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카리나는 목에서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덩어리를 삼키려 노력했지만, 이내 실패하고 말았다.
“……롤랜드, 멜리사.”
그녀의 목소리엔 명백한 물기가 섞여 있었다.
아이들이 불안한 눈초리로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정신 차려, 카리나.’
카리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자신이 울면 아이들은 더더욱 불안해할 뿐이다.
카리나는 자꾸만 일그러지려는 자신의 얼굴을 숨기고 싶어서 아이들을 품에 끌어안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여느 때처럼 그녀의 품에 파고드는 대신, 뻣뻣히 서 있을 뿐이었다.
카리나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안이했어.’
만에 하나라도 아이들이 렝케 경과 만날 가능성을 생각해야 했다.
항상 에두아르와 함께 있다고 안심할 게 아니었다.
그녀의 안이함으로 인해, 아이들은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어 버렸다.
카리나는 아이들에게서 조금 물러나서, 그들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얘들아.”
“…….”
카리나는 아이들과 눈을 맞추려 했지만 롤랜드도, 멜리사도 자꾸만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카리나는 직감했다.
지금, 섣불리 무언가를 잘못 말했다간 아이들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말 것이다.
이미 렝케가 그들에게 준 상처보다 더더욱 큰 상처를.
카리나는, 이제 아이들에게 렝케보다 훨씬 큰 존재가 되어 있었으니까.
“나는 평생 너희 엄마야. 누가 뭐라고 하든 간에 그 사실은 절대 바뀌지 않을 거고. 알겠지?”
카리나는 힘주어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말했다.
자신의 말이 진심이라는 사실이 부디 전달되길 바라면서.
슬프게도 아이들은 그녀의 말을 순순히 믿는 것 같지가 않았다.
도리어 더 불안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멜리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다 거짓말이었잖아요, 전부, 전부 다…….”
한번 터진 물꼬는 걷잡을 수가 없어졌다.
“저희가, 레, 레, 렝…….”
롤랜드가 제대로 렝케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는 멜리사의 뒤를 이었다.
“렝케 브리튼의 조카라는 것도 거짓말이었어요. 블로에라는 성도 처음부터 거짓말이었고요. 저희에겐…… 이름이 없어요.”
그제야 카리나는 아이들이 어느 지점에서 그리 큰 충격을 받았는지 깨달았다.
롤랜드와 멜리사는 여태껏 자신들이 렝케의 외조카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렝케를 두려워하고 미워하면서도 그와 피가 섞여 있다는 생각을 결코 버리지 못했다.
또한 고아원에서 자라온 아이들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부모님의 성, 블로에에도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어머니와 아버지조차 거짓이었다.
입술만 달싹거리는 멜리사를 대신해 롤랜드가 말을 계속 이었다.
“카리나가 저희 엄마라는 것도…… 다, 다 거짓말이었잖아요. 그쵸?”
“…….”
카리나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에두아르와 클로드도 그들을 멍하니 내려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
카리나는 대여섯 개는 될 듯한 대답을 떠올렸지만, 그중 무엇 하나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녀와 아이들이 부모자식 행세를 하기 시작한 계기는 거짓말이 맞았으니까.
마침내 그녀가 선택한 건, 아주 작은 기억이었다.
“롤랜드.”
롤랜드가 작게 몸을 떨었다.
“네가…… 나를 처음으로 엄마라고 불렀을 때가 생각나?”
롤랜드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아이가 카리나의 말에 수긍한 순간이었다.
“그때도 거짓말이었어?”
“…….”
“나를 엄마라고 부르고 싶다는 게, 거짓말이었니?”
카리나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었다.
“적어도 나는 거짓말이 아니었거든. 엄마라고 해도 된다는 거.”
롤랜드의 큰 눈망울에 물기가 맺혀 흔들렸다.
“아아뇨…….”
흐느낌이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카리나는 롤랜드를 가만히 안고 토닥거렸다.
“봐봐. 거짓말 아니잖아.”
롤랜드는 카리나의 품속에서 흐느끼느라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카리나는 조금 전부터 우두커니 서 있는 멜리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롤랜드의 엄마면, 당연히 멜리사의 엄마이기도 하지. 너희들은 남매니까.”
그녀는 멜리사도 같이 품에 끌어당겼다. 멜리사는 이번에는 거부하지 않았다.
도리어 평상시처럼 그녀의 품속에 파고들었다.
절대 그녀의 품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렴. 알겠지?”
아이들의 입에서 울음과 뒤섞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네…….”
“네에…….”
카리나는 아이들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자, 이제 불러 봐.”
잠깐의 침묵 후.
롤랜드와 멜리사는 동시에 그녀를 불렀다.
“엄마…….”
“엄마……!”
카리나는 아이들을 더더욱 세게 껴안아 주며 안도했다.
그녀와 아이들의 관계를 망가뜨릴 뻔한 거대한 고비가 지나갔다.
동시에, 그녀는 렝케를 더더욱 용서할 수 없어졌다.
그가 저 지하 감옥에서 평생을 빛을 보지 못하고 산다고 해도 이 감정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잠시 후.
그녀가 눈물범벅이 된 아이들을 놓아주었다.
영원히 아이들을 품에 안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아 주고, 아직도 긴장으로 덜덜 떠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우유 한 잔씩이라도 먹이며 안정시켜야 했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아이들의 얼굴을 차례로 닦아 주었다.
“세수해야겠네. 영 엉망이다.”
아이들을 껴안은 탓에 카리나의 앞자락 역시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되어있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제 자신은 상복을 입고 다닐 필요가 없다.
상복을 중고로 사고파는 사람은 없으니, 그냥 버릴 옷이었다.
카리나는 아이들의 손을 하나씩 잡았다.
“세수하러 가자.”
“혼, 혼자서 할 수 있어요.”
“저도요.”
카리나는 다시 한번 안도했다.
예전부터 아이들은 세수만큼은 혼자서 하고 싶어 했다.
다 컸다나 뭐라나.
카리나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욕실로 걸어가는 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브리튼 양.”
아이들이 욕실 문을 닫자, 클로드가 입을 열었다.
“잠깐 시간을 내 줄 수 있나?”
“네, 말씀하세요.”
카리나는 여전히 욕실 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회피하듯 대답했다.
상황은 진정된 듯했지만, 아직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사실, 아까도 이 말을 하기 위해 불러낸 것이었는데…… 잠시 잊어버려서.”
클로드가 조금 쑥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이들을 정식으로 입양하는 건 어떠한가?”
“……!”
카리나의 초록빛 눈이 깨달음에 흔들렸다.
그래,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아이들을 안심시켜 줄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었는데.
‘렝케 경은 아이들을 정식으로 입양하지 않았어.’
그야 당연했다.
그는 아이들을 죽은 여동생의 자식들로 위장했으니까.
전생에 읽은 소설 속에서 후계자로 삼긴 했어도, 호적에 올린 게 아니라 상속인으로 지정했을 뿐이다.
따라서 카리나가 아이들을 입양하고자 한다면 그녀를 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본디 정식 입양은 귀족들이나 하는 거긴 하지만…….’
애초에 정식 입양은 귀족들이 후사를 잇기 위한 제도였기에, 평민들은 그 제도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카리나는 서류 한 장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 이번 사건으로 인해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누가 뭐라 하든 당당히 카리나를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권리를 선물할 것이다.
바로 그다음 날.
카리나와 아이들, 그리고 클로드는 토르스의 명부를 관리하는 서기관 앞에 섰다.
서기관은 여태껏 토르스의 녹을 먹어오면서도 카리나와 클로드를 만난 건 처음이라,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 여기에 이름을 각각 써넣고…… 지장을 찍으시면 됩니다.”
카리나는 단출한 서류 두 장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 같은 양식의 서류엔 단 한 문장과, 서명란이 전부였다.
 ̄ ̄ ̄ ̄ ̄ ̄ ̄ ̄ ̄ ̄ ̄ ̄ ̄ ̄ ̄ ̄
[ ]를 입양합니다.
부 [ ]
모 [ ]
 ̄ ̄ ̄ ̄ ̄ ̄ ̄ ̄ ̄ ̄ ̄ ̄ ̄ ̄ ̄ ̄
카리나는 서류 각각에 롤랜드와 멜리사의 이름을 써 놓고, ‘부’란은 비워둔 채 ‘모’란에만 자신의 새로운 이름, 카리나 브리튼을 적어넣었다.
단 몇 분 만에 ‘롤랜드를 입양합니다.’, ‘멜리사를 입양합니다.’를 적은 서류가 완성되었다.
아이들은 신기해하는 얼굴로 자신의 엄지손가락에 새빨간 인주를 묻혀 지장을 찍었다.
그녀는 서류 두 장을 갈무리한 다음, 서기관에게 건네려 했다.
“그, 잠깐.”
클로드가 어딘가 망설이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카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네?”
“그…….”
무언가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 듯해, 카리나는 서기관에게 서둘러 서류를 건네 버렸다.
“죄송해요. 이제 말씀하세요, 각하.”
“아…… 아니다.”
클로드는 당황한 얼굴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카리나는 대체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아이들의 반응에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진짜로 카리나가 우리 엄마인 거예요?”
자신을 간절하게 올려다보는 두 쌍의 눈망울에 가슴이 조여들었다.
카리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항상 너희 진짜 엄마였어.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고.”
“……!”
그 당연한 말에 감동한 기색이 역력한 아이들이, 두 팔 벌려 카리나에게 안겨들었다.
카리나는 아이들의 온기를 느끼면서 생각했다.
그 어떤 일이 닥쳐도 이 아이들을 지키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