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입양합니다 (87)화 (87/145)

<87화>

카리나가 클로드 데비아탄에게 모든 걸 털어놓는 방법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어린아이를 매정하게 내칠 사람이 아니었다.

롤랜드도, 멜리사도 렝케 경의 손에 다시 넘어가느니 클로드의 가신으로 자라는 게 행복할 것이다.

이제 카리나는 알았다.

그녀가 아는 클로드 데비아탄은 전생에 읽은 소설 속 토르스 공작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소설 속 묘사처럼 롤랜드에게 집착하고 능력에만 눈에 불을 켜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이를 존중하고 능력을 신중하게 키워줄 좋은 군주라는 걸…….

그래서 카리나는 아이들의 안위에 대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들이 너무 상처받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아이들에게 언제나 엄마로서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렇게 저버리고 떠나게 될 줄이야.

하지만 카리나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위험해져.’

카리나가 잠시 뜸을 들이는 사이에, 클로드가 기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부인,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

카리나는 조금 놀랐다가, 이내 체념했다.

역시 코니가 떠나기 전에 다 말하고 간 모양이었다.

“코니 씨에게서 다 들으셨군요.”

카리나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설명은, 사생아라는 고백밖에 남지 않는다.

참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그녀가 가장 꺼려 하는 고백만 남아 있다니!

그때.

클로드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 그녀를 향해 성큼 걸어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코니는 어제 내게 보고할 때 마지막으로 보았다.”

“……?”

카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면, 뭐를…?”

클로드가 그녀의 양어깨를 으스러뜨릴 듯 붙잡았다가, 그녀가 신음하자 곧바로 놓아주었다.

어깨가 얼얼했지만 문지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설마.’

카리나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듯 떠올랐다.

‘렝케 경이 벌써…!’

그가 자신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클로드에게 말했다.

생각나는 유일한 가능성은 그것뿐이었다.

“대답해라.”

클로드가 으르렁거렸다.

“왜, 부인의 심장에 다시 표식이 생긴 건지. 어떤 놈이 이런 짓을 한 건지. 그리고 그걸 왜 바로 보고하지 않은 건지. 당장 얘기해.”

아.

카리나는 그제야 자신이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클로드는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은….

‘각하는 아직, 아무것도 몰라.’

그 사실은 너무나 달콤해서 시간을 영원히 멈춰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카리나는 신이 아니었기에, 시간은 째깍째깍 흘러갔다.

카리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설명할게요, 전부.”

두 번째 설명은 좀 더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렵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코니에게 설명할 때가 마음만큼은 덜 불편했던 것 같기도 했다.

카리나는 가장 어려운 고백을 마지막으로 미루어두고, 렝케가 아이들에게 가한 학대부터 담담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설명을 멈추어야만 했다.

클로드가 카리나의 말을 끊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부인, 지금 뭐라고 했나? 롤랜드를 대마법사로 만들기 위해…… 멜리사를 고문했다고?”

“……맞아요.”

카리나는 쓰게 대답했다.

“전, 그걸 보고만 있었고요. 아이들의 그 무엇도 아닌…… 그냥 하녀였으니까요.”

“……그래, 그랬단 말이지. 그리고 그자가 부인을 찾아온 거군. 아이들을 다시 데려가려고.”

“네.”

가슴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치밀어올랐다.

단순히 클로드에게 모든 걸 털어놓아야 하는 이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클로드는, 아이들이 당한 일들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듯했다.

목이 뻐근했다.

‘각하는…… 아이들을 잘 보살펴 주실 거야.’

카리나는 인정했다.

자신은 아이들을 지켜줄 수 없다.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자존심 한 장을 벗겨낼 때였다.

“각하.”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심상치 않은 기색에, 클로드가 염려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카리나는 고개를 저으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짐작하셨지만 블로에는 제 성이 아니에요. 당연히 결혼한 적도 없고요.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카리나는 크게 한 번 심호흡했다.

조금이라도 클로드에게 진실을 털어놓는 시간을 늦추고 싶었지만, 도저히 미룰 수가 없었다.

클로드가 그녀를 걱정해 주면 걱정해 줄수록, 이 상황이 너무나 견딜 수가 없어졌기에.

“전…… 렝케 경의 사생아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카리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도저히 클로드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분명, 나를 경멸하겠지.’

의외로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도리어 눈물샘이 말라버린 것처럼, 눈이 뻑뻑했다.

“그래서?”

카리나는 방금 자신의 귓가에 스친 목소리를 믿을 수 없었다.

클로드는 그녀를 경멸하지도, 질책하지도 않았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클로드가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들었다.

조금 전 흥분하여 어깨를 움켜쥐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고개를 들어라.”

“…….”

카리나는 명령에 복종했다.

아무리 곧 내쫓긴다고 해도, 그녀는 아직까지는 공작가의 가신이었으니까 클로드의 명에 따라야만 했다.

‘아.’

카리나는 속으로 신음했다.

집무실까지 오는 그 짧은 거리에서, 카리나는 수십 가지도 넘는 클로드의 반응을 예상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

클로드는 그녀에게 분노하지도 실망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 쓰라린 과거와 진짜 신분을 두고 동정하지도 않았다.

단지, 카리나의 과거와 실체를 알기 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눈과 감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리나는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대가 누구든 상관없어. 가명을 썼든, 과거가 무엇이든…… 중요한 건 그대가 내게, 그리고 토르스에서 없어선 안 될 존재라는 사실뿐이다.”

클로드 데비아탄은, 그녀 바로 앞에 있었다.

카리나는 그 존재감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으나, 동시에 그가 조금이라도 멀어지는 게 너무나 두려웠다.

그녀는 아직도 클로드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손이 한심하게도,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다는 사실도.

카리나는 가슴 속을 맴도는 한 마디를 토해냈다.

“죄송해요.”

침묵.

“죄송해요, 정말로……. 저 같은 걸, 받아 주셔서…….”

카리나는 이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분명 머릿속에는 조리 있게 떠오른 말들이, 눈물범벅이 되어 입 밖으로 조각조각이 되어 튀어나갔다.

“저, 그, 저어……. 각하를, 속였는데…….”

“사생아…… 말하는 건가.”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렝케의 추적을 피해, 아이들과 자신의 출신을 숨긴 것 정도는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렝케가 아이들의 진짜 외삼촌도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더욱.

하지만 부모로부터 인정을 전혀 받지 못한 사생아가 공작가의 가신이 되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만약 세간에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토르스 공작가의 위신 자체가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확실하게 말해두겠다.”

클로드는 아직도 간헐적으로 떨리는 카리나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지금 이 방 안에서, 그대가 사생아라는 사실을 신경 쓰는 건 오직 그대뿐이야.”

“하지만……!”

클로드가 카리나의 말을 잘랐다.

“세상엔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하는 자들이 많지. 나 또한 그에 편승해야 하나? 내 기억엔, 아니라고 내게 말해 주었던 것 같다만.”

손의 떨림이 멈춘 바로 그 순간.

클로드가 카리나를 내려다보며 확고하게 선언했다.

“그대는 내 가신이고, 누구도 내 가신을 해치려 할 수 없다. 그리고 이미 해치려 시도한 자는…….”

클로드의 눈빛이 잘 벼린 칼날처럼 서늘하게 빛났다.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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