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입양합니다 (86)화 (86/145)

<86화>

“…….”

카리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렝케 경의 말이 메아리처럼 속에 울렸다.

사생아, 사생아, 사생아…….

카리나가 여태까지 쌓아 온 것들은, 모두 그녀가 평범한 평민이라는 거짓말에 기반했다.

게다가 자신이 모시던 주인을 배반하고 도망친 사실은 분명 모두에게 불신을 심어 줄 것이다.

“잘 생각해 봐라.”

렝케 경이 별안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카리나는 더더욱 얼어붙었다.

그가 부드러워질 땐 더욱 끔찍한 요구를 하기 위해서였기에.

“롤랜드와 그 계집애만 내놓으면 된다. 그럼 넌 지금처럼 편하게 살 수 있어.”

“…….”

“참 좋은 옷을 입고 있구나. 내 옷보다 더 나아.”

카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무엇을 암시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좋은 옷, 좋은 집, 좋은 음식.

그리고 여태까지 열심히 모은 재산까지.

그녀의 본디 신분이 밝혀진다면 모조리 잃어버릴 것들이었다.

“하지만, 내놓지 않는다면 모든 걸 잃게 되겠지.”

렝케 경이 뱀처럼 쉭쉭거렸다.

“지금 너야 공작가의 비호를 받고 있다만, 과연 공작을 능멸한 죄가 밝혀져도 그럴까?”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공작을 능멸한 죄라는 말에,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각하는…… 분명, 실망하시겠지.’

아니, 실망뿐인가?

차라리 그저 사생아라는 사실만을 숨긴 것이라면 나을 뻔했다.

카리나가 그동안 클로드에게 알린 그녀와 아이들의 신상 중 진실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과부라는 것도 거짓말. 아이들의 계모라는 것도 거짓말. 모두 거짓말…….’

거짓말을 하나만 하고 가신이 되어도 처벌당할 만한 죄였는데 밥 먹듯이 해댔으니 어떤 처벌이 내려올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카리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여태까지 그녀가 발버둥 치며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렝케 브리튼의 등장 때문에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내가 바보였어.’

애초에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클로드가 가신이 되어달라 끈질기게 요청했을 때, 사생아라는 사실을 밝혀야 했다.

그것도 아니면 이름도 성도 완전히 바꾸고 숨어버리거나.

하지만 카리나는 사실을 밝히지도, 철저히 숨기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허술했던 것이다.

카리나는 그 이유를 어렵지 않았다. 알 수 있었다.

너무 달콤했으니까.

렝케 경의 손길이 닿지 않은, 따뜻하고 풍요로운 땅에서 좋은 사람들과 꾸리는 행복한 삶이.

그리고 클로드 데비아탄의 가신 ‘카리나 블로에’로서의 삶이.

‘허무맹랑한 꿈을 꾸었던 거구나, 나는.’

입맛이 썼다.

그동안 카리나는 클로드와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렝케가 그녀의 착각을 완전히 깨부수어 주었다.

클로드는 실제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간 카리나는 우물에 비친 빛 한 줄기를 하늘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침묵이 흘렀다.

렝케는 카리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녀가 해야 할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네.”

카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렝케는 이미 승리를 직감한 듯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나눌 시간만 주세요.”

“하루면 충분하겠지. 그 이상은 안 돼.”

“…….”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바였다.

렝케는 그녀에게 아이들을 어디로 데려와야 할지 가르쳐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봐라.”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카리나의 심장을 꽉 틀어쥐었다.

카리나는 이 느낌을 알았다.

‘표식이야.’

카리나는 저항하려 하지 않았다.

롤랜드가 준 방어 마법이 걸려 있는 마정석이 있었으나, 이미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마법을 다시 되돌릴 수 있는 수준은 아닐 것이다.

“경고하겠다. 네가 허튼수를 쓴다면 나는 바로…….”

“아무 짓도 하지 않을게요.”

카리나는 재빨리 말했다.

렝케는 그런 그녀를 차갑게 비웃더니 돌연히 방을 나가버렸다.

‘…….’

카리나는 그가 나간 자리를 잠시간 노려보았다.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아이들만큼은, 구할 수 있어.’

자신의 상황은 솔직히 말해, 글러먹었다.

온갖 거짓말을 나불거리고 공작가를 통째로 속여넘긴 죄는 무엇으로도 무마할 수 없을 테니까.

렝케 경이 그녀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풀면 카리나는 이미 끝난 삶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달랐다.

만약 아이들이 렝케 경의 진짜 조카였다면 카리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리나는 알았다.

그동안 렝케 경은 아이들을 속여 왔다는 걸.

아이들은 렝케 경과 그 어떤 친족 관계도 없다는 걸.

카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물이나 흘리고 있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코니 씨, 부탁이 있어요.”

카리나가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은 베가 왕국 출신 정보상, 코니였다.

코니는 지금 출장을 가지 않아 공작저 안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렝케 경은 아무런 이상을 감지하지 못할 것이다.

본디 베가 왕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유능했다는 코니는, 알아선 안 되는 정보를 알았다는 이유로 혀가 뿌리째 잘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코니의 원래 고용주는 그녀의 숨도 완전히 끊어 놓고자 했으나 간신히 제국으로 도망쳐온 것이다.

“제가 입, 입양한 아이들의 과거 기록이 필요해요. 완전한 기록이요. 출생 기록, 고아원 기록, 첫 입양처 기록…… 모든 것이요.”

코니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석판에 글씨를 썼다.

-입양이라뇨?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해야 해.’

코니는 카리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이전에 그녀는 토르스의 가신이었다.

제대로 된 사유 없이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카리나는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아무것도 아니야. 어차피 곧 모두가 알게 될 사실이니까…… 코니에게 가장 먼저 말한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어.’

그녀는 코니에게 렝케와 아이들 사이의 관계를 알렸다.

그리고 자신은 학대받는 아이들을 보다 못해 데리고 도망친 주제넘은 하녀라는 것도.

하지만 카리나는 자신이 렝케의 사생아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밝히지 못했다.

자신이 사생아라는 사실까지 밝혔다가는, 코니가 움직이지조차 않을까 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대륙 사람들의 사생아에 대한 적대감은 뿌리 깊었다.

마침내 카리나의 설명이 모두 끝났을 때.

방안엔 침묵이 지배했다.

카리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고개만 푹 숙였고, 코니는 석판에 무어라 한 자 쓰지도 못한 채 그녀를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서걱이는 소리가 났다.

-각하께선 아셔요?

카리나는 웃었다.

웃어선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뱃속에서 부글거리는 웃음이 가래처럼 터져 나왔다.

“전혀, 하나도 모르세요. 오늘 말씀드리려고요.”

코니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부인이 부인의 자리에서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 되겠군요.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부탁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하지만 카리나는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코니가 받아들여 주길.

자신과 아이들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이라도 있다면……!

카리나에게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지는 단 몇 초가 흐른 후.

코니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카리나는 숨을 들이켰다.

“정말, 정말 고마워요. 정말……. 진짜로, 잊지 않을게요.”

코니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더니, 더는 아무런 말도 석판에 쓰지 않고 바로 자리를 떠나버렸다.

일단은, 카리나는 안도했다. 코니의 실력은 몇 번이나 확인했다.

코니의 혀가 잘렸다는 사실은 그녀의 출중한 실력에 일말의 장애물도 되지 못했다.

‘이제…….’

카리나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미처 다 삼키지 못한 흐느낌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울어, 끝까지 울어. 여기서 다 울고 가야 해.’

카리나는 고통스러운 울음을 몇 분간 토해냈다.

마침내 더는 흘러나올 게 남아 있지 않았을 때.

카리나는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말끔히 단장했다.

운 티라곤 하나도 나지 않도록.

이제 그녀가 만나야 할 사람 앞에서 약하게 보이기 싫었으니까.

잠시 후.

카리나는 클로드의 집무실 앞에서 심호흡하고는, 노크 없이 문을 바로 열었다.

클로드가 자신이 신뢰하는 몇몇 가신에게만 허락한 특권이었다.

카리나는 육중한 문을 열었다.

정신없이 업무에 몰두하던 클로드가 고개를 든 순간.

카리나의 심장이 가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이게 유일한 방법이야.’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카리나는 무조건 그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방법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카리나는 토르스의 바다를 닮은,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른 클로드 데비아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각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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