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생일 파티를 마친 멜리사와 롤랜드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이들은 각자 받은 선물을 아예 침대에서 껴안고 있었다.
도자기 인형은 부서질까봐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올려두었지만.
“너무 좋아.”
멜리사가 행복하게 중얼거렸다.
“나도.”
롤랜드가 자신의 머리맡 바로 옆에 둔 성 모형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아스트리드의 설명에 따르면 선대 공작 부부가 개축하려고 계획했던 모습을 본따 만든 모형이었는데, 토르스 공작저를 더욱더 웅장하고 화려하게 만든 듯한 모습이었다.
“엄마도, 진짜 우리 엄마고…… 그 사람도 잡혀갔고.”
멜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걱정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동안 멜리사와 롤랜드는 그들이 카리나의 아이들이라는 ‘거짓말’이 들킬까봐 전전긍긍해왔다.
하지만 이제 카리나가 아이들의 엄마라는 말은 거짓말이 아닌 진실이되었다.
그 누구도 엄마와 자신들을 갈라놓지 못할 것이다.
“어?”
멜리사가 낸 뜬금없는 소리에 롤랜드가 날카롭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
멜리사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는 크게 질린 눈을 불안하게 굴렸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마력이, 바깥에서 느껴졌다.
비록 풀이 한층 꺾이긴 했어도 너무나 익숙한 종류의 것이었다.
분명, 지하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할……!
멜리사는 너무나 겁에 질린 나머지 이를 딱딱거리며 말했다.
“그, 그 사람.”
롤랜드가 벌떡 일어섰다.
“어딨어?”
“바로 밖.”
멜리사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말했다. 전신에 비가 오듯 식은땀이 쏟아졌다.
“바, 방금 현관문을 열었어. 올라오려는 거 같아.”
롤랜드의 결정은 단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창문으로 도망쳐, 멜리사.”
소년은 방문을 향해 황급히 뛰어갔다. 렝케가 원하는 건 어차피 자신이다. 멜리사나 카리나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순 없었다.
하지만 롤랜드는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튀어나온 멜리사에 의해 가로막히고 말았다.
“가지 마.”
“가야 해.”
롤랜드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잡힐 테니까, 멜리사는 도망쳐. 공작님도 부르고, 체스도 불러.”
“해 봤자 소용없잖아.”
멜리사는 숨죽인 목소리로 롤랜드를 힐난했다.
“그땐 이미, 롤랜드는 이미 그 사람에게…….”
갑자기, 멜리사는 말을 멈추었다.
무언가가 생각이 난 탓이었다.
“싸우자.”
“싸우자고?”
롤랜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잡혀가는 것보다는 나아.”
멜리사는 양 주먹을 꼬옥 쥐었다.
“하, 하지만…….”
“그 사람, 마력이 엄청 약해졌어.”
멜리사가 조용히 말했다.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야. 이길 수 있어, 롤랜드.”
롤랜드는 멜리사를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분명 그동안 그들은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렝케 경처럼 노련한 마법사에게 댈 바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멜리사가 착각했을 수도 있어.’
롤랜드는 멜리사를 신뢰했지만, 마력의 종류뿐만 아니라 그 수준까지 알 수 있다는 말은 믿기 힘들었다.
만약 멜리사의 착각 탓에 어설프게 덤벼들었다간 둘 모두 끌려가고 말 것이다.
롤랜드 혼자 희생하는 게 훨씬 안전한 방법이었다.
롤랜드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진짜야! 왜 못 믿어?”
멜리사가 분개했다.
“아마 호문쿨루스와 실제 사람도 분간을 못…….”
그녀는 말을 멈추었다.
롤랜드와 멜리사는 서로를 잠시 마주보았다.
더는 말이 필요없었다.
호문쿨루스라면, 지금 이 방에 있었으니까!
롤랜드는 선반으로 달려가 호문쿨루스를 꺼냈다.
카리나는 호문쿨루스의 운용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된 후로는 자신의 방 높은 선반에 넣어 두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호문쿨루스와 진흙덩어리를 바꿔치기 하는 건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카리나를 속인다는 마음에 죄책감이 들긴 했지만, 아이들은 자신들이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롤랜드는 자신의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 주먹만한 크기의 찰흙 덩어리로만 보이는 호문쿨루스에 섞으며 주물럭거렸다.
“나 혼자 할게. 멜리사도 마법을 써야 할 테니까.”
멜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롤랜드가 호문쿨루스를 조형하고, 움직이는 데 정신을 쏟는 사이 그녀는 자신들이 무사히 탈출하기 위한 마법을 써야 했다.
“있잖아.”
롤랜드가 조용히 말했다.
“만약 이게 실패하면…… 너만 도망치는 거야. 알겠지?”
“으응…….”
멜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롤랜드는 잠시 호문쿨루스에 정신을 집중했다.
단 수십 초 만에 호문쿨루스는 롤랜드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원래는 십 분은 걸렸는데.’
롤랜드는 세삼 자신이 체스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는 걸 깨달았다.
힘을 통제하려고만 했던 렝케와는 달리, 체스는 자유롭게 마력을 운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계단을 올라오고 있어.”
롤랜드는 창문을 열고는 멜리사를 향해 손짓했다.
“먼저 내려가.”
멜리사는 능숙하게 충격을 감경할 만한 방어 마법을 몸에 둘렀으나 내려가기 전, 조금 주저했다.
“……엄마는.”
“엄마는…… 괜찮을 거야. 그 사람이 노리는 건 나뿐이니까.”
롤랜드는 멜리사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아이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만 손아귀에 쥐면 렝케는 만족할 거라고…….
멜리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2층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이내 롤랜드도 멜리사를 따라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이들은 깃털이 바닥에 내려앉는 것처럼 땅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롤랜드가 멜리사를 향해 물었다.
“그 사람, 지금 어디에 있어?”
“우리 방.”
롤랜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호문쿨루스의 제어를 그만두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어둠으로 덮은 채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우다다 달려 나갔다.
상황을 알아챈 렝케가 그들을 잡으러 오기 전에 빨리 달아나야 했다.
한편, 카리나는 무언가 머리를 찌르는 듯한 격통에 잠에서 깨어났다.
이 찌르르한 통증을 달래라면 약이라도 먹어야 할 듯했다.
그녀는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이들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뭐지?’
그녀는 아이들의 방을 향해 서둘러 다가갔다.
카리나가 아이들의 방을 막 들여다보았을 때였다.
“뭐, 뭐야!”
렝케의 목소리였다.
그 순간, 몸이 뻣뻣하게 굳고 머리가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어.’
분명, 별채엔 클로드가 직접 결계를 쳐 두었다.
그래서 그동안 마음 놓고 지낼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체스가 침입하려 시도한 이후로 클로드는 결계를 더더욱 강화했다.
하지만 방금 들은 목소리는 분명 렝케의 것이었다.
카리나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
그녀를 흉흉하게 바라보는 렝케의 손에는 진흙 덩어리가 들려 있었다.
‘호문쿨루스.’
자신이 아이들의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높은 선반에 숨겨 두었던 호문쿨루스였다.
상황을 파악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렝케의 침입을 눈치챈 아이들은 그를 호문쿨루스로 속였다.
그리고…….
‘창문으로 탈출했네.’
짧은 시간에 상황을 파악한 카리나는 바로 다음 행동을 취했다. 바로 렝케의 발목을 붙잡는 것이었다.
카리나는 무작정 렝케에게 달려들었다.
아이들은 탈출했으니 도움을 청하러 갈 것이다.
그동안 시간을 벌어둬야 했다.
이 자가 아이들을 쫓아가기 전에.
“아악……!”
카리나는 전신이 짓눌리는 듯한 고통과 함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저항해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렝케는 대놓고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몸을 돌리더니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때, 무언가가 그녀의 머리를 번뜩이며 지나갔다.
‘롤랜드가 준 마정석!’
방어 마법이 걸려 있다는 마정석은, 렝케를 공격하지는 못해도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카리나는 고통에 시달리는 몸을 겨우겨우 움직여 마정석을 꽉 쥐였다.
이내, 샛노란 빛이 방을 한가득 메웠다.
그리고…….
“으아아악!”
이번에는 렝케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