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 * *
톰보른 숲.
렝케의 죽음을 확인한 버리올은 싸늘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게 대한 정보를 주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렝케가 죽은 지금, 실력이 별 볼 일 없는 열 살짜리 소년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십 년 후면 올리버 라크포드가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을 최강자, 버리올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지금 그 누가 알겠는가?
그렇다.
자칭 버리올, 아명 올리버 라크포드는 각고의 노력 끝에 과거로 되돌아왔다.
비록 그가 정확히 바랐던 바는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몇 달 전, 수십 년 전으로 되돌아왔을 때부터 버리올은 롤랜드를 노렸다.
하지만 그가 렝케를 찾아갔을 땐 이미 카리나가 롤랜드와 멜리사를 데리고 도망친 후였다.
처음엔 버리올은 카리나 역시 과거로 되돌아온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카리나의 행각을 들으면 들을수록 아니라는 심증이 강해졌다.
미래의 카리나는 렝케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정말 과거로 되돌아왔다면 추적을 감수하고 도망치는 대신 렝케를 직접 무력화하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조금 전만 해도 그랬다.
‘저런 알량한 마정석 따위를 쓰는 게 아니라, 제대로 공격했겠지.’
미래가 항상 똑같이 흘러가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버리올은 어쩔 수 없이 렝케에게 마법사의 재능을 일부분만 드러내면서 롤랜드의 대용품이 되었다.
결코 렝케가 만족할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을 잘 조절하면서.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한 렝케가 결국 롤랜드를 찾아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비슷한 결과는 얻었지.’
실패를 예상하면서도 렝케에게 아이들을 납치하라는 명을 내린 건 롤랜드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오래전부터 렝케의 눈과 귀를 통해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그 결과, 롤랜드의 실력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고.
‘예전에 비하면 보잘것없군.’
버리올은 얼굴을 찡그리다가,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본디 롤랜드의 괴물 같은 위력은 그의 혈관에 흐르는 마력 유도제 때문이었으니까.
마정석에 걸어놓은 마법을 보니 그 재능은 여전했다.
아니, 렝케로부터 배울 때보다 기술은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
‘기술은 뛰어나되 위력은 평범한 편이 내가 다루기에도 나아.’
그래서 버리올은 렝케가 침입하기 쉽도록 별채의 결계를 부수고 그곳에 기거하는 공작의 가신을 죽이기만 했을 뿐, 아이들이 잠든 2층으로는 올라가지 않았다.
‘죽이려면 지금이라도 죽일 수 있어.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겨우 그런 게 아니지.’
버리올은 예전과 달리, 자신의 꼬드김에 넘어와 함께 전 세계의 지배를 꿈꾸는 롤랜드를 상상해 보았다.
대마법사 한 명은 바다를 얼리고 산을 옮긴다고 한다.
두 명이 모이면?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새롭게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버리올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
카리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항상 건장하고 듬직했던 에두아르가 창고 뒤편에서 쓰러져 있었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 흥건했다.
클로드는 격앙된 모습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에두아르.”
그가 에두아르를 힘주어 불렀으나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살아…… 있습니까?”
기사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르겠다.”
클로드가 다시금 에두아르의 맥을 확인하려는 그때.
베리티가 도착했다.
자다가 막 불려온 듯한 모습의 그녀는 이 자리에 모인 그 누구보다도 놀란 듯했다.
“이게 다 무슨…….”
“침입자가 있었다.”
베리티는 능숙하게 에두아르를 살피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아직 숨이 붙어 있습니다. 늦지 않았어요.”
그녀의 지시를 따라 기사들이 들것에 에두아르를 실어날랐다.
“에이드리안 경도 깨워요. 약초가 많이 필요할 테니까.”
베리티는 떠나기 직전, 카리나를 향해 돌아섰다.
“블…… 브리튼 양도 꼴이 말이 아니군요. 급한 상황이니 이 연고라도 챙겨 발라요.”
베리티는 카리나에게 감사 인사를 할 시간도 주지 않고 황급히 기사들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카리나는 연고를 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결계가 깨졌고, 에두아르는 크게 다쳤다.
그 모든 걸 가능하게끔 한 침입자가 있었으나 렝케는 그 정체를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죽었다.
그리고 렝케가 죽은 이유는…… 롤랜드의 숙적 버리올이 쓰던 마법 때문이었고.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롤랜드의 출중한 능력과 그 많은 노력, 그리고 헌신에도 불구하고 버리올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 몰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롤랜드는 세상을 구하고 나서도 그와 싸워야만 했다.
‘버리올이 일찍 활동을 시작한 걸까?’
그렇다기엔 그 역시 롤랜드와 비슷한 나이였다.
많아 봤자 열 살에 불과할 그가 벌써부터 악행을 저지르고 다닐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쓰던 마법이 나타났다는 것 역시 심상치 않은 문제였기에, 카리나는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나처럼…… 전생의 기억이 있는 사람이 있는 걸까.’
지금으로선 가장 가능성 높은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그 역시 카리나처럼 전생의 기억을 여러 가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전생에 읽은 소설은 철저하게 롤랜드 시점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이었다.
카리나는 이마를 짚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꼬이기만 했다.
‘간단하게 생각하자. 렝케 경은 죽었지만 렝케 경의 공범이 아이들을 노리고 있어.’
그녀는 클로드를 올려다보았다.
“아이들은요?”
“아스트리드와 함께 있어.”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클로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브리튼 양, 제안할 게 있다.”
“뭔가요?”
“별채는 이제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 내 부족한 실력으론 부인과 아이들을 지키는 게 역부족인 것 같군. 그러니…….”
클로드는 잠시 망설였다.
“본관으로 옮기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
카리나가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평민 출신 가신이 본관에서 산다는 건, 분명 파격적인 대우였으니까.
하지만 카리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제안을 바로 받아들였다.
“감사드립니다, 각하.”
“그럴 것 없다. 가신과 그 가족을 지키는 것 역시 내가 해야 할 일이니…… 이번엔 실패한 듯하지만.”
카리나는 그가 자신과 아이들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분명, 클로드는 위중한 상태의 에두아르를 떠올렸을 것이다.
카리나는 이제 그녀가 어디에 기거할 것인지, 별채는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해 설명하는 클로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해야겠지.’
이젠 아이들의 능력을 숨길 수 없다. 숨길 이유도 없고.
도리어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하는 게 그녀에게나 아이들에게나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카리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그간…… 내가 숨겨 왔으니까.’
아니, 그것마저도 거짓이었다.
카리나가 눈앞의 이 남자에게 진실을 털어놓고 싶지 않은 이유는…….
‘두려워.’
카리나는 두려웠다.
아이들의 능력을 그녀가 줄곧 숨겨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클로드가 그녀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릴까 봐…….
그가 그럴 성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바보 같은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용기를 냈다.
“각하, 렝케 경의 공범이 왜 제 아이들을 노렸는지 알 것 같아요. 제 아이들은…….”
그녀는 잘 떨어지지 않은 혀를 천천히 움직였다.
“재능이 뛰어나요. 마법사라면 누구나 탐낼 만큼이요.”
클로드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알고 있었다.”
“네……?”
카리나는 어리둥절해 하며 반문하다가, 이내 깨달았다.
“와일더 씨와 체스가 이야기했군요.”
자괴감이 밀려왔다.
자신은 얼마나 바보 같았는가.
와일더도, 체스도 결국은 클로드의 사람이었지 자신의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클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와일더만 내게 알렸지. 체스는…… 글쎄, 끝까지 모른 척 잡아떼더군.”
“그간 모른 척을 해주신 거군요.”
“언제 내게 알릴지는 그대와 아이들이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성급하게 얘기해서, 그대가 위협으로 느끼는 걸 바라지 않았어.”
클로드는 씁쓸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이미 그런 실수는, 반년도 더 전에 했으니까.”
카리나는 그가 자신과의 첫 만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그땐 저도 실수했어요. 각하를 오해했으니까요.”
“다 지나간 일이지. 신경 쓰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브리튼 양.”
갑자기, 이상한 충동이 불쑥 치밀어올랐다.
카리나는 당황하다가도, 이내 그것이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저를 이름으로 불러 주시면 안 될까요?”
클로드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으나, 카리나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당황하며 고개를 숙인 나머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황급히 이유를 설명했다.
“그, 그 성은…… 렝케 경의 성이니까요. 원래 제가 쓰던 게 아니기도 했고…… 각하에게만이라도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서요.”
침묵이 흘렀다.
카리나는 감히 고개를 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잠시 후.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질였다.
“카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