 마쳤다.

아이들은 너무 울어 퉁퉁 부은 눈으로 카리나의 팔에 매달렸다.

“엄마, 저희도 갈래요오…….”

“안 돼.”

카리나는 엄격하게 말했다.

“너희에겐 너무 위험해.”

“그렇게 위험한 델, 엄마는 왜 가려고 하는 거예요?”

“엄마한테는 위험하지 않으니까.”

카리나는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별 소용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의 침울한 표정이 그다지 바뀌지 않은 걸 보면.

카리나는 가방이라기보단 궤짝에 가까워 보이는 짐가방을 쾅, 하고 닫았다.

“몰래 따라오는 것도 안 돼. 체스에게 감시도 부탁했어.”

카리나는 떠나기 직전, 짐 검사를 몇 번이나 할 생각이었다.

이 둘이라면 충분히 짐 더미 속에 숨어서 따라올 법했으니까.

마음은 충분히 이해되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남부에 얌전히 남아 있어 주는 게 모두를 위한 선택이었다.

롤랜드가 울상을 짓다가, 주머니를 뒤적거려 주먹만 한 꾸러미를 꺼냈다. 카리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으……. 공격 마법 두 가지랑 방어 마법 두 가지, 그리고 치유 마법까지 걸어 뒀어요.”

“치유 마법?”

카리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치유 마법은 극히 드문 데다 어렵다고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성공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소설 속 롤랜드도 상당 기간 치유 마법을 시전하지 못해 고생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별건 아니에요. 그래도 피 같은 건 멈출 수 있을 거예요. 상처를 다 낫게 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 거니까…….”

카리나는 미소 지었다.

“고마워, 롤랜드. 꼭 필요할 때마다 쓸게.”

“아뇨.”

롤랜드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아무 때나 써요. 진짜 많이 만들었어요. 엄청 넉넉하게 만들어 뒀으니까, 조금만 누가 엄마를 괴롭혀도 써요. 네?”

“…….”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가슴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치밀어 올랐다.

“……응.”

카리나는 간신히 입을 움직여 한 마디를 짜냈다.

“그럴게.”

롤랜드는 여전히 안심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카리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전에 준 거, 하루 만에 다 썼잖아. 하루가 뭐야? 한 시간만에 다 썼지. 이것도 낭비해 버리지 않을까, 걱정해도 괜찮을 판에 아무 때나 쓰라고 하니 팍팍 쓸게.”

“정말이에요?”

“그럼. 내가 언제 약속 어기는 거 봤어?”

“…….”

롤랜드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리나는 롤랜드와, 옆에서 침울하게 서 있는 멜리사를 끌어안았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보름 안에는 돌아올 테니까…… 너무 무서워하지는 마. 알겠지?”

카리나는 최대한 밝은 어투로 말하려고 노력했으나 속은 정반대였다.

겉으론 어른스러운 척해도 롤랜드와 멜리사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마음만 같아선 지금이라도 같이 가자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카리나는 겨우 충동적인 마음 때문에 아이들을 위험에 빠트릴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갑자기, 멜리사가 크게 도리질을 쳤다.

“……엄마 바보!”

“멜리사!”

롤랜드가 당황하며 멜리사를 향해 소리쳤다.

멜리사는 카리나의 품에서 몸을 떼어내더니 일곱 살짜리 여자아이가 지을 수 있는 표정 중 가장 화난 표정을 지었다.

“열다섯 밤을 어떻게 기다려요!”

카리나는 내심 지금이 겨울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겨울에는 마차가 더 느려진다.

보름이 아니라 한 달이 걸린다면, 아이들에게 정말로 힘겨운 시간이 될 것이다.

“기다려야 해.”

카리나는 이번만큼은 멜리사를 다독이지도, 용기를 북돋아 주지도 않았다.

그녀는 멜리사와 눈을 똑바로 맞추고는, 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기다릴 수 있지, 멜리사?”

“…….”

멜리사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이는 도리질을 치려 했지만, 이내 미약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엄마, 미워요. 왜, 왜 우리를 놔두고…….”

“미안해, 멜리사.”

카리나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기실 그녀가 아이들과 떨어져 혼자 가야 하는 이유는 능력 부족 탓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이들에게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면 자기들 능력이 있으니 상관없다고 하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들을 방패막이로 쓸 생각은 없었다.

카리나는 마지막으로 멜리사를 꽉 안아 주었다.

“이제 가 볼게. 배웅하러 올래, 말래?”

“……갈래요.”

멜리사의 삐죽거리는 입에서 울먹임과 함께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롤랜드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나는 사용인을 불러 가방을 마차에 실어달라고 부탁한 뒤에, 멜리사와 롤랜드의 손을 양손에 잡고 방을 나섰다.

아이들의 발걸음은 평소의 날아갈 듯한 모양새와 달리 매우 느릿느릿했는데, 카리나는 부러 지적하지 않고 그에 맞춰 걸어 주었다.

마침내 카리나가 타야 할 마차가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

카리나는 의아해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분명 클로드는 그녀에게 정예 호위들을 약속했다.

그런데, 카리나를 기다리고 있는 기사는 단 한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나중에 합류하나?’

가까이 다가간 순간.

카리나는 그 한 명이, 바로 클로드가 약속한 정예 호위의 전부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아서 템프턴.

미래의 소드마스터이자 지금도 기사단 전력의 절반을 차지하는 남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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