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카리나는 순식간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녀가 의도하긴 했지만,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건 자신의 치부가 만천하에 드러난다는 사실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다 롤랜드와 멜리사를 위해서야.’
현재 공작저에 머물고 있는 자들은 그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모두 카리나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다.
확신은 할 수 없어도, 대다수는 롤랜드와 멜리사를 귀여워했다.
여차할 때 아이들에게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무슨 일이지?”
타이밍 좋게 클로드가 나타났다.
당연히, 그녀와 미리 상의한 상황이었다.
이 모든 연극은 결국 클로드가 있어야 성립 가능한 것이었으므로.
우습게도, 클로드를 보자마자 렝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공작 각하!”
그는 곧바로 맨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자가 침입자인가?”
“네.”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찾아왔는데, 출입을 허락하지 않자 무단으로 침입하였습니다.”
“사실이라면 큰 문제로군.”
그때, 렝케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오직 클로드만을 바라보았다.
“예, 다 사실입니다.”
클로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백인가?”
“예.”
수군거림이 퍼져나갔다. 변명 한 번 하지 않고, 순순히 침입을 인정하는 렝케의 모습은 상황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이상했던 것이다.
“무단 침입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들어 주십시오.”
렝케는 잠시 뜸을 들였다.
“공작저에 전 주인을 배신하고 공작가를 우롱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각하께 알리고 싶었습니다.”
“누구지?”
렝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입 밖으로 이름을 내지 않았다.
대신, 기다란 팔을 뻗어 카리나를 가리켰다.
“이 여자입니다.”
“……!”
순간 일대가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이 일제히 카리나를 바라보면서, 한두 마디씩 내뱉어 귓가에 웅웅대는 소리만 들릴 정도였다.
결국 소란은 클로드가 제지한 다음에야 겨우 끝이 났다.
렝케는 자신의 목소리가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조용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저년은 사생아입니다! 어미의 천박한 습성을 그대로 빼다 닮아서, 볼 때마다 소름이 끼치곤 했죠.”
카리나는 참지 않았다.
그녀는 어머니를 한 번도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카리나의 어머니는 죽는 바로 그 날까지 딸은 안중에도 없고 렝케 경의 관심을 받는 데에만 열중했으니까.
“그 천박한 습성을 가진 여자를 가까이 한 건, 바로 당신 아닌가요?”
카리나가 자신의 출생을 인정하자 사방에서 놀라움과 경악에 찬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입맛이 썼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당연히 클로드가 비정상인 케이스였다.
예상은 하고 있었기에 딱히 놀랍거나 실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약간 안심이 되기도 했다.
모든 일이 이렇게 예상대로 굴러간다면, 렝케 경과 그녀 둘만 몰락하는 정도에서 그칠 수 있을 것이다.
“보십시오.”
렝케가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이 여자는 사생아를 거둬 주고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제가 애지중지 키우던 외조카들을 납치해서 도망쳤습니다.”
카리나는 헛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애지중지라. 렝케는 사전에서 애지중지의 의미 한번 찾아보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그동안 외조카들을 애타게 찾고 있었는데, 부끄럽게도 제 사생아가 출생을 숨기고 남부에서 사기행각을 벌이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렝케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각하, 제 조카들을 돌려 주십시오. 죽은 여동생이 남긴 아이들입니다!”
내막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껌벅 속아 넘어갈 만한 열연이었다.
하지만 공작가에서의 카리나의 위치가 워낙 견고했던 덕인지, 렝케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이 더욱더 많았다.
그 사실이 카리나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카리나는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롤랜드와 멜리사는 당신의 조카가 아니야.”
그녀는 코니가 사흘 만에 가지고 돌아온 증거들을 가방에서 꺼냈다.
혹시나 잃어버릴까 봐 최근 들어 항상 곁에 끼고 있는 서류들이었다.
“출생기록 없음. 롤랜드는 3살, 멜리사는 2살 때 고아원 입소. 둘 모두 부모를 기억하지 못함. 그리고…….”
코니는 고맙게도 카리나가 물어보지 않은 정보들도 한 아름 끌어안고 왔다.
잘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게 나올지도 모른다면서.
카리나는 렝케에게 다가가 서류 한 장을 보여주었다.
바로 한 귀족 출신 여인의 사망신고서였다.
“당신의 여동생에겐 자식이 없었어요, 렝케 경.”
렝케는 처음으로 나온 자신의 이름에 흠칫했다. 꼴에 이미지는 지키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
“그리고, 당신이 고아원에서 계속 저택으로 데려가고, 실험하고, 실패해서 돌려보낸 아이들…… 지금 다들 어떻게 된 줄 알아?”
카리나는 이를 악물며 한 음절 한 음절 내뱉었다.
“불구가 되거나, 정신적인 문제가 생기거나, 둘 다 없더라도 트라우마에 시달려. 그래서 북부의 모든 고아원에서 접근 금지를 당했지.”
코니가 가지고 온 숫자들은 카리나가 간결한 겉모습과는 달리 무시무시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건 아동학살입니다.’
코니가 분개하면서 얘기할 정도로.
여태까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건 그 누구도 고아들에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라면서.
“무언가 반박할 만한 자료가 있나, 렝케 경?”
“사생아년의 말을 어떻게……!”
“시끄러워!”
카리나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체스의 목소리였다.
“사생아, 사생아. 거참 시끄럽네. 그래, 부인이…… 아, 부인이라고 부르면 안 되나? 여튼 사생아라고 쳐.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
그는 진심으로 흥분한 듯, 렝케를 향해 삿대질했다.
“부인이 내 목숨을 구해 줬다는 사실이 없어지기라도 해?”
체스에게 동감하는 듯한 웅성거림이 사방에서 일었다.
“내 여신인 것도 달라지지 않지.”
에이드리안이었다.
“부인은 내 병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했고, 고쳐주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지.”
이건 아서였고.
“음, 부인의 출생은 둘째치고…… 학대당하던 아이 둘을 구출했다면 칭찬받아야 마땅한 것 아닌가요?”
베리티는 언제나처럼 핵심을 꿰뚫어 보였다.
카리나의 출생은 단순히 시빗거리일 뿐, 렝케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바로 외조카라고 주장하는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 숨긴 거야! 왜! 사실대로 말하면 내가…… 부인을 싫어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울먹이는 아스트리드까지.
카리나는 깨달았다.
자신은 여태까지 무언가를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사생아를 가신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확실히 사교계에선 비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그녀를 단순히 출생 때문에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이들이 없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카리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 모두가 그녀를 단순히 사생아라는 이유로 싫어할 거라고 생각한 건, 지나친 비약이었다.
‘아냐, 비겁했어.’
카리나는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치기가 두려워 소중한 동료들과 친구들을 깎아내렸다.
신 포도를 바라보기만 하는 여우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카리나는 그들 모두를 껴안고 싶은 충동과,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렝케의 처리였다.
그 이후에 고마운 사람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클로드가 차갑게 물었다.
“더 할 얘기가 있나, 렝케 경?”
“…….”
“그럼, 그대가 내 영지에서 한 일들에 대해 말해보지. 증인에 따르면 학대를 당하는 듯한 아동을 한 명 토르스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내 가신을 협박했을 뿐만 아니라 사악한 마법까지 걸었다. 오늘 있었던 불법 침입은 덤이고.”
“각, 각하…….”
“이 모든 걸 종합해보았을 때, 그리고 고아들에 대한 학대까지 입증된다면…….”
클로드는 무심하게 결론을 내뱉었다.
“사형감이군.”
“……목,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렝케는 양 무릎을 모두 꿇었다.
카리나는 어이가 없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렝케는 이렇게나 비굴하며, 비겁한 사람이었다.
‘겨우 이 정도 되는 자에게, 나와 아이들은…….’
결국 도망치긴 했다만 평생을 불행하게 살 뻔했다. 심지어 멜리사는 목숨까지 잃을 뻔했고.
‘진작 도망쳐야 했어.’
카리나는 가슴에 손을 얹어 몰려오는 후회를 가라앉혔다.
지나간 일을 생각해보았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각하, 제발, 제발……. 토르스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아직 내 가신의 심장엔 그대가 강제로 주입한 표식이 남아 있는 것 같다만.”
“지, 지금 바로 제거하겠습니다!”
렝케는 손짓 몇 번으로 순식간에 표식을 제거했다.
“보십시오. 바로 처리했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발 목숨만……!”
클로드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감경될 만한 사유는 없는 듯한데. 피해자에게 용서를 받는다면 모를까.”
“……!”
말뜻을 알아들은 렝케의 입이 곧바로 벌려지더니, 카리나를 향해 사과를 쏟아냈다.
“카리나,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하다. 여태까지 내가 한 것들……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 제발 이번 한 번만 이 아비를 용서해 다오. 응? 넌 내 유일한 피붙이란다. 너 말고는 나는 이 세상에서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
머리가 식었다.
만약, 카리나가 아주 어렸을 때 이런 말을 들었다면 렝케를 위해 목숨마저도 바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카리나는 그러기엔 너무 자랐고, 너무 많은 일들을 겪어 왔다.
아직도 자신을 멍청한 어린아이쯤으로 생각하는 렝케가 어이없어질 정도였다.
“제겐 부모님이 없습니다.”
카리나는 한마디를 딱딱하게 내뱉고는 바로 몇 걸음 물러나 버렸다.
“카리나……!”
클로드가 코웃음 쳤다.
“진짜 자식으로 인정해 준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저런 반응이 오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아, 아닙니다. 카리나는 제 친딸입니다. 당장 호적에 이름을 올리겠습니다. 정당한 후계가 될 수 있도록 유언장까지도 작성하겠습니다.”
렝케는 허둥지둥 손을 움직여 마법 유언장을 꺼내 허공에 무언가를 휘갈기기 시작했다.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렝케의 친자식으로 인정받느니 차라리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 딱지를 붙이고 있는 게 나을 듯했다.
하지만 카리나는 클로드가 왜 렝케에게 자신을 자식으로 인정하도록 유도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다.
‘각하는…… 내가 걱정되었던 거야.’
그 앞에서 보인 추태를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새로운 유언장의 증인은 내가 되어주지.”
클로드는 마법 유언장에 마정석을 하나 박아넣었다.
“이제부턴 카리나 브리튼 양이라고 불러야겠군.”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차올랐다.
부모에게 자식으로 입적된 사생아와, 그렇지 못한 사생아의 대우는 천지 차이였다.
렝케 경이 카리나를 호적에 올렸으니, 이제 그녀는 다소 쑥덕거림은 들을지언정 험한 말은 듣지 않을 것이다.
남작가의 상속녀에게 출생으로 시비를 걸 자는 없을 테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렝케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직 그 자신의 목숨뿐이었다.
“그, 그럼 각하, 보내주시는…….”
클로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사형은 면할지도 모른다고 했지, 풀어 준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무, 무슨…….”
“치체스터 경, 지하 감옥에 아직 출입이 가능한가?”
치체스터의 입이 놀라 떡 하니 벌어졌지만, 이내 베테랑 시종장답게 냉정을 되찾고 대답했다.
“최근 50년 동안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가두는 건 문제없을 겁니다. 감옥이니까요.”
“그래? 그럼 거기다 집어넣어.”
“하지만 각하, 50년 동안 관리하지 않은 공간에 귀족을 가두기는 좀…….”
“평민이면 가두어도 된다는 소린가? 경은 그만 말하는 게 좋겠군. 당장 시행하게. 공작가의 가신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이도록 해.”
치체스터 경은 명령에 따랐다.
그는 입을 꽉 다문 채, 렝케를 거칠게 일으켜 지하로 향했다.
수십여 분 후.
지하 감옥에 발을 막 들인 렝케의 비명 소리가 전 공작저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