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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입양합니다 (88)화 (88/145)

<88화>

“……!”

숨이 막혀 왔다.

카리나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클로드 데비아탄이, 그녀가 사생아인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카리나의 머릿속에 아이들도, 렝케 경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클로드만이 존재할 뿐.

“왜…… 왜죠?”

카리나는 용기를 냈다.

이유를 들어야만 했다.

“이유? 그런 범죄자를 처단하겠다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제가 사생아여도,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으시는 이유 말이에요.”

당장 처치해야 할 악당보다 겨우 자신의 약점에 신경을 쓰는 바보 같은 여자로 보여도 상관없었다.

카리나는 평생을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라는 낙인이 찍혀 살아왔다.

만약, 클로드가 사생아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는 것에 대한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면…….

카리나는 알아야만 했다.

“…….”

클로드는 잠시 고심했다.

“그대에게 중요한 문제인가?”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녀가 소리 내어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내겐,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

클로드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대는 사람의 가치가 무엇으로 정해진다고 생각하나?”

느닷없는 물음에 카리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그래? 하기야…… 그대는 사람의 가치를 매겨본 적이 없겠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런 듯했다.

카리나에게 세상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니까.

그 이외 사람들의 가치는 알 바가 아니었다.

클로드가 조금 슬픈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사람의 가치를 판단해야 했다. 불만이 있는 건 아니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

그는 카리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신분, 외모, 나이……. 그런 것들이 사람의 가치를 판단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지.”

굳이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생아라는 신분은, 클로드가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요소에 불과했다.

카리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각하께선 철저하게 재능과 능력으로만 사람을 판단하시는군요.”

클로드는 천천히 대답했다.

“한때는…… 그렇게 생각한 건 사실이다. 신분과 외모, 나이가 아닌 오직 재능과 능력으로만 사람을 판단했었지.”

카리나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람에게서 신분, 외모, 나이, 재능, 능력 이 모든 걸 빼놓는다면 과연 무엇이 남는다는 말인가?

카리나의 생각을 읽은 듯, 클로드가 답을 내었다.

“한 사람의 가치를 규정하는 건, 그 사람의 행동이야.”

“아…….”

카리나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지금, 클로드의 말은 조금 전 카리나를 위로하기 했던 말과 일맥상통했다.

하지만 클로드는 단순히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꾸며내고 있지 않았다.

평소 그의 생각들이었으며, 진심이었다.

카리나는 그 사실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도, 클로드 데비아탄에 대해 모르지도 않았다.

“그동안 그대가 한 일들을 생각해 봐. 그대의 능력과 재능을 떠나서…… 제국의 그 누구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일들을 해냈지. 부인은, 아니, 그대는.”

클로드는 그녀를 부르다 말이 꼬인 모양인지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카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 전부터 클로드가 그녀에 대한 호칭을 고심하고 있다는 점이 느껴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가 불릴 수 있는 호칭은 이제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냥 카리나라고 부르세요.”

클로드의 대답은 조금 느리게 돌아왔다.

“……숙녀의 이름을 그냥 부를 수는 없지. 그대의 진짜 성이 뭔가?”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는 성을 쓸 수 없어요.”

카리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도 모른다는 데서, 클로드가 그녀와 얼마나 다른 삶을 살아왔는지 보이는 듯했다.

“그러니까 그냥, 카리나라고 불러주세요.”

“……카리나.”

클로드의 입에서 처음으로 카리나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는 그 흔해 빠진 이름이 마치 황제의 이름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중히 다루었다.

카리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요. 어렵지 않죠?”

“…….”

클로드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대도 내 이름을 불러라.”

“네……?”

카리나의 입에서 멍한 반문이 굴러 나왔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카리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꿈은 당연히 아니었다.

농담도 아닐 터였고.

“각하, 그럴 수는 없어요.”

카리나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클로드는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라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녀를 설득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간단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한 마디를 입 밖으로 내었을 뿐이었다.

“명령이다, 카리나.”

“…….”

카리나는 꼴깍, 하고 침을 삼켰다.

명령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아직 공작가의 가신이었으며…… 클로드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기 때문이었다.

“……네.”

클로드는 그 뒤에 따라와야 할 말이 있지 않으냐는 듯 카리나를 들여다보았다.

“클로드.”

카리나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이느라 클로드의 반응을 전혀 보지 못했다.

잠시간의 침묵 후.

클로드가 입을 열었다.

“그대의 사정에 대해선 당분간은 비밀로 해 두겠다. 그 작자를 잡기 위해서라도 그래야 할 것 같으니.”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느낌과 함께 카리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렝케 경이 롤랜드와 멜리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그녀가 아이들을 지켜야만 하는 현실로.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 비밀로 할 필요도 없을 거예요. 당장 내일, 제가 아이들을 넘겨 주지 않으면 제 과거를 폭로할 테니까요.”

“그대는 이곳이 토르스라는 걸 잊은 모양이군.”

카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클로드는 언제 그리 동요되었냐는 듯, 삿된 감정이 싹 가신 차가운 얼굴이었다.

“나는 토르스의 공작이다. 겨우 마법사 하나와 어린아이 한 명의 발을 묶어놓을 수 없다면, 작위를 반납해야겠지.”

“……!”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그래, 시간.

그녀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코니가 아무리 유능하고, 그녀의 수하들이 전 제국에 퍼져나가고 있다곤 해도 증거 자료를 찾아올 때까지 일주일은 족히 걸릴 것이다.

사실 카리나는 원래 자신을 렝케 의 먹잇감으로 던져 주어서 시간을 끌 생각이었다.

전 주인을 배신하고 공작가를 속인 사생아가 얼마나 비참하게 몰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하지만 그 방법은 쓸 수도 없었고, 써서도 안 되었다.

클로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준비가 끝날 때까지 그자의 발을 묶어놓는 건 내가 맡겠다. 그러니 안심하고……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도록.”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마치, 카리나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망설이는 것처럼.

“블로에 부인.”

카리나는 그의 뜻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렝케가 터뜨리기 전까진, 그녀의 가짜 신분은 발설되지 않아야 했다.

그녀는 정중히 무릎을 굽혔다.

“예, 각하.”

* * *

카리나가 집무실에서 나간 후.

클로드는 책상에 반쯤 무너지듯 엎드렸다.

‘그런 모습…… 처음 보았지.’

클로드가 아는 한, 카리나는 항상 당당했다.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서라면 불 속이라도 뛰어들 여자였다.

하지만, 오늘의 카리나는…….

클로드는 눈을 감았다.

조금 전, 카리나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하게 떠올랐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던 모습이.

당장이라도 렝케라는 작자를 산산조각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참았다.

아무리 렝케 브리튼이라는 자가 보잘것없이 보인다 한들 귀족이었다.

즉결 처분을 내렸다가는 일이 크게 번질 수 있었다.

특히, 지금처럼 토르스의 급속한 성장에 놀라 견제하려는 가문들이 속속들이 나타나는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클로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렝케 브리튼을 당장 오체분시할 수는 없지만, 그의 파멸을 위한 함정을 파려면 서둘러야 했다.

‘기다려라.’

클로드는 이름조차 오늘 처음 들은 마법사에 대고 맹세했다.

‘네가 여태까지 무고한 사람들에게 입힌 상처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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